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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59화 (59/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59화>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사람들

    ***

    평안도 아이진(阿耳鎭).

    아이진은 여진 오랑캐들이 자주 침입하는 삼적로(三賊路)중 하나였다.

    그만큼 여진 오랑캐들이 많이 침략하고, 피해도 많이 입은 진영이었다.

    이 아이진의 진군(진을 지키는 병사)으로 있는 억수는 주린 배를 움켜 잡았다.

    멀리서는, 그와 똑같은 진군이되 사정은 다른 진군 나리들께서 시시덕거리며 식사를 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대립질 하는 놈들 입은 입도 아니란 게지?”

    “그러게 말이올씨다, 형님. 내 대립질 12년에 밥도 차별해서 주는 권관은 또 처음이오. 이거, 원. 서러워서 때려치던가 해야지.”

    함께 대립질(다른 사람을 대신해 돈을 받고 군역을 지는 일종의 용병)하고 있는 천동의 말에 억수는 피식거렸다.

    “때려치면 밥 빌어먹을 순 있고?”

    “···없지.”

    천동의 말에 억수를 중심으로 한 대립 군사들이 낄낄거렸다.

    낄낄거리며 농을 주거니 받거니 하던 억수는 마침 생각난 게 있는 듯 고개를 돌렸다.

    그 옆에는 이제 지학(열다섯)을 갓 넘긴 걸로 보이는 앳된 소년 하나가 창 하나를 품에 꼭 안은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이놈아. 이놈 방덕아!”

    “쓰릅. 에? 부르셨어요?”

    단 잠을 자고 있었는지, 화들짝 놀라며 입가의 침을 훔치는 방덕에 군사들의 웃음보가 또 터졌다.

    “네놈은 어쩌다 대립질 서게 됐더냐?”

    “아, 저요? 저는 도련님 대신 서게 됐죠, 뭐.”

    “방덕이 네놈 종놈이었냐?”

    “네. 다른 아재들은 아니예요?”

    “그럼, 아니지. 우린 그래도 칼밥 먹고 사는 무인이지.”

    뭔가 으스대는 천동의 모양새에 억수는 쯧쯧 혀를 찼다.

    “무인은 지랄. 천하기는 우리가 더한데 으스대는 꼴이 우습지도 않느냐? 차라리 종놈 팔자면 세끼 제대로 챙겨 먹기나 하지, 우린 언제 칼맞고 뒈져도 모를 팔자 아니더냐?”

    “아니, 누가 뭐랬소··· 크흠.”

    “그래, 방덕이 넌 강원도에서 왔다고 했었나?”

    “네.”

    “강원도 어디?

    “정선이요.”

    “거긴 또 어느 고을이냐?”

    “첩첩산중에 있어서 모르실 거예요.”

    “크흠.”

    “대립질 하는 놈들 처지가 다 거기서 거긴데, 형님은 뭘 그리 꼬치꼬치 물으시오?”

    “어린 놈이 제 주인 대신 끌려온 게 안쓰러워 그런다, 왜?”

    억수는 방덕이 이 아이진에 부방(변경에 부임)왔을 때부터 영 마음이 쓰였었다.

    아닌 게 아니라 어지간하면 있는 집 자식들은 이 이아진에 부방하길 꺼려했다.

    뇌물을 갖다 바치면서 까지 부방을 막을 정도였는데, 이 이아진에 오는 사람들은 토병이거나 대립질 하는 놈들이거나, 없는 집 자식들 뿐이었다.

    이 작은 진보에서 해마다 수십명의 전사자가 발생할 정도로 사지 중의 사지로 꼽히기 때문이었다.

    이 아이진에 부방하면 열에 셋은 1년을 채 못 넘긴다.

    또 열에 둘은 탈영을 하고, 남은 건 다섯인데 여기서 또 둘은 권관 잘못 만난 죄로 굶주림에 허덕이다 칼 한 번 제대로 휘두르지 못 하고 동사하거나 아사한다.

