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군으로 살어리랏다-55화 (55/365)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55화>

백성을 사랑하는 임금의 마음

***

편전의 분위기는 엄숙했다.

아흔 여덟명.

무려 아흔 여덟명이 지난 나흘 사이 친국으로 숙청이 됐다.

죄목은 국모를 폐한 혐의와 언관으로 재직하면서 선왕에게 직언을 게을리 했다는 혐의, 마지막으로는 언관으로 재직하면서 금상에게 겁박을 자주 했다는 혐의였다.

아흔 여덟명이 금부의 남간과 서간에 갇혀 신음하는 소리가 귀곡성처럼 궁궐 안까지 들려오니, 편전의 분위기는 엄숙하다 못 해 살이 떨릴 지경이었다.

“의정부에서는 어찌 논의가 되었소?”

밑도끝도 없는 질문.

그 밑도끝도 없는 질문을 마른 침 꼴깍 거리며 받은 사람은 영의정 성준이었다.

“회묘(폐비 윤씨)께서 생전에 벌을 받은 일은 종묘사직(왕실과 나라)에 죄를 지어 받은 것이 아니니, 모두 전하의 망극하고 원통하신 심정을 헤아리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이 나왔나이다.”

“그래?”

“예.”

“하면 시호도 올려야겠는데.”

성준이 희미하게 미소 짓고 있는 사홍을 흘기며 말했다.

“예조에 일임케 하는 것이 어떻겠나이까?”

“그럼 그 일은 예조에서 맡도록 하고. 회묘는 어찌 추숭(追崇)하는 게 좋겠소?”

융의 질문에 임사홍이 한 발 자국 앞으로 나왔다.

“신 예조판서 임사홍 아뢰옵나이다.”

“말하라.”

“신은 학문이 짧지만 《춘추전(春秋傳)》에 이르기를, ‘어머니는 아들로 하여금 귀해진다.’ 하였사옵니다. 전하께오서 보위에 오르신 후, 회묘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니, 이 구절에 어찌 한치의 틀림이 있겠나이까? 회묘는 마땅히 릉으로 올리도록 하는 게 좋을 듯 하옵니다.”

답정너 수준의 질문에 답정너 수준의 대답.

융은 흡족하게 웃었다.

“죄인들은 어찌 처결하면 좋겠소?”

“치, 친국으로 잡혀온 죄인들이니 어찌 죄가 없겠사옵니까. 전하의 뜻대로 하소서.”

“죄에는 대소가 있기 마련이오. 죄의 경중을 나눠 가벼운 자는 속(면죄에 대한 돈)을 바쳐 방면토록 하고자 하는데 어찌 생각하시오?”

상술했다시피 요 며칠 사이 친국으로 금부에 잡혀 들어간 인물들만 아흔 여덟명이었다.

이 과정에서, 비록 잡혀 들어가진 않았어도 선왕을 모셨던 신하들이라면 모조리 금부에 출석해서 진술을 해야 했다. 그런 치떨리는 일을 겪은 대신들었기에 섣불리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임금의 의중과 동떨어지는 말을 했다가는 무슨 트집을 잡힐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성상의 분부가 천번이고 만번이고 지당하신 말씀이시옵니다.”

살 판 난 건 임사홍 뿐이었다.

“올해 충청도에 한발(가뭄)이 강림했다 하니 필시 수확이 현저히 떨어질 것이다. 죄인들이 바친 속은 잘 모아뒀다가 내년 봄 충청도 백성들을 구휼하는 데 쓰면 되겠도다. 영상.”

“예, 전하.”

“백성을 사랑하는 임금의 마음이 어떤가?”

“여, 열성조에서 다시 보기 힘든 서, 성군의 모습이시옵니다.”

“하하. 성군이라니 아부가 지나치다.”

“···”

“금부지사. 지금 금부에 갇힌 죄인들 중에 대신과 재상으로 분류 할 수 있는 이들이 모두 몇 명인가?”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도 놀란다더니 흠칫 몸을 떤 금부지사 노공필이었다.

“마흔이 조금 넘사옵니다.”

“음··· 잡혀온 자들 중 직품이 높은 자들로, 윤필상, 이극균, 민휘, 이자건의 죄가 가장 크다 할 수 있겠으나 평소 왕을 겁박한 죄가 있어서 잡혀온 김천령(金千齡), 심순문(沈順門) 조세보(趙世輔) 등의 죄도 가볍다 할 순 없겠다. 위에 언급한 대신과 재상들은 능지로 다스리고, 아래 언급한 언관들은 참형으로 죄주라. 또한 죽은 간신 정창손(鄭昌孫), 심회(沈澮), 한명회(韓明澮), 한치형(韓致亨) 등은 부관참시하여 본보기로 삼아라. 그 외에는 지사가 따로 죄의 경중을 가리라.”

“···분부 받잡겠나이다.”

“경들에게 이른다.”

충격의 도가니에 빠진 편전.

융이 운을 떼자 중신들이 자세를 바로했다.

