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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61화 (61/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61화>

    살아 있었네?

    ***

    전투는 치열했다.

    그리고 처절했다.

    개전 두시진(4시간).

    입에서는 단내 조차 나지 않았다.

    “헉. 헉.”

    힘겹게 칼을 짚고 몸을 지탱하던 억수는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다 풀썩 나자빠졌다.

    재수 없게도 피웅덩이에 나자빠졌다.

    허우적거리고 있자, 누군가 응차 소리와 함께 그 손을 잡고 일으켜세웠다.

    일어나 상대의 면상을 살핀 억수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나갔다.

    “영감, 살아 있었소?”

    “내가 이 부적을 다른 놈들한테 주던가 해야지, 노친네 목숨줄이 질겨도 한참 질기지 않은가?”

    검바우 영감이 소매에 든 부적을 꺼내보이며 히죽 웃자, 억수도 히죽 따라 웃었다.

    “후··· 처참하구만.”

    해후한다면 이런 기쁨일까.

    사지에서 전우를 만나니 이만큼 기쁠 수 없었지만, 그 기쁨도 잠시였다.

    전장은 참혹 그 자체였다.

    역한 피냄새는 차라리 토악질도 안 나온다.

    10년 넘도록 대립질 하면서 많이 맡아도 보고, 마셔도 봤으니까.

    하지만 내장이 흘러나온 시체들과, 그 내장을 파먹는 까마귀 떼는 도무지 적응이 안 된다.

    “살았으면 됐지.”

    검바우 영감의 말에 억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맞다.

    살았으면 된 것이다.

    “찬석이, 이 자식··· 남지 말라니까, 결국 남았네.”

    검바우 영감이 한 시체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시체는 온전치 못 했다.

    적에게 난도질을 당했는지 자상만 수십군데가 넘었고, 머리에는 아이 몸통만한 도끼날이 박혀 있었다.

    “죽은 사람 불알 잡고 염불 외지 말고, 산 사람이나 찾아 봅시다.”

    평소 천동이와 마찬가지로 자신을 잘 따랐던 찬석이지만, 찬석의 죽음을 애도할 시간은 없었다. 그 시간에 산 사람을 하나라도 더 찾는 게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전투가 벌어진 반경은 진성에 국한됐지만, 아군의 시체와 적군의 시체가 한데 뒤엉켜 있다 보니 수색 반경은 제법 넓어질 수 밖에 없었다.

    “으으.”

    마침 들려오는 신음에 억수는 시체를 비집고 신음의 근원지로 내달렸다.

    “만상이!”

    시체들 속에 동료 대립군이 파묻혀있었다.

    “혀, 형님··· 어우······.”

    “나오게.”

    만상을 둘러싼 시체들을 치우고, 손을 뻗어 만상을 일으켜세웠다. 어디 다친 데는 없는지 살펴봤지만 자잘한 자상을 제외하면 없었다.

    전투 중에 혼절을 한 것 같았다.

    이후 억수는 네 사람의 대립군을 더 찾았다.

    대립군 외에도 세 명의 진군들을 찾을 수 있었다.

    생존자는 자신을 포함해 모두 아홉.

    두시진에 이어진 처절한 전투였던 걸 감안하면 제법 많은 사람이 용케도 살아남은 셈이었다.

    진성 앞 강가로 달려간 생존자들은 온몸에 묻은 진득거리는 피부터 씻었다.

    “제기랄 구원병은 아직도 안 오는구만? 김 권관이 이 새끼 치보를 보낸 거야, 만 거야.”

    만상의 독백이었다.

    “그런데 형님, 오랑캐 놈들은 어찌 물러간 거요? 구원병이 오지도 않았고, 그 많은 오랑캐를 형님하고 검바우 영감이 무찔렀을리도 만무하고······.”

    “낄낄. 이놈들이 사다리 타고 성벽 넘길래 내가 바지춤 홀라당 내려까고 오줌을 지렸지 않겠느냐. 오랑캐들도 조선 노친네 자지가 그렇게 큰 지는 몰랐는지, 기겁하면서 도망을 간 게지.”

    만상의 독백에 검바우 영감이 낄낄거리며 바지춤을 매만졌다.

    모두 파안대소를 터뜨리길 잠시.

    “만상이 넌 언제부터 기절 했었느냐?”

    “아마, 반시진 쯤 됐지? 아니, 정확히는 모르겠소. 덕수가 오랑캐한테 포위 된 거 보고 달려가다가 머리가 띵! 하더니 그 뒤론 기억이 없거든. 정말로 어찌 물러간 거요? 함락 직전이었잖소.”

    억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놈들의 목적이 함락이었겠느냐? 창고랑 마굿간이 텅텅 빈 걸 보면, 약탈이 목적이었던 것 같긴 하다만.”

    굳이 창고와 마굿간이 텅텅 빈 걸 보지 않았어도 이게 더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여진족들 입장에서는 구원병이 오기 전에, 빠르게 치고 본인들이 바라던 걸 갖고 빠져 나갔을 수가 있다.

