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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62화 (62/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62화>

    걸립패? 거렁뱅이?

    ***

    “아이고, 오랑캐 놈들 막기도 빠듯하실 텐데 예까진 어인 일이십니까요.”

    마을에는 담실댁이 말한 군사들이 있었다.

    우두머리는 안면이 있는 아이진의 권관 나리였다.

    “오랑캐는 본관이 다 무찔렀다. 그건 그렇고, 여기에 거동이 수상한 놈들이 오지 않았더냐?”

    “거동이 수상한 놈들이라굽쇼? 오랑캐들을 말씀하십니까요?”

    “아니. 탈영병을 이름이다.”

    탈영병은 네놈이 탈영병이지.

    하고 싶은 말을 꾹 삼킨 가물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르겠는뎁쇼.”

    “그래?”

    “예.”

    “흠. 샅샅이 뒤져라.”

    권관이 명령하자, 군사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잠시 후.

    “없습니다.”

    “구석, 구석 찾아본 것이 맞느냐?”

    “코빼기도 안 보이는 걸 보면 아무래도 이산 쪽으로 간 게 아닐지요?”

    “잘못 짚은 겐가. 하지만 방향은 이쪽이 맞지 않았느냐?”

    “앞 개울을 타고 넘어간 듯 합니다.”

    “젠장. 가자.”

    한참을 찾아 헤맸지만 그들이 원하던 ‘탈영병’을 찾을 수 없자, 진짜 탈영병들은 혹시 거동이 수상한 자를 발견하면 꼭 아이진에 고하라 신신당부하고는 마을을 빠져 나갔다.

    군사들이 돌아가자, 가물은 집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석구와 함께 사당으로 향했다.

    다행히 사당까지 뒤지진 않은 모양인지, 대립군들 모두 무사했다.

    숨을 고른 가물은 내막을 물었다.

    곧 충격적인 내막이 대립군의 입을 통해졌다.

    탄식에 탄식을 금치 못 할 일이었다.

    공을 탐낸 진짜 탈영병들이 진성을 지킨 대립군들을 ‘탈영병’으로 위장하고 살인멸구하려 했다니······.

    “석구야. 어쩌면 좋겠냐?”

    “이거, 도성에 가서 나랏님께 알려야겠는데요.”

    “병사 영감이 계시는데?”

    “한통속일지도 모르잖아요.”

    하긴.

    애당초 조선군이 조선군에게 칼부리를 들이민 것만 해도 믿지 못 할 사안인데, 병사 영감이 한통속이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그럼 관찰사께 아뢰는 건?”

    “역시, 관찰사 영감도 한통속이면 이 사람들 전부 탈영병 돼서 군문에서 효수 될 겁니다.”

    “설마 관찰사 영감까지 한통속일까.”

    석구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모르죠.”

    한참을 고민한 가물은 혼자서 결정할 일은 아니라고 판단, 마을 사람들을 불러 마을 회의를 열었다.

    마을 사람들은 웃전들 한테 속는 거 한 두 번이냐며, 모두 한통속일지 모르니 나랏님께 바로 고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부분이었다.

    가물도 동감했다.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이면, 관찰사 영감이 한통속이든 말든 귀찮은 일에 휘말리게 될 테니, 관찰사나 절도사 영감께 알리고 말았을 테지만, 이자들 모두 생명의 은인이었다.

    가물은 마을 사람들 중에 한양 길에 빠삭한 사람과 장정 몇 사람을 추려 대립군들과 함께 한양길에 올려보냈다.

    ***

    며칠 뒤, 혜민서.

    “와, 그런 일이었던 거래요?”

    “예, 그래서 지금 궐이 아주 난리가 났다지 뭡니까.”

    “난리 날 만 하네요. 아니, 안 나는 게 이상하지.”

    절레절레.

    하여간 저 세상(?)이나 이 세상이나 나랏돈 공짜로 갈취하는 놈들이 널리고 널렸다.

    전번에 형님과 저녁을 먹으려다가, 국경에서 여진족이 침략했다는 소식에 흐지부지 된 적이 있었다.

    못내 궁금했지만, 민감한 사안이라 직접 묻진 않고 그냥 빠져 나왔는데 오늘 아침이 되니, 그 일이 도성 내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던 모양이다.

    김 과장님(혜민서 주부 김공저)까지 다 알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하급 무관도 이 지경인데 산간벽지 고을 수령들은 오죽하겠습니까? 저희들끼리 만날 해쳐먹겠지요. 아, 그보다 여기.”

    궁시렁거리던 김 과장님이 내게 종이를 몇 장 건넸다.

    나는 익숙하게 종이를 받아들었다.

    혜민서를 책임지는 분은 김 과장님이지만, 앞전에 말한대로 혜민서에 종두도감이 설치 됐다 보니, 혜민서의 역할을 일부 흡수해서 하고 있는 종두도감이었다.

    그리고 그 종두도감의 총책이 나다 보니 그에 따른 보고가 없을 수 없었는데, 이건 혜민서에서 시료를 받은 사람들의 명단이었다.

    이름과 나이 병명 등이 써있었고 그에 따른 처방들이 써져있었다.

