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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63화 (63/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63화>

    어쩌다 공을 세워버렸다

    ***

    속된 말로 사람이 하도 어이가 없으면 얼이 나간다고 하지, 아마?

    지금 내가 그랬다.

    나는 얼이 나간 상태로 내가 들쳐업고 온 환자··· 아니, 억수라는 사람을 내려다봤다.

    곧 숨어 넘어 갈 것처럼 긴박해보이던 억수 씨는 의원들의 치료 조차 마다한 채, 본인의 속사정을 털어놓았다. 그러고는 제 할 일을 끝마쳤다는 듯 의식을 잃었다.

    “잠시만······.”

    오전의 이미지와는 상반되는 모습의 김 과장(혜민서 주부 김공저)님이 나를 살짝 밀친 채 환자의 상태를 살폈다. 나는 한 발 자국 뒤로 물러선 채, 자신을 억수라 밝힌 이 환자가 한 말을 곱씹었다.

    억수 씨는 분명 본인을 아이진에서 온 군인이라 말했고, 조선군을 피해 달아났다고 했다.

    ‘근데 그게 상식적으로 말이 돼?’

    순간 인지부조화가 일었다.

    아군이 아군을 오발 하는 경우는 간혹 있는 일이었다.

    간첩이나 무장 탈영병을 잡다가 아군의 오발에 목숨을 잃는 일도 왕왕 있고.

    하지만 억수 씨가 말한 전말은 ‘사고’가 아니었다.

    살의를 품고 이들을 덮친 명백한 살인 미수였다.

    “덕산아. 형조에 좀 다녀와라.”

    의원들이 바삐 아이진 군인들을 치료하는 사이.

    나는 평상에 철푸덕 주저 앉아 억수 씨가 한 말을 새삼 곱씹었다. 그러다가 아직 관에 신고 조차 안 한 게 떠올라 덕산이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이미 다른 분들이 가셨습니다요.”

    “그래?”

    “후.”

    한숨을 내쉬고 손을 살피니, 뒤늦게 내 손과 옷에 묻은 피가 보였다.

    상황이 하도 긴박했던지라 피가 묻은지도 모르고 있었다.

    “김 과장님, 어때요?”

    환자를 진료하다 잠시 밖으로 나온 김 과장님에게 물었다.

    어두침침한 모습의 김 과장님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셨다.

    “의원으로서 할 일을 마쳤습니다마는 병자가 정신을 차릴 수 있을지 오늘 밤 거적에 씌어 시구문(광희문)으로 나갈지는, 오직 하늘에 달렸습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인 게지요.”

    “다른 사람들은 어때요?”

    슬쩍 환자들이 있는 방을 흘긴 김 과장님이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섯 중 셋이 중태고 둘이 중상입니다. 그나마 상태가 온전한 건 거읍금이라는 자인데······.”

    “깨어 났어요?”

    아까 전만 해도 쓰러진 사람중 하나였다.

    “아, 예. 깨어나긴 진작에 깨어났습니다만, 자꾸 횡설수설만 하는지라······.”

    “횡설수설이요?”

    “조선군을 피해 달아나야 한다고 반복하고 있습니다.”

    방금 억수 씨에게 들은 말이 번뜩 떠올랐다.

    “지금 방에 있죠?”

    “예. 한 번 만나보시겠습니까?”

    김 과장님을 따라 진료방(?)으로 가자, 궁시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김 과장님이 혜민서 군사들에게 고갯짓하자, 군사들이 똥씹은 표정으로 문을 열었다.

    “피해야 돼, 피해야 돼, 피해야 돼, 피해야 돼.”

    “보시다시피······.”

    손톱을 아그작아그작 씹으면서 눈을 부릅 뜬 채 주변을 경계하는 모습이 두려움에 빠진 상태 같았다. 내가 조심스럽게 마루에 오르자, 김 과장님이 말린다.

    “환자가 어떤 상태인지 정확히 모르옵니다. 자칫 대감께 해를 입힐 수도 있는 자이니, 조금 진정이 되면 대면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억수 씨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단순한 환자들이었다면 김 과장님의 말을 따랐을 것이었다.

    하지만 억수 씨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에게는 공통적으로 자상이 깊게 나있었다. 일부는 상처가 덧나기도 했고, 억수 씨 같은 경우는 옆구리의 상처가 터져나오면서 피가 솟구치기도 했다.

    모두들 자잘한 자상까지 십수군데가 나있었다.

    무엇보다, 억수 씨가 의식을 잃기 전 남긴 말이 영 찝찝하다. 형조의 관원들이 오려면 못 해도 한식경은 걸릴 텐데.

    오지랖이라면 오지랖이겠지만 과장님껜 괜찮다고 말한 나는 조심스레 마루에 올랐다.

    환자의 상태가 상태인지라 굳이 들어가진 않았다.

    “이보세요.”

    움찔.

    환자를 자극하지 않는 선에서 말을 건다고 걸었는데, 상대가 흠칫 몸을 떤다. 그러고는 나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내가 따로 정신병리학을 전공한 적은 없지만, 환자의 상태는 전형적인 PTSD로 보였다.

