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군으로 살어리랏다-57화 (57/365)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57화>

지대는 3할씩만 내세요

***

“어어!”

현란한 드리블.

“후훅.”

두 개의 산소탱크를 가진 듯한 체력.

파팟.

수비수를 단번에 제치는 발재간.

“헉! 헉! 자, 잠시만요! 잠시만요, 전하!”

그건 진성이 아니라 융이었다.

축구라면 이길 수 있을 줄 알았던 진성은 후회가 막심했다.

동네 축구로나마 단련된 자신의 축구 실력으로는 감히 비길 수 조차 없는 재능이었다.

정말 축구를 처음하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페어플레이(?)를 하자던 당초의 약속과는 다르게, 진성은 얍실하게 융을 불러세우고,

“왜 그러느냐?”

고개를 돌리는 융의 공을 빼앗아 상대편 골대로 달려나갔다.

“하핫!”

“아니, 진성이 이놈아! 그건 기군망상이다, 기군망상!”

“아니죠, 형님! 저는 멈추시라고는 안 했걸랑요! 헉! 헉!”

임금을 기만해(?) 공을 뺏은 진성은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뛰었다.

“어어!”

수비수로 있던 임숭재가 당황하며 붙었지만 역부족이었다.

가볍게 수비수 두 명을 제치자 골키퍼 역할을 맡은 금군이 자세를 낮추며 그를 기다렸다.

골키퍼와의 1:1찬스.

스코어는 2:2였다. 이 1:1찬스를 살리지 못 한다면 체력적인 한계에 부딪혀 질 게 뻔했다.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슈웃!”

공을 거세게 걷어찰 것처럼 발을 빼던 진성이 한차례 기합을 넣자, 우물쭈물하던 골키퍼가 공이 올 것으로 예상되는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하지만.

페이크였다.

진성은 골키퍼가 몸을 날리자마자 공을 낮게 깔아찼다.

데굴데굴 굴러가던 공이 골망을 흔들었다.

“호우! 호우!”

인류 역사상 최초의 호우 세레머니를 하자 곁으로 융이 다가왔다.

온몸이 땀범벅인 그는 상선이 건네는 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형님. 이제 3:2입니다?”

반칙(?)을 범하고도 너무 당돌하게 말하는 진성에 융은 피식 웃었다.

“알았다. 하지만 내 다음 판은 절대 봐주지 않을 심산이니라.”

경기가 재개되었다.

공을 받자마자 융은 전력 질주를 했다.

사부님도 부르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진성의 말에 궐에 불려와 난생 처음 해보는 축구의 수비수로 서게 된 이장곤은 임금이 철릭깃 흩날리며 돌진해오자 멈칫거렸다.

“선생님! 막아야 되요!”

순식간에 제쳐진(?) 진성이 헐레벌떡 융을 따라가며 장곤에게 소리쳤다.

그에 장곤의 표정은 금세 울상이 되었다.

진퇴양난이 따로 없었다.

‘임금을 어찌······.’

그대로 비켜주자니 사부로서 면이 서지 않았고, 또 안 비켜주자니 군신간의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임금의 거둥과는 의미가 다르지만, 감히 임금의 앞길을 막는다니··· 하물며 임금의 용안을 똑바로 쳐다봐도 무례로 여겨지는 시대적인 상식상.

그리고 장곤이 가진 상식상.

그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선생님, 그거 안 막으면 저 내일 부터 공부 안 합니다!”

제자의 외침.

스승으로서 제자가 공부에 손 놓게 할 순 없었다.

‘모르겠다.’

장곤은 두 눈을 질끈 감고 융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그러자 갑작스레 나타난 장곤에 의해 중심을 잃은 융이 휘청거리더니, 장곤의 발과 엉켜 우당탕 바닥을 나뒹굴었다.

깔끔한 그의 철릭이 금방 흙투성이가 되었다.

“저, 전하!”

화들짝 놀란 상선을 필두로 내관들이 우르르 융에게 다가갔다.

그건 시합에 임하고 있는 모두가 똑같았다.