    이제 남은 셋이 결국 정예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까지 살아남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대립질을 15년간 한 억수도 이 아이진에는 부방하길 꺼려할 정도였다.

    뭐, 그놈의 돈이 원수인지라 어쩔 수 없이 있는 집 자제분 대립을 서게 되긴 했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형님.”

    팔자는 다르다지만, 꼭 소싯적 자신의 모습이 생각나 방덕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억수가 고개를 돌렸다.

    “왜?”

    “이놈들 언제쯤 쳐들어올 것 같소?”

    “보통 가을이나 늦겨울 쯤에나 쳐들어오니까··· 곧 올때가 되긴 했구만.”

    “이 빌어먹을 놈들 수급 열 개만 가져가면 우리도 팔자 고칠 수 있을 텐데. 안 그러오?”

    “누가 서북놈을 써? 네놈 아직도 무과 생각하고 있느냐?”

    “무, 무과는 무슨··· 내 일찍이 무과 생각은 버린 지 오래요.”

    억수는 씁쓸하게 웃었다.

    이 아이진에서 최소 3년간 살아남은 사람들은 조선 최정예라 불려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런 사람들은 대개 병서에 나오는대로 일당백은 아니더라도 일당백의 기세를 내뿜을 정도였다.

    그와 10년 넘게 대립밥 먹은 천동이도 그중 하나였다.

    무과에 응시한다면 충분히 급제하고도 남을 정도의 실력이지만, 아니.

    무과는 어렵더라도 갑사 취재가 있다면 능히 상등(上等)의 갑사로 꼽힐 만한 실력자였다.

    하지만 그놈의 서토놈(서북지역 사람을 비하하는 말)이 문제였다.

    무과에 응시해도 서토놈이라 떨어뜨리고, 설령 급제를 해도 서토놈이라 차별해서 험지만 보내니 어느 세월에 진급을 하고, 어느 세월에 줄을 타겠는가?

    권관(하급 장교) 녹봉이야 빤한데, 평생을 권관으로 뺑뺑이 치다가는 자식놈들 줄줄이 아사할 판국인데 말이다.

    “정말로 오랑캐 놈들 수급 열 개만 가져가면 팔자 고칠 수 있어요?”

    가만히 듣고만 있던 방덕이 쭈볏거리며 물었다. 그러자 천동이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팔자를 고치다 뿐이냐. 종놈이면 면천도 시켜주고 땅도 줄 게다.”

    “허억.”

    “왜, 오랑캐 놈들 수급 열 개만 가져가고 팔자 고치게?”

    “가능할까요?”

    피식 웃은 천동이 방덕의 머리를 콕 쥐어박았다.

    “이놈아. 그게 가능하겠느냐? 팔자 고치겠답시고 설친 놈들 석달을 채 못 가서 다 뒈져버린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모두 무예가 출중해서 살아남은 것 같으냐?”

    천동의 말은 사실이었다.

    사실 일신의 무예는 실전으로 다져졌기 때문에 어지간한 갑사나 정병들 따위야 데리고 놀 수준이라지만, 그렇게 설치다간 금방 염라대왕에게 불려간다.

    억수 자신을 포함한 대립군들 모두 무예를 뽐내기보단 살아남는 법을 터득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대립군이 여진놈들 수급 떡하니 베어와서 권관 나리께 바치면 뭐, 권관 나리가. 아이고, 우리 대립군 나리들께서 훌륭하게도 오랑캐들 수급을 베어오셨군요! 내가 윗전에 보고 하겠습니다! 하겠느냐?”

    이 말도 사실이었다.

    사실 그래서 더 대립군들이 몸을 사리기도 했다.

    말이 여진놈들 수급 베어 팔자 고치는 일이지, 대부분은 권관이나 군관들이 공을 독차지한다.

    여진놈들 수급 열을 베어가면 셋은 권관과 군관에게 떨어지고, 일곱은 그 윗전들이 나눠 갖는 것이다.

    대립군들?

    쌀 몇 줌 쥐어주는 건 차라리 고맙기라도 하지, 대부분은 수고했다 인사치레가 전부였다.