    “주변 마을도 쑥대밭이 됐겠소.”

    진성에 이만한 병력을 보내올 정도면, 인근 마을에도 약탈 병력을 보냈을 수도 있었다.

    진군들의 발길을 주병력으로 막고, 약탈 병력으로는 인근 마을을 약탈하는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뭐, 우리가 옥황상제도 아니고 별 수 있나. 그치들 운명인 게지.”

    “지긋지긋한 오랑캐 놈들. 퉤! 내 진짜 언제 한 번 우리 조선에서 여진족들 토벌한답시고 군사 일으키면 진짜, 어? 내가 무보수로 참전할 거요.”

    “아서라. 그러다 조선군 화살 맞고 먼저 뒈진다.”

    대대적인 토벌을 일으킬 정예병이 부족한 현실을 비꼬는 검바우 영감의 농이었다.

    “뭐, 농담도 못 하나··· 크흠. 그만큼 지긋지긋하다는 거요. 빌어먹을 놈들, 치고 박고 싸울 거면 저희들끼리 치고 박고 싸우던가, 우리가 뭐, 동네 북이야?”

    “동네 북은 북이지. 킬킬.”

    “영감, 말하는 뽄새하고는 참.”

    “그보다, 억수. 이젠 어쩔 텐가?”

    검바우 영감의 말에 좌중이 고요해졌다.

    사실 목숨을 각오하고 진성을 수호하긴 했지만, 그 이후 일에 대해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애당초 그만한 대병력을 맞아 살아나리란 생각 조차 하지 않았던 게 사실이었다.

    “뭐, 권관 놈이 치보를 제때 보낸 게 맞다면, 인근 고을이나 진보에서 사람을 보내오지 않겠소?”

    “뭐라고 말하게?”

    “···”

    억수는 할 말이 궁색해졌다.

    전투를 앞두고 도망쳤다고 말하자니, 군율로 목이 잘릴지도 몰랐고, 곧이곧대로 도망한 권관과 그 졸개들을 대신해 진성을 수호했다고 하자니 믿지 않을 것 같았다.

    상식적으로 돈받고 남 군역 대신 서는 대립군이 아무 연고도 없는 아이진을 지킬 리는 만무하니까.

    설령 믿어준다고 해도 문제였다.

    대립군은 군적에 오르지 않은 사람들이다.

    한마디로, 치보를 받고 어느 진보에서 먼저 정탐을 오건 간에, 누구든 손쉽게 공을 가로 챌 수 있다는 말이었다.

    “저놈들부터 쓱싹하고 고향으로 도망치는 건 어떻소?”

    만상이 멀리서 멱을 감고 있는 진군 세 명을 가리키며 속삭였다.

    순식간에 살벌해진 분위기에 검바우 영감의 칼집이 만상에게 날아들었다.

    “저놈들이 뭔 죄가 있어? 그래도 권관 놈하고 같이 도망 안 하고, 우리랑 같이 싸운 놈들인데, 네놈은 잔정도 그리 없느냐?”

    “아니, 우리가 먼저 뒈질 수도 있으니까 하는 소리지. 막말로 김 권관 새끼 돌아와서 이 장면 봐보슈. 얼싸구나! 칼 거꾸로 들이밀지 않겠소?”

    “잘 알고 있구나.”

    생존자들 사이에서 들려온 소리는 아니었다.

    억수를 비롯한 대립군들이 고개를 돌리자, 수풀 너머에서 누군가 팔짱을 낀 채 걸어나왔다.

    김 권관과 다른 진군들이었다.

    “어디보자, 여진 오랑캐들 수급이 최소 여든··· 성까지 지켰으니, 그 공이면 나도 출세란 걸 한 번 해 볼 수 있겠구나.”

    스르릉.

    “쳐라.”

    ***

    아이진에서 5리(里) 거리에 있는 안풍골.

    촌장인 김가물은 뒷산을 올랐다.

    마을과 아이진의 거리가 가깝다 보니, 이렇게 뒷산에서는 아이진이 희미하게나마 보였다.

    그런 아이진에서 봉화 연기처럼 치솟는 연기가 보인다.

    “괜찮으려나 모르겠구먼.”

    가물은 쯧쯧 혀를 찼다.

    변경의 군사들이야 죽음을 각오한다지만, 성을 지키겠답시고 남은 자들은 모두 대립군들이었다. 그들이 무슨 죄가 있겠나.

    “극락왕생들 하시게.”

    가물은 착잡한 마음으로 산을 내려왔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마당에 자리를 잡고 볏짚을 꼬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초, 촌장 어른! 촌장 어른!”

    “응?”

    담장 너머로 고개를 내밀자, 세시진 전 쯤 성에서 함께 탈출한 마을 사람이 보였다.

    “개범이 자네 집에 간다고 안 했는가?”

