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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60화 (60/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60화>

    도망친 군관이 공을 세우는 세상

    ***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나리.”

    천동은 연신 굽신거리는 노인장을 마뜩찮은 표정으로 일별했다.

    노인장은 아이진 성보를 보수하던 마을의 촌장이었다.

    갑작스런 여진족의 침입에 우왕좌왕하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부지 했으니 그들의 입장에서 천동은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이 없었다.

    아닌 게 아니라 천동의 재치가 아니었다면 여진족에게 사로 잡힐 뻔 한 적도 있었다.

    애당초 아이진의 길에 밝지 못 한 마을 사람들이, 스스로 피신을 했다면 얼마 못 가 여진족들에게 포로로 잡혔을 터였다.

    “인사는 나한테 하지 말고 저-기. 저기서 제놈들 모가지 내놓고 싸우는 사람들한테 하시오.”

    천동은 퉁명스럽게 말하면서 아이진성을 가리켰다.

    “나리께서는 어디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뭘 그리 꼬치꼬치 캐묻소? 난 나대로 내 갈 길이 있으니 이쯤에서 찢어집시다.”

    노인장이 머쓱해하기도 전에 천동은 탈출한 다른 대립군들과 함께 발길을 돌렸다.

    “천동 형님. 억수 형님 괜찮을까요?”

    함께 대립서던 매읍의 질문에 천동은 신경질적으로 답했다.

    “너 같으면 괜찮겠느냐?”

    “···”

    천동은 불길이 치솟는 진성을 흘깃거렸다.

    “질긴 목숨이면 살아서 돌아오겠고, 그게 아니면······.”

    “그러게, 억수 형님은 왜 남겠다고 하셔서 어휴.”

    “뭘 그리 조잘조잘거려? 그렇게 걱정되면 가서 도와주던가.”

    “아니, 나는 그냥······.”

    스무명의 대립군들은 말없이, 축 쳐진 채로 산길을 올랐다.

    동료 대립군들의 목숨을 담보로 탈출한 것 같아 기분이 썩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근데요, 형님.”

    “왜, 또?”

    “김 권관 그 자식 치보(일종의 구원요청)는 보냈을까요.”

    “치보?”

    천동도 미처 생각지 못 한 것이었는지 눈을 동그랗게 치켜 뜨며 반문했다.

    사실 정상적인 권관이라면 진이 침입을 받는 순간 군사를 이웃한 진영이나 고을에 보내 구원을 청하거나, 적침을 알린다.

    하지만 문제는 정상적인 권관이라면 적을 앞에 두고 도망하지도 않는다는 것이었다.

    “젠장.”

    천동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가뜩이나 마음 쓰이는데, 더 마음 쓰이게 됐다.

    “보냈겠지. 설마 치보도 안 보냈을까.”

    또 다른 대립군이 위안용인지 합리화인지 모를 말을 뇌까렸지만, 천동의 머릿속에는 치보라는 글자만 맴돌았다.

    “하, 시팔.”

    한참을 가던 천동은 발길을 멈춰세웠다.

    그가 멈추자, 뒤따르던 대립군들 모두가 자연스레 멈춰서게 됐다.

    “왜 그래요, 형님?”

    “너네들 고향 갈 거지?”

    “당연한 얘길··· 형님은 안 가시게?”

    “암만 생각해도 시팔, 김 권관 그 개새끼가 치보를 안 보냈을 것 같다.”

    “서, 설마요. 그 정도로 막 돼먹었으려고.”

    “시팔, 지난 6개월 동안 그 새끼 봐왔으면서 그래?”

    “···그럼 어쩌시려구요.”

    “여기서 제일 가까운 고을이······.”

    “이산군(理山郡)이요.”

    “군수한테는 알려야겠다. 김 권관 새끼가 치보 안 보냈으면, 군수 나리도 모를 것 아니더냐. 군수 나리가 모르면 병사 영감도 모를 테고, 병사 영감이 모르면 나랏님은 어찌 알겠느냐? 웃전들이 전부 모르고 있는데 죽는 거라면 이거야 말로 개죽음이 아니고 무엇이냐.”