    “···”

    금세 시무룩해진 방덕에 억수는 천동을 나무랐다.

    “괜히 애 기는 죽이고 그러느냐.”

    “사실이 그렇잖소, 사실이. 내가 시팔 8년 전 그 일만 생각하면··· 어휴. 복장이 터지지.”

    8년 전.

    억수와 천동은 우연찮게 큰 공을 세운 적이 있었다.

    그 동료 대립군 스무명과 여진 오랑캐들 수급 서른을 베어온 일이 그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넷.

    그마저도 한 명은 부상이 심해 금방 염라께 가버렸고, 그 공은 당시 권관에게 빼앗겼었다.

    “크흠. 방덕아.”

    “···네.”

    “천동 아재 말이 영 틀린 건 아니다. 괜히 팔자 고치겠답시고 설치는 게 오히려 명을 단축하는 것이니, 만약 전투가 벌어지면 피신부터 해라. 무슨 말인지 알겠지?”

    “알겠어요.”

    “응? 저놈들 왜 저래. 저희들끼리 밥쳐먹다가 사래라도 걸렸나.”

    8년 전 일 때문인지, 제 가슴을 두들겨대며 씩씩거리던 천동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천동의 행동에 억수와 다른 대립군들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벽에서 경계 대신 경치 감상을 하면서 밥을 쳐먹던 군관과 진군들이 사색에 질린 표정으로 컥컥거리고 있었다.

    풀썩!

    그러더니 중심을 잃고 성벽 아래로 떨어지는 게 아닌가.

    “음?”

    억수는 미간을 좁혔다.

    하늘이 시커매졌다.

    “저, 적이다!”

    파! 파팟!

    시커매진 하늘에서 화살비가 내리꽃혔다.

    댕! 댕! 대애앵!

    평온하던 아이진에 전운이 감돌았다.

    ***

    “시팔. 김 권관 개새끼! 거들먹거릴 때부터 알아봤어.”

    천동의 욕지거리에 억수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개전 반시진.

    고작 반시진임에도 시체가 한가득 쌓여 있었다.

    기세가 기울자, 언젠가부터 성루에 올라 고래고래 아군을 독려하던 김 권관과 그 측근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뻔했다.

    걸음아 나살려라 도망을 친 것이다.

    “형님. 우리도 몸을 빼야겠소. 여진놈들이 보통 작당하고 쳐들어온 게 아니오.”

    아이진의 진군은 140~50 남짓.

    그마저도 전투가 벌어진 지 반시진만에 오십에 가까운 사람이 죽거나 다쳐, 전투불능 상태에 빠졌다. 여기서 또 스물은 탈영을 했고, 남은 사람은 여든.

    반면 여진족은 못 해도 세 곱절은 많아보였다.

    “하지만 지금 빼면 일손 도우러 온 사람들이 많이 다칠 텐데······.”

    한탄 섞인 독백은 방덕의 것이었다.

    성벽을 보수한다고 인근 백성들을 부려 공사를 진행 중에 있었다.

    그건 오늘도 마찬가지.

    기백이 넘는 백성들이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미처 몸을 빼지 못 하고 성 안에 피신해 있었다.

    “시팔, 권관 새끼도 튀었는데 누가 누굴 걱정해?”

    “그렇긴 하지만······.”

    “형님! 저놈들 안 보이오? 저놈들도 지금 언제 몸 빼야 되나 재고 있지 않소.”

    지휘관들이 도망친 군영은 아무리 정예롭다 한들 오합지졸만 못 하다.

    진군과 토병들도 몸을 뺄 시간만 재고 있었다.

    “형님! 8년 전 처럼 개죽음 당하고 싶소?! 왜 이렇게 망설이는 거요!”

    이 아이진에 평상시처럼 진군들만 있었다면 천동의 말처럼 냉큼 몸을 뺐을 터였다.

    대립군이 진군들 대신 여진족들 막는다고 나라에서 그 공로를 치하해주진 않으니까.

    오히려 법을 어겼다고(대립은 불법임) 처벌받지 않으면 다행이니까.