    “지금 집이 문제가 아닙니다. 나와보셔요. 얼른 나와보셔요.”

    채근하는 개범에 가물은 노구를 일으켜세웠다.

    생각해보면, 소싯적에는 무릎 관절이 삐거덕거리는 일도 없었는데 세월이란 병이 뭔지 이제는 몸을 일으키는 것 자체도 일이다.

    “두 다리 멀쩡한 젊은 사람이 들어오면 될 것이지, 이제 곧 관짝 들어갈 노친네한테 나오라 마··· 허억!”

    투덜거리며 집을 나선 가물은 헛바람을 들이켰다.

    피가 떡이 된 사내들 때문이었다.

    ‘도적?’

    아니, 도적 치고는 어딘가 낯이 익었다.

    “아!”

    “촌장 어른. 아까 성에 남은 대립질 하던 아저씨들이구만요.”

    “아니, 괜찮소? 정신 좀 차려보오.”

    “무, 물좀······.”

    “물? 으응. 알았소, 잠시만.”

    가물은 허둥거리며 바가지에 물을 퍼다가 대립군에게 가져다주었다. 대립군이 물을 벌컥 들이키자, 칼에 베인 옆구리에서 피가 푸욱, 하고 솟구쳤다.

    “피, 피가 너무 많이 나는데··· 이, 일단 들어오시오, 얼른 들어와.”

    가물과 개범이 사내들을 부축해 집으로 들였다.

    마을에 의원이 있진 않지만, 약초에 빠삭한 김 가는 있었다.

    김 가가 떠오른 가물이 말했다.

    “개범이. 자네는 얼른 김 가 좀 데려오게. 이러다 초상 치루겠어.”

    “아, 알겠습니다요.”

    개범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김 가를 데리러가자, 가물은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대립군들을 일일이 지혈했다.

    그 또한 소싯적 아이진에서 군역을 서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다.

    “노인장. 우, 우리좀 숨겨주시오.”

    “숨겨줘? 무슨 말이오?”

    여진족에 쫓겨온 게 아니란 말인가?

    ‘아니지. 그 사지에서 살아 나올 수 있을 리가 없지.’

    가물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그때.

    “촌장 어른! 촌장 어른! 큰 일 났어요!”

    허둥거리며 집 밖으로 나서자, 담실댁이 보였다.

    “담실댁, 무슨 일인가?”

    “지금 마을 밖에··· 에구머니나. 저치들은 뭐래요?”

    “아, 신경 쓰지 말어. 그래, 무슨 일인데? 오랑캐 놈들이라도 쳐들어왔나?”

    “아뇨. 그건 아니고, 웬 군사들이 왔는데요.”

    “군사?”

    “노, 노인장!”

    대립군의 부름에 가물은 숨까지 헐떡거리며 예의 대립군에게 다가갔다.

    “이러다 자네들보다 나 먼저 숨 넘어가겄네.”

    “우리좀 숨겨주시오. 부탁하오.”

    “아니, 무슨 영문인지 정도는 알아야··· 혹 담실댁이 말한 군사들 때문인가?”

    끄덕.

    조선군이 조선군을 피해 숨겨달라?

    선뜻 이해 할 수 없었지만, 일단 확실한 건 눈앞의 대립군들은 마을 사람들이 탈출 할 수 있도록 성에 남은 사람들이란 것이었다.

    “담실댁. 여기 이 사람들 못 본 걸로 하고, 얼른 사당에 숨기시게.”

    “촌장 어른은 어쩌시게요?”

    “군사 나리들 왔다며?”

    “아, 알겠어요.”

    “아, 그리구 저, 석구좀 불러와.”

    “석구요? 석구는 왜요? 지금 공부할 텐데.”

    석구는 마을에서 유일하게 과거 공부를 하는 아이였다.

    마을에서 공동으로 돈을 모아서 그의 뒷바라지를 하는 중이었는데, 마을에서 먹물 좀 먹었다는 아이는 석구 밖에 없었다.

    혹시 마을 밖에 있다는 조선군과 저 대립군들이 서로 칼을 맞댄거라면, 일을 어찌해야 할지는 세상 오래 산 자신보다 먹물 좀 먹었다는 석구가 더 잘 알 터였다.

    “불러 오라면 불러오게!”

    “아, 알겠어요.”

    가물이 심호흡과 함께 집을 나서려 할 때.

    누군가 그 손을 잡았다.

    “노인장······.”

    “응? 왜, 필요한 거라도 있소?”

    “그 구, 군사들··· 군사들한테 발각되면 우린 모두 죽소. 당신들도 죽을 거요.”

    꿀꺽.

    “우, 우리도?”

    끄덕.

    “미안하오만, 우리 해, 행방을 묻거든 절대 여기 있다고 말하면 아니 되오. 꼭.”

    “걱정 말고 쉬고 계시오.”

    그렇게 말한 가물은 떨리는 마음과 함께 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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