    “오늘은 환자가 좀 늘었네요.”

    “의원이 충원 됐다는 소리가 그새 퍼진 게지요.”

    “김 과장님만 바빠지겠네요. 하하.”

    “예, 장금이년 때문에 몸이 두 개라도 모자라겠습니다, 아주.”

    이를 가는 시늉을 하는 김 과장님에 나는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

    말은 이렇게 해도 장금이를 살뜰히 보살펴주는 게 김 과장님인 걸 아는 까닭이었다.

    김 과장님은 과묵한 김 부장님(내의원정 김흥수)과는 다르게 동네 어디서든 볼 수 있는 친숙한 아저씨 같은 성품이었다.

    가끔 소싯적 무용담을 뽐내면서 주먹을 쥐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머리는 까지고 배는 불쑥 튀어나오게 된, 세월의 무상함에 한숨만 내쉬다가도 마누라 등쌀에 출근하는··· 음.

    비유가 좀 이상하지만, 그만큼 사람이 좋다는 뜻이다.

    사람 좋은 만큼 의술 실력도 좋고.

    “장금이는 잘 배워요?”

    장금이는 형님을 뵙고 온 뒤로 종두도감의 스타가 되었다.

    아닌 게 아니라 직접적으로 공을 치하 받기도 했었고, 꼭 내의녀가 돼서 궐에서 보자는 말을 듣기 까지 했으니 장금의 웃전들도 신경을 쓰지 않을래야 안 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에 따라 초학의로서는 파격적으로 다른 의원들을 따라 다니면서 의원들을 보조하고 있었는데, 주로 혜민서 주부로 있는 김 과장님이 어여삐(?) 여겨서 환자 진료 시에는 꼭 데리고 다니셨다.

    “이를 말입니까. 뭔 계집이 그리 궁금한 게 많은지, 이것저것 물어보는 통에 장금이랑 한시진 환자 진료하고 오면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입니다.”

    “하하. 잘 가르쳐주세요.”

    “뭐, 혼자서도 잘 하고 있는 걸요.”

    김 과장님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린 나는 새삼 명단을 살폈다.

    형식적인 체크인지라, 금방 훑고 다시 김 과장님께 돌려드렸다.

    “내일이군요.”

    명단을 받아든 김 과장님이 자못 비장한 어조로 말했다.

    밑도끝도 없는 독백에 가까웠지만, 괜히 수능에서 언어 1등급을 맞은 게 아닌 나는 단박에 알아차렸다.

    “긴장 되시나봅니다.”

    “긴장··· 되지요. 대감은 안 되십니까?”

    긴장.

    사실 나도 긴장 된다.

    내일은 드디어 고대하고 고대하던 천연두 예방접종의 첫 째 날이었다.

    지금까지는 의원들에게 그 개념에 대한 이론 교육과 실기를 교육했고, 또 각 목장에서 두창에 걸린 소들에서 두묘를 채취했었는데, 이 모든 게 드디어 마무리가 됐다.

    이제 내일이면 예방 접종을 실시한다.

    본의 아니게 종두법을 몇 백년 앞당겨 알리게 되는 역사적인 날인지라, 나도 떨리긴 매한가지였다.

    “만져보실래요? 심장이 벌렁벌렁 한데.”

    “소인은 계집 가슴 아니면 안 만집니다.”

    나는 평소처럼 김 과장님과 농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시간을 때웠다.

    사실 뭐, 혜민서에서 빨래감 나르는 일 말고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대감마님, 낮 것 잡수실 시간이십니다요.”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냐?”

    “예.”

    오전이 가장 바쁜 시간대중 하나다.

    그리고 김 과장님은 가장 바쁜 시간대중, 가장 바쁜 사람중 한 분이기도 하셨다.

    아침에 잠깐 농을 나누던 김 과장님 마저 일을 하러 가시면, 혼자 시간을 때울 수 밖에 없는데 나 홀로 집무실에 우두커니 앉아서 서예 연습한답시고 글을 좀 끄적이고 있으면 이렇게 점심 시간이었다.

    “으라차차! 오늘은 뭐 먹을까.”

    조선 팔도 서민들이 들으면 돌팔매 안 날리면 다행인 일이다만, 어쩌겠나.

    태어나길 대군으로 태어나서 먹을 복 하나는 기똥차게 잡았는데.

    “덕산아 낮 것 뭐 먹을지, 추천좀 해 봐라.”

    “···어제는 국수 말아 잡수셨으니 오늘은 탕반 드셔요.”

    “탕반? 음. 그래 탕··· 아, 아니다. 탕반은 나중에 전하랑 먹고, 오늘은··· 음, 만두. 그래, 만두가 좋겠네.”

    꿀꺽.

    “침 넘어가는 소리 예까지 들린다.”

    “쓰릅.”

    어차피 할 일이 없어서, 잠깐 없어져도 눈에 안 띄는 나는 다른 사람들 한테 방해 안 되도록 조심스럽게 혜민서를 빠져 나왔다.

    대군으로 태어나서 다 좋은데, 한 가지 흠이 있다면 음식점이 제한 돼있다는 점이었다.