장곤은 아찔한 마음과 함께 가장 먼저 달려가 부복했다.

“으.”

“괘, 괜찮으시옵니까, 전하? 자, 잠시 보겠사옵니다.”

상선이 융의 철릭 소매를 살짝 들어올렸다.

그러더니 기겁을 하면서,

“어서 어의를 불러라!”

호들갑을 떠는 상선에 융은 들춰진 소매를 바라보았다.

팔꿈치가 까져있었다.

쓰라린 통증도 느껴졌다.

“하하.”

까진 팔꿈치를 멍하니 내려다 보며 피식거리던 융은 이내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푸하하하!”

통증.

얼마만에 느껴보는 통증인지 모른다.

고뿔 같은 건 사실 통증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니, 이렇게 타박상을 입은 건 십수년만의 일일지도 몰랐다.

“저, 전하. 송구하옵니다······.”

그의 파안대소에 이장곤이 덥썩 부복했다.

그런 장곤을 보고 상선이 나무랐다.

“왕자사부께서는 어찌 경기를 그리 과격하게 하신단 말이오? 전하께서 오시면 응당 피하셨어야지!”

“송구합니다, 상선 영감. 소인도 경황이 없어······.”

“나는 괜찮다. 상선도 그만하라.

“하오나 팔꿈치에 생채기가 생겼사옵니다. 이것이 어디 보통 일이옵니까?”

융은 팔꿈치에 난 상처를 흘겼다.

“조선 팔도 백성들이라면 모두 생채기 하나 쯤은 갖고 있지 않던가.”

“···”

“형님, 괜찮으세요?”

“이거, 이러다가 사람 잡겠다. 하하.”

“어디 좀 봐요. 까졌네? 후시··· 아니, 그건 없을 테고.”

“여염집에서는 이럴 때 된장을 바른다고 했던가? 상선.”

“예, 전하.”

“다른 약은 됐으니 된장이나 좀 가져와보라.”

“그, 그리 하겠사옵니다.”

상선이 헐레벌떡 뛰어가자 진성이 궁시렁거렸다.

“된장 바르면 덧날 수도 있는데······.”

“덧나면 어떠냐. 아!”

주저 앉아있던 융이 체신머리 없이 대(大)자로 벌러덩 드러누웠다.

감히 임금이 바닥에 드러누운 모습을 눈에 담는 것 조차 불충이라 생각했는지, 임숭재와 이장곤 같은 신하들은 모두 당혹스러움을 감주치 못 한 채 애써 눈길을 돌렸다.

“하, 힘들다.”

눈길을 돌리지 않은 건 진성 뿐이었다.

그는 융의 옆에 나란히 대 자로 누워 뻗었다.

피식거린 융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저녁놀이 석양에 타고 있었다.

“이 축구라는 놀음도 아주 즐겁구나.”

유희가 별 거던가.

행복감을 느끼면 그게 유희였다.

그리고 이 축구라는 놀음은 최소한 융에게 만큼은 사냥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재미를 선사해주었다.

“그렇죠?“

융은 고개를 까닥거렸다.

놀음으로서도 탁월했지만 군사들에게 활쏘기나 말타기처럼 장려할 만한 것 같았다.

재미와 훈련 두 마리 토끼를 한 번에 잡을 수 있으니 일석이조가 따로 없었다.

“그러고 보니 내기에선 이 형님이 졌구나.”

“아까 제가 형님 안 불러세웠으면 형님도 골 넣으셨을 걸요. 그거 감안하면 동점이예요, 동점.”

“핫. 딴에는 그렇구나. 아, 한데 골이란 건 무슨 의미냐? 저 골대라는 것이 뼈처럼 생겨서 뼈 골(骨)자를 써서, 골이냐, 아니면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이냐?”

흠칫.

“아··· 역시 형님이시네요. 뼈처럼 생겨서 뼈 골자의 골입니다.”

“음.”

“근데 언제 해보셨어요?”

“축구 말이냐? 아니, 처음이다.”

“처음하는 거 치고 잘하시던데요.”

기분이 좋았다.