    “저도 같이 갈게요.”

    “됐다. 혼자 가마.”

    “가다가 산적이라도 만나면 어쩌려고요?”

    천동은 결국 다른 대립군들은 모두 고향으로 향하도록 한 뒤, 매읍과 함께 이산군으로 향했다.

    하지만.

    “군수 나리께서는 이미 치보를 받고 떠나셨소.”

    불행중 다행인 일이었다.

    군사를 몰고 아이진으로 출동했다고 하니 말이다.

    마음의 짐을 덜고 고향으로 돌아가려던 천동은 문득 8년 전 일이 떠올랐다.

    당시 천동은 십수명이 넘는 동료들을 잃었다.

    그런데도 더 억울한 건, 그들이 나라를 위해 싸웠다는 치하 한 번 받지 못 했다는 사실이었다.

    이번에도 그러지 말라는 보장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이번에는 더 숨기려 들지도 몰랐다.

    권관은 도망가고, 대립군들이 성을 지켰다.

    다른 무관들이 보기엔 이만큼 창피한 일도 없었고, 일을 축소시키려 들지도 몰랐다.

    또, 그게 아니어도 진성에 있는 사람 모두가 씨몰살 당했더라면 본인들이 남아서 싸웠다는 걸 증명 할 수도 없었다.

    ‘그때 김 권관 개새끼가 나타나면······.’

    그는 목숨을 걸고 싸웠다고 거짓 증언을 할지도 몰랐다.

    아니, 그러고도 남을 새끼였다.

    그렇게 되면 성을 지킨 건 억수 형님과 다른 대립군이 아니라, 김 권관이라는 인간 말종이 성을 지킨 것으로 진실이 왜곡 될 터였다.

    ‘하, 시팔. 그러게 같이 튀자니까, 사람 피곤하게.’

    8년 전 일을 되풀이 할 순 없었다.

    그는 결국 고심 끝에 한양으로 발길을 돌렸다.

    ***

    “장이다.”

    히죽거리며 장을 외치는 융에 진성은 얕게 침음하며 고민에 빠졌다.

    이걸 어떻게 빠져나가야 하나······.

    ‘빠져나갈 곳이 없는데?’

    아무리 봐도 빠져나갈 구멍이 안 보였다.

    “장고 끝에 악수 나온다고 하였다. 어떻게, 이 형님이 한 수 알려주랴?”

    혹하지만 6연패였다.

    벌써 6번을 졌다는 말이다.

    한 수 가르침 받기에는 마지막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후··· 거의 다 이긴 건데. 졌습니다, 졌어요.”

    결국 진성은 패배를 인정했다.

    아주 깔끔하게 져버렸다.

    “하하하! 여기서 이 마(馬)를 이렇게 움직였어도 방어를 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쉽구나.”

    어라?

    진성은 눈을 동그랗게 치켜떴다.

    이런 수가 있었다니, 젠장할!

    “형님은 말도 잘 타시고 활도 잘 쏘시고 장기도 잘 두시고, 못 하는 게 뭐예요?”

    아부가 아니었다.

    이길 수 있는 게임이 거의 없었다.

    “하하! 내가 잘 하는 것이 아니라 너의 실력이 다소 미흡했던 것이다. 조금만 실력을 쌓는다면 능히 나로 하여금 장기판을 엎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임금의 권위를 상징하는 곤룡포를 입고 분에 못 이긴 듯 씩씩거리며 장기판을 엎어버리는 형님이라······.

    피식.

    그 모습이 절로 상상이 된 진성이 피식거렸다.

    “어떻게, 한 번 더 두겠느냐?”

    앞서 6번을 졌고 이번에 또 지면서 7연패를 달성(?)했다.

    해도, 해도 안 된다는 건 이미 경험으로 깨달았다.