    어지간한 건 집가서 만들어먹어야 한다.

    그나마 혜민서랑 우리 집이랑 가까워서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점심 시간마다 곤욕을 치룰 뻔 했다.

    “식사를 해야겠어요~ 점심엔 배가 고파요~ 그래도 상관은 없어요. 괜찮아요~ 뭐라도 먹어야 할 것 같아요. 그러면~ 나을까 싶어요······.”

    덕산이가 날 이상하게 바라보건 말건.

    이적의 빨래를 적당히 개사하곤 흥얼거리면서 집으로 향하던 그때.

    “뭐야, 저건.”

    나 정도 되면 술띠나 관복에서 자연스레 신분이 노출돼서 어지간한 사람들은 길을 비켜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시 길을 막고 있는 사람이 있을지 몰라서 덕산이가 늘 앞에서 걷는데, 요번에도 마찬가지로 앞에서 걷던 덕산이가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린다.

    누가 앞을 막고 있나, 싶어 고개를 내밀자 덕산이 신경질을 부린 대상이 내 시야에 잡혔다.

    쩔뚝거리는 모습과 주위 사람들이 눈치를 주건 말건, 주변을 살피는 모습들.

    ‘동냥질하는 분들인가.’

    사람을 외적인 면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되지만, 겉모습만 본다면 이 시대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로 거렁뱅이가 따로 없었다.

    전생에서 하도 각박한 삶을 살면서 남들에게 베풀지 못 한 이기적인 삶을 살아서 그런지, 저런 사람들 보면 괜히 돕고 싶어진다.

    뭐, 정말로 저런 사람들 한 둘 돕게 되면 집안 살림이 남아나질 않게 되겠지만 그래도 사람은 멀리 있는 사람보단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연민을 느낀다잖은가.

    “덕산아 저 사람들 뭐하는 사람 같냐?”

    거렁뱅이가 아닌데, 거렁뱅이라 착각하고 적선하면 상대나 나나 그만큼 무안한 일이 없다. 그래서 확인사살(?) 겸 덕산이에게 물었다.

    “딱 봐도 거렁뱅이 같은뎁쇼.”

    음, 내 눈이 틀리지 않은 것 같다.

    “아니면 걸립패들인가? 열댓명은 되어 보이는 걸 보면 거렁뱅이라기 보단 걸립패 같기도 하구··· 한데 그건 어찌 물으십니까요?”

    “저 사람들한테 마땅히 점심 해결 할 곳 없으면 우리집 와서 만두나 먹고 가라고 해라.”

    “예? 만두를 거렁뱅이들한테 주신다굽쇼?”

    “국법에서 금한 것도 아니잖아?”

    “그렇긴 합죠. 근데 만두는 좀······.”

    “너, 노블리스 오블리제라고 들어는 봤냐?”

    “노, 노··· 대감께서 자주 말씀하시는 노잼과 비슷한 겁니까요?”

    피식.

    “노.블.리.스. 오.블.리.제 이 자식아.”

    “쇤네가 그런 어려운 말을 어찌 알겠습니까요.”

    “있는 사람일수록 좀 베풀고 살라는 말이다. 가서 말이나 하고 와.”

    “예.”

    볕이 좀 따갑다.

    덕산이가 거렁뱅이(?)들에게 다가간 사이, 나는 볕을 피해 나무 그늘로 들어갔다. 합죽선을 딱 피고, 살랑살랑 부채 바람을 일으키니 이거 진짜 신선이 된 기분이다.

    신선 된 기분을 만끽하고 있던 그때였다.

    풀썩!

    창졸간에 들어온 육중한 소음과 함께 고개를 돌리자, 예의 거렁뱅이 하나가 모로 쓰러져있었다.

    당황한 건 덕산이도 마찬가지인 듯, 녀석의 시선과 내 시선이 서로 얽혔다.

    “뭐야?”

    기절이라도 한 건가 싶어, 황급히 달려갔다. 그리고 내 눈에 들어온 참상에 나는 깜짝 놀랐다.

    피.

    거렁뱅이라 생각했던 남자의 새하얀 옷에 빨간 피가 묻어 나오고 있었다.

    “사, 살려주십시오······.”

    의식을 잃고 혼절한 듯 보이는 사내 대신, 또 다른 남자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상태는 이 남자 역시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때.

    풀썩!

    또 다른 거렁뱅이가 풀썩하곤, 쓰러졌다.

    벌써 두 사람.

    아니.

    풀썩!

    세 사람이나 순식간에 쓰러져버렸다.

    “여, 역병······.”

    사람이 부지불식간에 픽픽 쓰러지니 역병이라고 오해한 덕산이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나는 그런 덕산의 뒷통수를 한 대 콱 쥐어박았다.

    “역병인 사람이 몸에서 피가 나냐? 얼른 들쳐 메!”

    “어, 어쩌시려구요.”

    “어쩌긴, 혜민서가 코앞인데 혜민서에 데려다줘야지.”

    쓰러진 남자 하나를 업은 나는 남자들의 일행들에게 사정을 설명하곤 혜민서로 냅다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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