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군으로 살어리랏다 58화>
광산도감을 설치하다
***
사흘 뒤, 평온한 오후.
적당히 내리쬐는 햇볕.
적당히 불어오는 바람.
늘어지게 낮 잠을 때려도 될 법한 조건을 가진 날씨에 내 집에선 명랑하게 동화책 읽는 소리가 한가득 울려퍼지고 있었다.
“그렇게 백설공주는 해복하게······.”
우물쭈물거리는 개똥이에게 가볍게 딱밤을 날렸다.
“아얏.”
“행복하게.”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내 눈치를 살피면서 자신없이 되묻는 개똥에 나는 피식거렸다.
귀여운 자식.
“오늘 수업 끝.”
“마마. 이거 꼭 배워야 되요?”
“넌 꼭 배워야 돼.”
개똥이는 지난 사흘간 내 집을 들락날락거렸다.
안 그래도 산만하던 녀석이 사흘 전에 또 보니 산만해도 보통 산만한 게 아니었다.
아직 어린 나이니 말을 조리 있게 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지만, 횡설수설 하는 것도 그렇고 금방 주제에서 벗어나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도 그렇고, 이런 건 집중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었다.
개똥이가 소작농의 아들이라지만 첫 만남 이후부터 괜히 마음이 쓰이는지라 그 날 이후 한글을 가르쳤다.
아, 훈민정음이 아니라 개화기의 국어학자 주시경 박사가 새로 정립한 그 한글 맞다.
굳이 시대에 맞는 언문(한글)이 아니라 내가 아는 한글을 가르친 건 뭐, 거창한 뜻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고 글을 가르치겠다는 말에 팔석 씨가 이놈은 어차피 농사지어야 할 팔자라, 글을 알면 오히려 팔자가 꼬인다고 난리법석(?)을 피웠기 때문이었다.
사실 언문 정도야 노비들도 알고 있는 글이니 그거 안다고 팔자가 꼬이진 않겠지만 팔석 씨가 그렇다니 팔석 씨 걱정을 좀 덜어줄 겸 주시경의 한글을 가르치게 된 것이었다.
뭐, 나도 그게 더 편하고.
그런데 글쎄, 이놈이 도통 집중을 못 하지 뭔가.
그래, 역시 집중력 기르는 데에는 독서만한 게 없지.
골몰하다가 생각해낸 게 바로 동화책이었다.
덕분에 난 팔자에도 없는 동화 작가가 되었지만.
“벌써 점심 때네.”
“어, 벌써 정오예요? 저 가볼게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개똥이가 꾸벅 인사를 올리더니 후다닥 마루를 내려간다.
이 시대 사람들에게 점심이란 개념은 없지만, 농부들에게 새참이란 개념으로는 존재했다. 그리고 개똥이 같은 농부의 자식들은 새참 이후가 한참 바쁠 때다.
일손을 거들어야 하거든.
“뭘 벌써 가? 밥 먹고 가.”
“어제랑 그제도 신세졌는 걸요. 지금 아부지 혼자서 일하고 계실 텐데, 가서 일 도와야 되요.”
“쥐방울만한 게 아버지 걱정은 효자 정문 세워도 되겠네.”
“헤헤. 저 그럼 가볼게요!”
“그래, 조심히 가고 내일 또 보자.”
“네!”
개똥이를 보내고 점심을 먹었다.
점심으로는 쌀밥에 곽탕(미역국), 백김치, 어머니 손맛으로 박박 주무른 산나물, 2% 부족한 가지선, 메밀묵, 동치미, 간장 등이었다.
“꺼억! 잘 먹었다.”
거하게 트림을 하고 소반을 밖에 내놨다.
잠시 후, 달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나는 방문을 열었다.
“전금아, 잘 먹었다고 부뚜막에 전해 줘.”
“네.”
전금이 소반을 들고 돌아가자 서안(책상) 다리를 폈다.
오전에 장곤 선생님과 공부한 걸 복습하기 위해서였다.
“자성명(自誠明)을 위지성(謂之性)이요, 자명성(自明誠)을 위지교(謂之教)니··· 성(誠)으로 말미암아 선에 밝은 것을 본성이라 하고 선을 밝힘으로 말미암아··· 결국 진실하면 이치에 밝고 이치에 밝으면 진실해진다.”
반시진 후.
확실히 집중력이 예사롭지가 않다.
옛날 같았으면 진작 몸을 풀러 가거나 담배 태우러 나갔을 텐데······.
‘뭐, 여긴 담배도 없지만.’
대군으로 살면서 또 한 가지 좋은 점은 백해무익한 담배를 저절로(?) 끊게 됐다는 점이었다.