“옛날부터 칠거(七去, 아내를 버릴 수 있는 일곱 가지 조건)라는 법이 있었으니 선왕께서 또한, 폐비를 폐하실 때 내건 조건이 바로 칠거였다. 하지만 무릇 칠거는 작게는 부부와 관계된 일이고, 크게 보아야 집안 간의 일이다. 그런데 그런 일로 죽이는 것이 가당한가?”

“···”

“선왕께선 분명 명철한 임금이셨지만 왕위에 있으시면서 어찌 티끌 잘못도 없었겠는가? 실제로 폐비가 사사되기 까진 몇 년의 시간이 있은 뒤였으니, 그때 대간들이 극렬하게 간하고 막았다면, 선왕은 명철한 임금이셨으니 필시 대간들의 말을 따랐을 것이다.”

“···”

“하지만 방금 벌주라는 자들은 어땠는가? 선왕의 분부에 오로지 윤당하다, 지당하다, 온당하다만 외쳐대면서 폐비를 앞장서 폐했다. 저 천한 종놈들도 저희들끼리는 의리가 있어, 서로 호형하고 또한 나이가 많은 노비에겐 존대하는 도리가 있는데 하물며 중신과 국모의 의리가 그러 할 수 있단 말이냐? 내 나이가 어려 폐비의 일을 막지 못 했으니 그것이 참으로 원통할 뿐인데, 더 원통한 것은 그 날의 일을 기억조차 못 한다는 것이다.”

“···”

“옛말에 불구대천과는 한 하늘을 이고 살지 말라 하였으니, 그 일을 알았다면 진작 이 원수들을 같은 하늘 아래 살게 하진 않았을 것이다. 뒤늦게나마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고 나라의 의리를 바로잡게 할 수 있었으니, 이것이 누구의 덕인가?”

감정이 실린 연설 아닌 연설에 눈치만 살피던 중신들이 말했다.

“저, 전하의 덕이시옵니다.”

“일월 같이 밝으신 전하의 덕이시옵니다.”

작게 조소한 융이 말을 이어나갔다.

“어찌 과인의 덕인가? 죄인들이 소인 혹은 간신이라 손가락질 하던 충신 사홍의 덕이다. 진실로 사홍의 덕인 것이다. 이를 나라에서 보상하지 않는다면 어찌 충신을 기를 수 있으랴?”

“···”

“경들은 사홍의 가자(加資, 품계를 올리는 일)와 군호를 논하여 알리라. 이처럼 충신은 언제, 어느 때건 결국 나라에 보답 받게 되어 있으니 경들도 불철주야 노력하고, 정성을 다하라. 알겠는가?”

“예, 전하.”

“모두 물러들 가고, 예판은 잠시 남으라.”

중신들이 우르르 빠져나간 편전.

융은 사관들을 흘겼다.

“모두 물러가라지 않았느냐?”

“하, 하오나 신하와 동석하는 자리에는 사관이······.”

“사관의 용기는 가상하나 사람은 무릇 때와 상황을 알아야 한다. 붓 든 사관은 칼로 베면 피 한 방울 안 나온다더냐?”

“소, 송구하옵니다.”

사관이 후다닥 자리를 떴다.

드디어 둘 만 남게된 편전.

융은 잠시 회상에 잠긴 표정으로 편전을 둘러보았다.

“편전에서 경과 독대할 날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편전에서 보니 감회가 새롭다. 경도 그러한가?”

“성은이 망극하니 감히 성은을 또 다시 운운할 필요도 없나이다. 참으로 성은이 망극하고, 또 망극한 일이옵니다.”

“내 아까 말했다시피 경은 유일하게 내 생모를 끝까지 지킨 장본인이다. 여염집에서도 부모를 지킨 노비들에게는 면천을 시켜주거나, 은혜를 갚는데 하물며 이 일이 어찌 은혜 축에나 끼겠느냐? 다만······.”

“하문하시옵소서.”

“속도를 늦추는 게 좋겠는가, 아니면 계속 숙청을 하는 것이 좋겠는가?”

“전하께서 생각하신 바가 있으니, 생각하신대로 이루는 것이 상책입니다만, 신의 소견을 여쭈셨으니 간하건대 늦추는 것이 온당한 듯 하옵니다.”

“연유는?”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무는 법이옵니다. 저들이 지금은 갑작스레 친국이 들이닥치니 정신을 못 차리고 있으나 옛날의 일을 상고해보면 역적이 어찌 출몰했겠사옵니까?”

“흠. 너무 채찍질만 하는 것 같다는 것인가?”

“그러하옵니다.”

“저들이 준동할 가능성은?”

잠시 고민에 잠긴 듯 보이던 사홍이 곧 입을 열었다.

“개창 이래 역적이 출몰한 일은 없는데다 대의에도 어긋나니 감히 역적이 준동하진 않을 것이옵니다. 더욱이 누굴 추대할 수 있겠나이까?”

“진성은?”

“만약··· 만에 하나 역적이 출몰하면 진성대군을 추대할 가능성이 크긴 하오나, 대군께오선 전하를 따르는 바가 크니 감히 역적과 손을 잡을 일도 없을뿐더러, 저들도 그걸 잘 알고 있는지라 선뜻 접촉하진 못 할 것이옵니다.”