“하핫. 고맙구나. 좌우지간 내기는 내기이니, 네게 민택의 적몰한 땅을 선물로 주마.”

“예? 정말 주시게요? 한 두 결 하는 것도 아닌 것 같던데··· 전 괜찮습니다.”

“남아일언중천금이라 하였다. 하물며 임금이 한 번 내뱉은 말을 어길 수 있으랴?”

“그래도 너무 많은데······.”

진성이 부담스러워 하는 것 같았다.

부담을 덜어줄 필요가 있어보인다.

“너무 많다 싶으면 그 보답으로 시 한 수 지어보거라. 하면 서로 정당하지 않느냐? 나는 네게 땅을 선물하고, 너는 시를 선물하는 것이니 혹자들은 평생 갈 것이 땅이라 생각하지만, 시는 문자가 만들어진 이래로 후세에 영원토록 전래되니 오히려 내가 더 이득인 셈이다.”

“흠. 그럼 시 한 수 지어 올려보겠습니다. 아, 주제는 딱히 없어도 되죠?”

“네가 지금 생각나는대로 읊으면 된다.”

융은 시를 음미하기 위해 지그시 눈을 감았다.

곧이어 진성의 재잘거림이 들려온다.

“제목은 꽃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중략.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은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또 없느냐?”

“음. 그럼 이번엔 풀꽃이라는 시입니다.”

“풀꽃.”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짧지만 강렬하구나. 또 없느냐?”

“또요?!”

“네가 말하지 않았느냐. 민택의 땅이 한 두 결 하는 것도 아니라고. 적어도 세 수는 지어야지.”

“이거 제가 밑지는 장사 같은데······.”

“하하. 네 시 낭독하는 목소리도 그렇고, 시도 그렇고, 듣기 좋아 그런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했다.

남의 시를 빌려다 쓰는 죄책감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어깨가 으쓱해진 진성이 시를 낭독해나갔다.

아버지가 노란 봉투에 시골닭 한 마리 들고 오시면

닭다리 하나는 아버지에게

또 하나는 큰 형에게

가슴살은 나에게

나는 어머니가 닭 모가지를 좋아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이불을 목끝까지 끌어 올려도 귀가 시리고

손은 꽁꽁 어는 찬바람 부는 한겨울에

아랫목은 아버지에게

그 옆자리는 나와 형에게

어머니는 왜 아랫목에 눕지 않으셨나요

나는 어머니가 윗목을 좋아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늘 배고팠던 시절에, 시대의 4월에

해질녘 굴뚝에서 올라오는 연기들

밥상에서 올라오는 뜨뜻한 연기들

나는 어머니가 찬 밥만 좋아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늘 좋아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늘 그런 줄 알았습니다

“···”

“형님?”

“···이 또한 좋은 시구나.”

“우시는 거 아니죠?”

“울긴 무슨. 흙바닥에 누워있다 보니 눈에 먼지가 들어갔을 뿐이다.”

눈에 먼지가 들어갔다던 융은 한참을 흙바닥에 누워있었다.

석양이 지고, 사위가 어둠에 물들 동안.

그렇게 한참을 흙바닥에 누워있었다.

‘어머니란 주제는 좀 슬펐나.’

그런 융을 보고 진성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

이틀 뒤.

“와우.”

나는 자연스럽게 감탄을 터뜨렸다.

저 너른 벌판을 보고 있노라면 감탄을 삭일래야 삭일 수가 없다.

‘역시 참 통크셔.’

내기에서 진(?) 형님은 거듭 됐다는 말에도 불구하고 적몰된 민택의 재산을 나에게 선물해주셨다.

땅문서를 직접 받아 볼 땐 실감이 안 났는데, 막상 동대문에 나와서 보니 크긴 엄청 크다.

‘이게 다 몇 평이야.’

저기서부터 저기까지.

팔을 한껏 벌려도 담을 수가 없을 만큼 너른 벌판이었다.

이 정도면 모르긴 몰라도 21세기의 답십리 1개 동 크기가 아닐까 싶었다.

“대군마마!”