    미국에선 이 PTSD가 참전 용사들로 하여금 새로운 문제로 급부상한 정도인데, 꼭 전쟁을 겪은 사람들만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는 건 아니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교통사고를 당한 사람 역시 PTSD를 앓을 수는 있다. 일종의 트라우마로 남게 되는 것이다.

    예컨대 교통사고를 당한 사람이 다시는 차를 운전하지 못 한다던가.

    사고가 난 현장에만 가면 심장 박동이 요동친다던가.

    하지만 이 정도로 심각하게 반응하는 경우는 많지가 않다.

    ‘시간이 흐르면 차차 나아지기야 하겠다만.’

    “거읍금 씨. 식사는 했어요?”

    환자에게 그때의 일을 회상하게 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더 심각한 상태를 유발 할 수 있었다.

    일단은 시간을 조금 두고 진정시키는 게 우선 같아, 식사 여부를 물었다.

    거읍금 씨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아, 안 먹었··· 노, 놈들을 피해야 돼서······.”

    “놈? 어떤 놈들이 식사도 못 하게 했나 봐요?”

    “조선군, 조선군, 조선군··· 권관, 아이진 권관······.”

    “그래요. 식사좀 할래요? 많이 야윈 것 같은데.”

    끄덕.

    “잠깐 기다려요.”

    밖으로 나온 나는 의녀들에게 이 방에 식사거리좀 넣어달라 한 뒤, 생각에 잠겼다.

    ‘아이진 권관이면 김 과장님이 말한 그놈인데.’

    이미 도성 내에는 소문이 파다했다.

    아닌 게 아니라 천동이라는 아이진의 군인이 입궐해서 직접 그곳 지휘관이 도망쳤다는 말을 전했기 때문이었다. 그게 알음알음 퍼져나가면서, 도성에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 상태였는데 거읍금 씨가 언급한 아이진 권관이 화제의 인물이자, 도망간 권관으로 알려진 사람과 일치했다.

    ‘이 사람들이 아이진 군인이면 왜 권관한테 쫓기고 있었던 걸까.’

    아이진을 수비하는 사람들이라는 전제가 깔린다면, 권관은 직속 상관이 된다.

    직속 상관이 부하들을 뒤쫓는다?

    왜?

    ‘입막음 하려고?’

    에이, 설마.

    ‘아니지?’

    아이진 권관은 전투를 앞두고 도망쳤다고 했다.

    실제로 그걸 증언한 천동이란 사람과, 평안도 절도사가 보내온 장계의 내용은 거의 일치.

    다만 다른 점이 조금 존재하는데, 도망친 권관이 절도사에게 거짓 보고를 올리고, 그 거짓 보고를 그대로 믿은 절도사가 그걸 토대로 장계를 올렸는데, 그 과정에서 생존자가 발견돼서 입막음을 하기 위해 이들을 해하려고 했다면 충분히 납득이 간다.

    ‘천동이란 사람은 도망친 권관 대신 남은 군인들이 있다고도 했으니까.’

    그 남은 군인들이 도망친 권관은 다 죽은 줄 알았겠지.

    추론일 뿐이지만, 일면에선 합리적이기 까지 한 추론을 떠올리자 모골이 송연해지는 기분이었다.

    이건 뭐, 사람 목숨이 파리 수준에도 못 끼잖아?

    “덕산아! 형조에선 멀었냐?”

    “좀 늦네요. 제가 한 번 가볼깝쇼?”

    내 추론이 정황에 의한 단순 오류길 바랐지만, 이게 사실이라면 한시라도 빨리 조정에서 논의가 되어야 했다.

    그리고 조정에서 논의가 되려면, 한참 전에 부른 형조 관원들이 와야 되는데, 이것들은 무슨 굼벵이 굼뜨기 만큼이나 감감무소식이었다.

    “아니, 됐다. 입궐좀 해야겠다.”

    형조 관원들이 도착하길 마냥 손가락 빨면서 기다릴 순 없었다.

    ***

    “그게 사실이냐?”

    강녕전.

    허둥지둥 입궐한 나는 혜민서에서 있었던 일을 모두 알렸다.

    그러자 깜짝 놀란 형님이 되물으신다.

    나도 깜짝 놀랐는데 형님은 오죽하실까 싶다.

    “예. 물론 제 추론일 뿐이라서 확실한 건 아니지만, 상식적으로 도성 한복판에 자상 입은 환자가 한 둘도 아니고 댓명 씩이나 나타날 리가 없잖습니까?”

    도성은 그저 그런 성이 아니다.

    왕이 거처하는 수도다.

    그런 판국에 단순 부엌칼에 의한 자상이 아니라, 병기에 의한 자상이 확실한 환자가 댓명 발생한 건, 가볍게 볼 일이 아니었다.

    “밖에 상선 있느냐.”

    “불러 계시옵니까, 전하.”

    “천동을 불러라.”