“과연 그렇겠다. 아.”

“말씀하시옵소서.”

“민심은 어떠한가?”

“어떤 민심을 말씀하시온지······.”

민심은 두 가지가 있다.

반가의 민심.

민가의 민심.

“저자의 민심을 말함이다.”

이번엔 후자 같았다.

“백성을 억압하는 일이 아니니 이반할 까닭이 있겠사옵니까? 오히려 반기는 것 같사옵니다.”

“참으로 반어(反語, 아이러니)하구나. 저들의 말을 조금이라도 좇지 않으면 저들은 민심이 곧 이반할 것처럼 굴었거늘······.”

“저들이 말하는 것처럼 백성들은 마냥 무지몽매하지 않사옵니다. 그런고로, 신이 주제 넘게 한 말씀 올려도 되겠나이까?”

“하라.”

“저들은 늘 백성을 교화하고, 바른 길로 인도해야 한다지만 백성은 교화의 대상이 아니옵니다. 베풂의 대상이옵니다. 전하께서 커다란 도량으로 품으신다면 백성들이 어찌 저들을 따르겠사옵니까?”

“베풂의 대상··· 내 그대의 말을 뼈에 새기겠다. 그래서 어떤 일이 있어도 백성을 침착하진 않아야겠다.”

“그리한다면 명분과 대의를 쥐고 있는 것은 전하시니, 저들을 아무리 채찍질 한다 해도 함부로 준동하진 못 할 것이옵니다. 또한 다행인 일은 이번에 전하께서 특지(特旨)하신 종두법 말이옵니다.”

“백성들이 반긴다더냐?”

사홍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져나갔다.

“반기다 뿐이겠사옵니까. 상감의 덕이 밝고 또한 공이 또렷하니, 이제는 두신 마저도 벌벌 떨게 할 지경이라는 말이 저자에 파다하옵니다.”

“아직 시행조차 하지 않았는데 이 정도니 과연 시행되면 백성들이 크게 반기겠구나.”

“물론이옵니다. 그 어떤 성군도 해내지 못 한 것이 두신을 잡는 일 아니었사옵니까? 종두는 이미 진성대군의 노복들로 하여금 그 효험이 입증이 된 것이니, 이것이 팔도에 뿌리내릴 수만 있다면 전하께서 어떤 일을 하신다 한들 백성들은 믿고 따르게 될 것이옵니다.”

“백성들이 믿고 따른다······.”

상상만으로 흐뭇했다.

“내 오늘 기분이 몹시 좋아 술이 빠져서는 안 되겠다. 풍원위와 진성을 불러 경회루에 올라야겠다. 경도 참석하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

“어우, 되다.”

삼의사의 의원들과 함께하는 종두도감의 도제조 감투를 쓰게 되면서 24시간이 모자를 지경으로 바빠졌다.

종두도감이 혜민서에 설치됐다보니 종두에만 매진 할 수가 없었다.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백성들에 대한 진료도 종두도감의 업무중 하나였는데, 의학에 의자도 모르는 나라지만 가만히 있을 순 없어서 일손이라도 도왔다.

어찌나 사람들이 밀려드는지, 혜민서 주부이자 나는 편의상 과장님이라고 부르는 김공저 과장도 종두도감이 설치되기 이전보다 훨씬 바쁘다고 할 정도였다.

김 과장님은 종두도감이 혜민서에 설치되면서 의료 인력이 보충되니 그간 일손이 달려 진료를 못 보던 백성들이 일시에 들이닥친 것 같다는 첨언을 해주었다.

내가 봐도 그런 것 같았다.

“대감.”

쉬면 뭐 해.

일감이 한가득인데.

산더미처럼 쌓인 빨래감을 낑낑거리며 가지고 가는데, 누군가 날 불렀다.

“숭재 씨.”

“무얼 하시옵니까?”

“의녀들이 빨래 한다길래 좀 돕고 있었습니다.”

“아랫것들 시키지 않으시구요. 체통을 지키셔야지요.”

“놀면 뭐해요. 일손이라도 도와야지.”

“하하. 그럼 저도 돕겠습니다.”

숭재 씨가 달라 붙으니 일이 한결 수월했다.

빨래감을 정해진 장소로 옮긴 나는 뒤늦게 용건을 물었다.

“근데 여긴 어쩐 일로?”

“무슨 연유가 있어야 대감을 찾겠습니까?”

하긴.

그만큼 막역해지긴 했다.

“실은 전하께서 찾아 계셨습니다.”

“전하께서요?”

“예. 경회루에서 가볍게 석반(저녁)이라도 들자시더군요. 함께 입궐하면 좋을 것 같아 이리 들렀습니다.”

“그래요?”

“예. 이번에 종두도감 관련해서 치하하시는 차원에서 부르신 것 같습니다.”

“음.”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종두법 관련해서 치하하시는 거라면 혹시 사람 하나 더 데려가도 될까요?”

“누굴 말씀하시는지······.”

“장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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