니코틴에 중독이 안 된 몸이라 그런지 습관적으로 가끔 붓이나 가는 도구 같은 것들을 입에 물 때는 있었지만, 담배 생각이 간절하지는 않았다.
“으차차차!”
찌부등한 몸을 풀고 옷을 갈아 입었다.
책상 앞에 앉아 있는다면 한참을 더 앉아 있을 수도 있지만, 종두도감으로 출근해야 했다.
사실 의학적 지식이 전혀 없어서 간다고 한들 도움 될 건 없지만, 의원들이 이것저것 물어보는 게 많고 실질적인 지휘는 내가 하니, 가서 한 번 쓱- 둘러보는 게 내 일과중 하나가 되었다.
“너 전금이랑 진도 어디까지 나갔냐?”
“아직 아무것도······.”
“그래서 사내 구실 하겠냐? 에라이, 답답아.”
덕산이를 골려 먹으면서 가니 금방 종두도감이 설치된 혜민서였다.
***
편전.
“···김순손(金舜孫), 조지서, 이심원(李深源), 변형량(卞亨良), 이수공(李守恭), 곽종번(郭宗蕃), 박한주(朴漢柱), 강백진(康伯珍), 심순문(沈順門), 성중엄(成重淹), 박소영(朴紹榮), 이자화(李自華), 김언평(金彦平), 강형(姜泂) 등 이하 19인은 금부에서 논의한 결과, 죄가 비교적 가볍다고 사료가 되었사옵니다. 전하께서 윤허하시면 속을 바치도록 할까 하옵니다.”
금부지사 노공필의 말에 융은 뭔가 마음에 들지 않은 듯 거드럭거렸다.
눈치백단 노공필이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호명한 19인 중에서 혹 제외할 인사들이 있사온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조지서와 성중엄, 심순문이 저 명단에 끼어 있는 것은 실로 기이한 일이다. 사사로운 처결인가?”
사사로운 처결이라니··· 함께 연루되면 멸문지화를 면치 못 한다.
화들짝 놀란 노공필이 기겁하며 부정했다.
“그, 그럴 리가 있겠사옵니까. 금부에서 위로는 당상들부터 아래로는 나장들까지 함께 의견을 나눈 결과이옵니다. 사적인 감정은 추호도 없나이다.”
“하면 심순문을 속바치는 명단에 넣자고 주장한 사람은 누구였는가?”
“···”
“누구였는가!”
“···나장 최덕구였사옵니다.”
“하! 일개 나장의 말을 듣고 금부 당상들은 심순문의 이름을 속바치는 명단에 넣었단 말이냐?”
“···”
“심순문의 조부가 누구냐? 간적 심회다. 심회에게 참시형이 떨어졌고, 이번에 심순문은 마찬가지로 간적으로 끌려온 셈인데 한 집안에 역적이 둘 나는 경우는 있어도, 간적이 둘 나는 경우를 보았더냐? 그 어려운 일을 심 씨 일가가 해내었는데 어찌 속바쳐서 죄를 면케 하자고 할 수 있단 말이더냐?”
“···”
“나장 최덕구는 장100대를 나눠서 쳐서 죄를 뉘이치게 하라.”
“그리 하겠사옵니다.”
“그리고 조지서?”
“···”
“그자는 누가 거론하였느냐?”
“그것이······.”
노공필이 우물거리며 제때 답을 못 하자 융은 역성을 냈다.
조지서는 그에게 원수 같은 존재였다.
“누가 거론하였느냐 말이다!”
“시, 신이었사옵니다.”
누군가 살펴보니 판부사(判府事) 구수영이었다.
구수영이 자진하자, 융은 조금 누그러진 표정으로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구수영은 그의 사돈이었다.
“판부사는 어찌 조지서를 거론하였소?”
“전하께서 세자시절 사부였던 의리가 있고, 또······.”
쾅!
“사부의 의리? 사부의 의리가 군신 간의 의리보다 더 중하단 말이오!”
“소, 송구하옵니다.”
“조지서는 빼시오. 또한 성중엄도 제외토록 하시오. 이 셋은 필히 길일을 점쳐서 참형에 처할 것이외다.”
“분부 받들겠사옵니다.”
“하오면 속은 얼마나 바치도록 하는 것이 좋을는지······.”
노공필의 말에 융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실 속전을 바쳐서 죄를 면케 해주겠다는 말은 했어도 구체적으로 얼마나 바치게 할 지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목숨값이나 다름이 없으니 조금만 내게 할 수도 없었다. 그랬다간 나중에도 속전을 바치면 된다는 풍조가 생길 우려가 있었다.