    다만 하필 성벽 공사를 한답시고 찾아온 백성들이 눈에 밞혔다.

    자신들이야 어떻게든 포위를 뚫고 도망 갈 수야 있다지만, 일 손 도우러 온 백성들은 아니었다.

    아이진이 함락되면 오랑캐들의 포로로 끌려갈 터였다.

    “저 사람들 때문에 그런 거요, 설마?”

    천동이 백성들을 가리켰다.

    “···”

    “시팔, 8년 전에도 그러다가 병갑 아재랑 도영이랑 만수 영감이랑 석철이랑, 다 뒈졌잖아! 그땐 운이 좋아서 살아남은 거지만, 정말 뒈지고 싶은 거요?”

    “좀 기다려 봐라.”

    “뭘 고민하는데! 곧 함락된단 말이오!”

    진군들도 슬금슬금 도망을 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대립군들 밖에 남지 않을 터였다. 그리고 그 순간 성은 함락이었다.

    억수가 고민하는 그 짧은 시간에도 여진족들은 하나, 둘 성벽을 올라오고 있었다.

    “어쨌으면 좋겠소?”

    억수는 다른 대립군들에게 의견을 구했다.

    “억수 자네 생각은 어떤가?”

    대립군들 사이에서 소위 노친네라 불리는 검바우 영감이었다.

    “우리라도 시간을 벌면 사람들 피신 시킬 시간 정도야 벌 수 있지 않겠소?”

    “시팔, 육갑 떨고 자빠졌네!”

    천동의 욕지거리를 뒤로한 채 검바우가 말했다.

    “음. 어차피 나야 곧 뒈질 나이니 남는다 한들 상관은 없네만, 자네들이 걱정일세.”

    “남을 사람들 있소?”

    억수가 묻자 모두가 시선을 회피했다.

    일부만 응할 뿐이었다.

    “아니, 형님. 진짜 왜 그러오? 진짜로 남으려고 그러오? 형님 처자식 생각도 해야지!”

    모르겠다.

    처자식이 있기 때문에 더 몸을 빼기가 어려웠다.

    저 사람들도 다 처자식이 있는 몸일 텐데.

    “천동이 너가 저 사람들 인솔해서 빠져나갈 수 있지? 산길은 너가 산군(호랑이)보다 빠삭하잖느냐.”

    “나 혼자 몸을 내빼도 모자를 판국에 주렁주렁 혹을 달고 어떻게 빠져나가오? 그러지 말고 우리끼리 빠져 나가자니까!”

    “그럼 저 사람들은! 저 사람들 죄다 오랑캐들한테 끌려가는 거 몰라 물어?”

    “누가 모른데? 어차피 남이잖아, 남!”

    “너 이새끼 동수가 끌려가도 그런 말 할 것이냐?”

    동수는 천동의 장남이었다.

    어린 시절 오랑캐들의 침입에 끌려갔다는 말만 있지, 그 뒤로는 생사조차 알지 못 했다.

    “시팔, 진짜······.”

    “빠지려면 빠져. 다른 사람도 빠질 사람은 빠지오.”

    추리고 추리니, 남겠다는 사람은 열 세사람 뿐이었다.

    “방덕이 넌 왜 안빠지느냐?”

    “도망가면 뭐해요. 대립 서다가 도망왔다고 매질이나 당할 텐데.”

    “으음. 천동아.”

    “···”

    "천동아!"

    "아, 왜!"

    “천동이 네가 저 사람들 잘 데리고 나가.”

    천동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터덜터덜 사람들이 피신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피신할 준비가 다 끝나자 천동이 억수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형님!”

    “왜?”

    “살아서 볼 수 있소?”

    “모르지.”

    “살아서 봅시다, 살아서.”

    살아서 만나자는 말을 기약 할 수 없었다.

    “얼른 나가기나 해!”

    말을 돌린 억수는 천동과 다른 대립군들이 백성들을 데리고 동문으로 움직이자, 환도와 방패 하나를 집어 들고 성벽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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