합죽선을 살랑거리면서 새삼 내 땅이 된 논밭을 헤헤거리면서 바라보고 있노라니, 웬 꼬마가 멀리서 휘적휘적 뛰어오며 날 찾는다.

거리가 가까워지니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이게 누구야?”

난 반색하며 말했다.

날 부른 꼬마는 다름 아닌 개똥이였다.

“너 어떻게 알고 왔냐?”

“마을에 마마께서 새로 땅주인 됐다는 소문이 파다해서, 동무들하고 동구에서 놀고 있었거든요. 근데 개복이라는 동무가··· 아, 개복이는요. 저기 윗마을에 사는데요······.”

횡설수설하는 건 여전하구나.

“개똥아. 너 책 좀 읽어야겠다.”

“예? 책이요? 아, 책이라고 하니까 말인데요. 석평이 형이요. 저번에 천자문 가르쳐준다고 했었는데 제가 마다했었거든요. 제가 왜 마다했냐면요······.”

개똥이의 횡설수설을 듣고 있으니, 또 다른 사람이 다가와 넙죽 고개를 조아린다.

개똥의 아비 팔석이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본 게 거의 20일 전 쯤 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때 하도 맞아서 앓아 누웠다고, 직접 의원도 불러다 줬었는데 지금 보니 다행히도 상처는 다 아문 것 같았다.

“오, 팔석 씨. 몸은 좀 괜찮아요?”

“예. 대감 덕분에 지금은 팔팔합니다요. 그때 쇤네가 경황이 없어 감사 인사도 못 했습니다요. 절 받으십시오.”

라고 말한 팔석이 넙죽 절을 올렸다.

“아이고, 절은 무슨··· 아니, 됐다니까 그러시네.”

한사코 마다해도 팔석의 뜻을 굽히진 못 했다.

팔석이 절을 올릴 동안 나는 어정쩡한 자세로 절을 받았다.

“곧 가을이옵니다.”

몸을 일으킨 팔석이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제 곧 가을이다.

바로 엊그제가 푹푹 찌는 여름이었던 것 같은데, 날도 좀 풀렸다.

이 합죽선도 사실 습관적으로 들고 다니는 거지, 날이 많이 풀려서 필요도 없다.

“그러네요. 시간 참 빨라요?”

“예. 해서 말이온데······.”

“음?”

“수확철에 지대는 어찌 내면 될는지요?”

“지대? 아아. 지대.”

잊고 있었다.

팔석이나 금석리에 사는 사람들이나.

민택의 땅을 소작 부쳐 먹고 살던 사람들이라는 걸.

그 땅에 대한 권리가 고스란히 나한테 양도(?)가 됐으니 지대에 대한 권리도 나한테 있는 것이다.

“지대라.”

사실 민택의 땅만 생각했지, 지대 같은 부가적인 수입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저번 땅주인에게 내던대로 6할 내면 될는지요?”

조심스레 묻는 팔석에 나는 깜짝 놀랐다.

“6할이나 냈다구요? 그렇게나 많이?”

“토, 통상 소작이라 함은 그 정도 내고들 있습죠.”

“팔석 씨 뿐만이 아니라 이 마을 소작들 전부?”

“예.”

6할 내면 4할을 소작농들이 가져간다는 것이다.

“그거 내면 진짜 보릿고개 안 겪을래야 안 겪을 수가 없겠네. 4할만 내요.”

“예?! 4, 4할 말입니까요?”

“아, 4할도 많네. 3할만 내세요. 다른 사람들한테도 말해주시고.”

“그, 그럼 저희야 감사한 일이온데 괜찮으실는지······.”

“세상 더불어 사는 건데, 괜찮고 안 괜찮고가 어딨습니까.”

“하면 수, 수확기에 마을 사람들하고 3할씩 갖다 바치겠습니다요. 감사합니다요.”

나는 연신 굽신거리는 팔석 씨를 뒤로하고 개똥이를 말에 함께 태운 채 땅을 더 둘러보았다.

무슨 땅이 그리 큰 지, 다 둘러보는데 무려 세시진이 꼬박 걸릴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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