    뭐, 장기에 목숨 거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시간 때우기 용이었으니 됐다.

    “곧 식사 때인데 저녁이나 드실래요?”

    “저녁? 좋지. 상선 밖에 있는······.”

    “아뇨, 형님. 궐에서 말구요. 오늘은 밖에서 드시게요.”

    “밖에서? 궐 밖에서 말이냐?”

    끄덕.

    “네.”

    “궐 밖이라면 너희집을 말함이렷다?”

    “아뇨. 형님 혹시 주막 가보신 적 있으십니까?”

    “주막?”

    “예.”

    “다점(찻집)이라면 가봤다만, 주막은 아니 가봤구나.”

    “그럼 탕반(국밥)도 못 드셔보셨겠네요?”

    “탕반?”

    “네. 팔팔 끓는 가마솥에 사골 국물 팍팍 우려가지고 뽀얀 국물··· 쓰릅. 탕반 드실래요?”

    “음. 한 번 먹어보자. 내 그럼 잠시 환복을 좀 하고 오······.”

    생소한 음식이 구미가 당겼는지, 융이 황급히 몸을 일으키는 그때였다.

    “전하. 도승지 김감이 알현을 청하옵나이다.”

    “도승지가 말이냐?”

    “예.”

    “크흠. 들라하라.”

    문차비가 문을 열기 무섭게 도승지 김감이 허둥지둥 달려 들어왔다.

    얼마나 뛰어왔으면 숨까지 헐떡거릴 지경이었다.

    “그러다 숨 넘어가겠소.”

    “저, 전하······.”

    “응?”

    “변경에서 치계가 도착했사온데······.”

    “변경 어디 말이오?”

    “아이진이옵니다.”

    “한데?”

    “오랑캐들이 군사를 일으켜 아이진을 침략했다고 하옵니다.”

    “뭐라? 소식을 전해온 자가 누구요?”

    “그, 그게···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국법을 어기고 아이진에서 대립하던 천동이란 자이옵니다.””

    “대관절 변장(변경의 장수)들은 뭘 했길래 국법을 어기고 대립질 하던 자가 치계를 온단 말이냐? 상선!”

    “예, 전하.”

    “속히 패초를 보내 육조당상들을 소집하라.”

    “그리하겠사옵니다.”

    “진성아.”

    “예, 형님.”

    “변경에 일이 생긴 모양이다. 저녁은 나중에 먹어야 할 듯 싶구나.”

    “할 수 없죠. 전 그럼 혜민서에나 가봐야겠습니다.”

    “그래, 그래. 미안하구나.”

    “나랏일인데, 뭘요.”

    ***

    편전.

    “네 이름이 천동이라 하였더냐?”

    나랏님의 질문에 바짝 부복한 천동은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예, 나랏··· 아니, 전하.”

    “오랑캐들이 아이진을 침략했다는 게 사실이냐?”

    “그렇사옵니다.”

    편전이 금세 시끌벅쩍해졌다.

    “내 듣기를 너는 광화문 수문군들에게 아이진의 진군으로 급히 아뢸 말이 있어 말을 달려 왔다고 했다던데, 아이진 권관이 보낸 것이냐?”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아이진 권관 김운열은 도망하였사옵니다.”

    “뭐라?”

    도망이라니······.

    아이진은 변경 중의 변경이었다.

    애당초 아이진에 부방하는 군사들은 모두 정예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자들이었고, 하물며 그들을 통솔할 권관은 더욱 정예로워야 하는 법이었다.

    조정에서도 엄선해서 보내는 게 아이진과 같은 변경의 권관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자가 도망을 했다?

    쉬이 믿기 힘든 게 사실이었다.

    “네놈이 감히 거짓으로 임금을 기만하려는 것이렷다?”

    “아, 아, 아니옵니다. 소, 소신이 어찌··· 하오나 참말로 권관 김운열은 전투 중에 도망하였사옵니다.”