“음. 초가로 5칸 이상의 자택을 제외한 집은 모조리 속바치게 하고, 또한 자급자족하는 데에는 1결이면 족할 테니, 필요 이상의 전답을 갖고 있는 자들은 모조리 속으로 바치도록 하는 게 좋겠다.”
“그리 지시하겠사옵니다.”
“그리고 영상.”
“예, 전하.”
“지금 광산을 개발할까 하는데 영상의 뜻은 어떠하오?”
뜬금포라는 말이 있다.
편전에 있는 중신들이 21세기의 신조어인 뜬금포라는 말을 이해 할 리 만무했지만, 뜻을 해석해준다면 금방이라도 본인들이 느끼고 있는 이 감정이 뜬금포라 말할 정도로, 임금의 말은 뜬금없었다.
방금 전까지 논하던 사안은 죄인들의 속바치는 금액에 관한 건 아니었던가.
그런데 갑자기 광산이라니······.
“어, 어인 영문이신지······.”
질문을 받은 성준이 임금의 의중을 떠보기 위해 조심스레 말했다.
“광산 말이오, 광산.”
“광산이라 하오시면 역시 철광을 이르시는 것인지요?”
“광산이 철광만 있소이까. 금광과 은광을 말함이오.”
“대개 금광과 은광은 한 번 제대로 채굴을 한다면 어떤 비용을 들인다 한들, 그 비용을 만회 할 이문을 남길 수 있지만, 제대로 채굴 되는 곳이 열 곳 중 한 두곳에 불과한지라 혹 시굴(試掘)하는 비용이 더 들어 갈 수도 있는 일이옵니다.”
“누가 그걸 몰라 말하오? 자고로 우리 나라 팔도에는 금과 은이 생산되지 않는 곳이 없소. 그런데 해가 갈수록 국용(國用, 나라의 예산)은 줄어드니 지금이라도 광맥을 찾아서 국용에 쓰임이 있도록 해야지 않겠소이까?”
“온당하신 말씀이긴 하오나··· 그게, 너무 갑작스러운지라······.”
아닌 게 아니라 정말 갑작스러웠다.
보통 광산에 대한 시굴령은 갑자기 광산이 발굴 됐다는 말이 올라오거나 혹은 광맥을 찾았다는 증언이 나왔을 때 뿐이다.
한데 지금은 그런 말이 일절 올라온 적이 없었다.
“영상은 광산 개발을 반대하신다?”
“그, 그럴 리가 있겠사옵니까. 나라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어찌 신이 마다하겠사옵니까.”
“우리나라의 광산은 대개 공조에서 관할하고 있던가?”
누군가를 특정 하고 하는 질문은 아니었다.
광산을 공조에서 관할한다는 걸 임금이 모를 리는 없으니까.
다만 그의 시선은 공조판서 정미수에 닿아 있었다.
“그렇사옵니다, 전하.”
“내 저번에 김감불의 시연을 보고 단천의 은광을 개발하라 명한 적이 있소이다. 그래, 당시 납철로 은을 불리면 얼마나 나오더이까?”
“단천의 납철에서는 2근에서 은 4돈이 나왔사옵고, 영흥의 납철에서는 2근에서 2돈이 나왔사옵니다.”
“음. 기존보다 많게는 3배에서 적게는 2배라.”
“아직 숙련되지 않았는데도 이 정도니, 숙련이 된다면 그 양은 더 커질 것이옵나이다.”
“그래, 영상은 반대한다 치고, 이렇게 납철을 은으로 불리는 기술이 있는데도 광산을 마다할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 공판은 어찌 생각하시오?”
정미수가 당혹스러움을 한껏 머금은 채 영의정 성준을 흘깃거렸다.
“여, 영상의 말씀도 아주 틀린 것은 아니옵니다. 실제로 광맥을 찾는 일은 국가적인 일일뿐더러 그 부담은 오로지 백성들이 떠안게 되는데다, 자칫 대국에서 이 사실을 안다면······.”
“나는 그 폐해를 물은 것이 아니외다. 공판의 견해를 물은 것이오.”
“아··· 무, 물론 좋은 기술을 사장 시킬 필요는 없사옵니다. 역시 광맥을 효과적으로 찾을 수 있다면 광산 개발을 마다할 필요도 없겠사옵니다.”
“찬동한단 말을 장황하게도 하시오.”
“···송구하옵니다.”
“혹 이견이 있는 분들 있소?”
“없사옵니다.”
“성상의 분부가 참으로 지당하신데 이견이 어찌 있겠나이까.”
“그럼, 도감을 따로 설치해서 광산 개발에 박차를 가하도록 하겠소이다. 도감의 도제조는 공판께서 맡도록 하고 실무 책임자는······.”
말을 흐리는 임금에 중신들은 침을 꼴깍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