    잠시 후.

    상선이 천동을 데려왔다.

    “너는 며칠 전 진술 할 때, 도망한 아이진 권관 김운열이를 대신해 진성에 남은 군사들이 있다고 하였다. 그 진술에 한치 거짓이 없으렷다?”

    “그, 그때도 말씀 아뢨지만 소신이 어찌 거짓을 아뢰겠나이까.”

    “그자들의 이름을 기억하느냐?”

    “함께 칼밥··· 아, 아니. 한솥밥 먹은지 10년이 넘었사온데 이름인들 기억 못 하겠나이까.”

    “한 번 말해보아라.”

    형님께서 왜 그러는지 도통 영문을 몰라하는 천동 씨 같았지만, 하문하시니 답하지 않을 도리는 없었는지, 금방 그 입에서 익숙한 이름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김억수, 만상, 검바우, 김찬석······.”

    모두 낯익은 이름들이었다.

    나도 깜짝 놀랐지만, 형님은 더 놀라신 것 같았다.

    다만 천동 씨는 무슨 대역죄라도 저지른 양, 입을 쩍 벌린 형님을 감히 마주보지도 못 하고 바들바들 떨면서 부복한다.

    “이런 천하에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놈을 봤나.”

    “화, 황공하옵니다, 전하. 소, 소신은······.”

    “너를 말함이 아니다.”

    “···?”

    “상선!”

    “예, 전하.”

    “당장 육조당상들을 소집하라. 또한, 금부도사 안처직에게는 추포한 김운열이 감히 탈출하지 못 하도록 감시하라 전하라.”

    “그리하겠사옵니다.”

    씩씩거리며 하명한 형님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셨다.

    “진성이 네가 아주 중요한 일을 해주었구나. 치하는 내 편전에 다녀온 뒤에 하고 오마.”

    ***

    다음 날.

    사정전에서는 오랜만에 친국이 열렸다.

    그간 중신들에 대한 친국이 대부분이었던지라, 친국이라면 몸부터 바들바들 떨어댔던 중신들이었지만 오늘은 달랐다.

    친국의 대상이 본인들과는 상관이 없는 권관이란 점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 죄가 명명백백한 죄인이었기 때문이었다.

    금부도사에 의해 죄인이 친국장에 끌려오자, 모두가 김운열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미치고 펄쩍 뛰겠는 건, 당최 영문도 모르고 끌려온(?) 김운열 뿐이었다. 끌려오는 도중에 금부 관계자들에게 영문을 캐물어도, 그들은 도무지 답을 해주지 않았다.

    그저 “죄인이 무슨 말이 그리 많은가?” 채근할 뿐이었다.

    곡절이라도 알고 끌려온다면 좀 나으련만 병영(절도사가 있는 진영)에서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질질 끌려온지라 두려움은 말로 표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친국장에 도착한 그는, 본인을 내동댕이 치다시피 내던진 금부도사에게 차마 토를 달지도 못 한 채, 바짝 부복부터 했다.

    말단 무관인 그가 임금을 실제로 봤을 리 만무했다.

    그저 곤룡포 차림으로 저 위에 앉아 아무 표정 변화 없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분이 임금인가 싶을 따름이었다.

    “저, 전하··· 소, 소신 아이권관 김운열이 감히 전하께······.”

    스윽.

    임금이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운열은 흠칫 입을 닫았다.

    “내 며칠 전에 여 병사(여운철)에게 치계를 하나 받았다.”

    점점 불안해졌다.

    “···”

    “치계의 내용이 무엇인고 하니 아이진에 오랑캐가 침입하였는데, 아이권관 김운열이가 휘하의 무사들과 합심하여 용맹하게 적을 무찔렀다는 것이었다. 오죽하면 여 병사가 치계의 끄트머리에 그 공이 가히 작지 않으니 마땅히 포상해야 한다 일렀겠느냐?”

    “···”

    “과연 그 공이 작지 않다. 아이진의 군사는 고작 기백에 지나지 않는데, 기백에 지나지 않는 군사들을 독려하여 성을 지키게 한 뒤에 그 곱절이 넘는 대병력을 맞아, 일신의 안위도 돌보지 않은 채 오로지 적을 막아섰고, 또한 무찔렀으니 네 공이 어찌 작으랴?”

    “···”

    “내 너를 죄인의 신분으로 끌고 오라 한 것은 너를 치하하기 위함이었다.”

    무공을 세운 장수를 치하하기 위해 금부도사를 파견한다?

    들어본 적도 없는 일이었지만 임금이 그렇다는데······.

    불안한 마음이 점점 가셨다.

    “금부도사는 뭘 하느냐. 공을 세운 무관을 이리 홀대해서야 쓰겠느냐? 속히 포승줄을 풀어라.”

    “에? 예!”

    “내 너에게 그 날의 일을 직접 듣고 싶다. 어찌 여진족이 침입했고, 너는 어찌 막았더냐?”

    얼떨떨한 운열이 그 날의 일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물론 적당히, 아주 적당히 각색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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