    “네 눈으로 본 일이더냐?”

    “예.”

    “허. 하면 치계를 전하러 왔다는 말은 무엇이냐. 아이진 권관 김운열이 전투 중에 도망한 것이라면 누가 너를 치계로 보낸 것이냐?”

    도망하였다는 말을 함부로 할 순 없었다.

    “그, 그곳에 남은 대립군들이옵니다.”

    “대립군? 모두 도망하였다면서?”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대립군들은 남아서 성을 지키고 있었사옵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냐. 군관이란 작자는 도망하고, 국법을 어기고 대립 서는 대립군들은 남아서 성을 지키다니?”

    “그러니까······.”

    천동의 입에서 사건의 전말이 전해지자, 중신들은 경악을 금치 못 했다.

    진보를 책임지는 권관이 진을 버리고 도망한 일만도 군율로서 다스릴 일인데, 심지어는 진의 성보를 보수하는 일에 동원된 백성들이 있는 와중에 도망을 쳤다.

    이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차라리 상식의 범주를 뛰어 넘는 일에 가까웠다.

    “네이놈. 네놈이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고한단 말이냐. 속히 사실을 고하지 못 할까!”

    영의정 성준이 호통을 치자, 천동이 몸을 움찔거렸다.

    “소, 소인이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고하오리까. 사실이옵니다······.”

    “아니, 그래도 이놈이!”

    “영상은 그만하라.”

    “하오나 전하. 담이 약한 군관이 도망 할 수는 있다지만 백성을 버리고 도망한 군관은 듣지도, 보지도 못 했사옵니다. 하물며 변경의 권관은 엄히 선발해서 보내는데,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사옵니까?”

    “저자가 거짓을 고할 까닭도 없지 않은가.”

    “그, 그건 맞사오나······.”

    “저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평안 병사(병마절도사)가 곧 치계를 보내올 것이다. 그리고.”

    융은 천동을 응시했다.

    천동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조아렸다.

    “외침이 있다면 응당 이웃 진이나 고을에 달려가 도움을 구해야할진대, 너는 어찌 4주야(나흘)를 달려 한양에 온 것이냐?”

    융의 의문은 당연한 것이었다.

    상식적으로 외침이 있다면 이웃한 고을이나 진영에 구원을 요청하기 마련이었다. 대대적인 침략이라 어찌 할 수 없어 후퇴한다 할지라도, 일단 이웃한 곳에 치계는 보내기 마련이었다.

    동시다발적인 기습일지도 모르니까, 대비하라는 차원에서.

    “실은······.”

    우물거리는 천동을 보니 내막이 있을 거라 짐작이 됐다.

    “괜찮다. 말해보아라.”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천동은 두 눈 질끈 감고 8년 전에 있었던 일과, 이번에도 그런 일이 발생할까 두려워 직접 아뢰러 왔다는 말을 전했다.

    그 말을 듣고도 나랏님은 아무 표정 변화 없으셨다.

    그리고 그때.

    “전하, 평안도에서 치계가 당도했사옵니다.”

    “들라하라.”

    치계는 평안도 병마절도사 여윤철이 보내온 것이었다.

    공교롭게도 치계가 전한 전말은 천동이 말한 것과 흡사했다.

    하지만 모든 부분에서 똑같은 건 아니었다.

    “하여 권관 김운열이 마지막까지 분투하였으나 역부족인 관계로 병사를 이끌고 퇴각하여 직접 치보하였던 것이옵니다.”

    평안도에서 보내온 전말은 천동이 전해준 전말과는 다소 달랐다.

    마지막 까지 분투한 게 억수를 포함한 대립군이 아니라, 권관 김운열로 바뀌어있었다.

    천동이 우려한대로 말이다.

    “금부지사.”

    “예, 전하.”

    “요새 참 금부에서 할 일이 많소이다.”

    “···”

    “김운열을 추포해오시오.”

    “···분부 받들겠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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