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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54화 (54/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54화>

    피실험자(?) 장금이

    ***

    -뭐하고 있었니♪ 늦었지만 잠시 나올래♬ 너의 집 골목에 있는 놀이터에 앉아 있어♪ 친구들 만나서♬ 오랜만에 술을 좀 했는데 자꾸만♪ 네 얼굴 떠올라 무작정 달려왔어♬ 이 맘 모르겠니♪

    “요즘 난~ 미친 사람처럼 너만 생각해~ 대책 없이 네가 점점 좋아져~ 아냐! 안 취했어~ 진짜야~ 널 정말 사랑해~!”

    불후의 명곡인 Feel의 취중고백.

    전생에서도 자주 불렀던 취중고백을 흥얼거리면서 발을 놀려댔다.

    “대감마님. 쇤네가 궁금해서 그러는데 그건 무슨 가락입니까요?”

    나는 종종 노래를 흥얼거리곤 했다.

    습관적으로 나오기도 했지만 걷는 길이 심심해서 나오는 게 대부분이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무의식적으로 취중고백을 부르니, 여태 궁금한 걸 꾹 참고 있었는지 덕산이가 물어왔다.

    “신(新) 가락이라고 치자.”

    “신가락이요?”

    “새로운 가락, 인마.”

    “아··· 명에서 건너온 겁니까요?”

    잠시 고민하던 내가 말했다.

    “명나라 보다는 좀 더 멀지? 왜, 신기하냐?”

    “예. 신기한 가락입니다요. 뭔가 밝고 노래도 빠른 것 같습니다요.”

    발라드니 현대인이 보기엔 취중고백은 느리기 짝이 없는 노래지만, 조선 사람인 덕산이에겐 빠른 템포의 노래로 느껴진 모양이었다.

    ‘하긴. 이 시대 노래들이란 게 대부분 정적이니까.’

    흔히 아이들이 부르는 민요는 적당히 템포가 빠르기도 하지만 노동요 같은 건 느리기 짝이 없었다.

    “얼마나 남았냐?”

    “거의 다 왔습니다요.”

    잠시 후.

    도착한 곳은 혜민서였다.

    내 집에서 불과 3~4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의료 기관인데, 그런 의료 기관을 내가 찾은 건 다름이 아니라 자문(?)으로 초청이 됐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종두법 자문위원(?)으로서 처음 혜민서에 출근하는 길이었다.

    마침내 혜민서에 발을 들이자, 미리 기다리고 있었던지 TV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의복 차림의 사내 수십명이 우르르 달려나왔다.

    “내의원정 김흥수(金興守) 인사 올리옵나이다.”

    “소인은 혜민서 주부 김공저(金公著)이옵니다. 이리 만나 뵙게 되었으니 실로 큰 광영을 입었나이다.”

    수십명의 사람들 중에 우두머리(?) 격에 가까운 사람들이 인사를 올렸다.

    사실 누가 누구인지 몰라서 반갑다는 인사치레로 대답을 대신했다.

    “종두법을 도와줄 사람들은 모두 몇 명인가요?”

    “의녀를 포함하오리까?”

    “네.”

    “의녀를 포함하면 내의원에 마흔. 혜민서에서 스물. 전의감에서 서른. 의원만 모두 아흔이옵고 그 외에 사령들까지 합하면 백오십이 조금 안 되옵니다.”

    생각보다 많다.

    나는 기껏해야 3~40명이 날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말이다.

    ‘그만큼 천연두를 예방하고 싶다는 강한 의지기도 하겠지?’

    다 합쳐 백오십명.

    각각 소속이 다른 사람들 모두가 종두법이라는 이름 아래 모였다.

    그만큼 형님 전하의 종두법 박멸 의지를 짐작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 의지에 대한 보답은 노력 밖엔 없었다.

    또, 내색은 안 해도 내의원정 김흥수라는 분과 다른 의원들 모두는 적대감까진 아니어도 반신반의하는 표정들이 대부분이었다.

    역알못이었던 내가 조선에 오면서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의학이란 게 의원들만 아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연산군 형님도 의학에 제법 박학다식했고, 장곤 선생님도 어지간한 의서는 통달했을 정도로 의학에는 박학다식한 편이었다.

    그건 다른 양반들도 마찬가지였다.

    무조건이라는 단서를 달 순 없지만 대체적으로 과거 공부를 준비하는 수험생(?)들은 의서도 함께 읽었다.

    일종의 교양 과목이랄까?

    그러니 만큼 의학과는 하등 관계가 없어 보이는 병조판서라던지 홍문관 직제학이라던지, 심지어는 무신들까지도 일정 수준의 의학 지식은 갖춘 상태였다.

    하지만 그것과 낙하산 인사는 별개였다.

    혜민서 뜰에 모인 저들의 표정이 그걸 증명하고 있었다.

    반신반의.

    적대감은 아니지만 모두 긴가민가하는 표정들이었다.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나라도 그럴 테니까.

    저 사람들은 한평생 의학에 종사한 사람들이다. 그런 본인들도 확신을 할 수 없는 천연두를, 의학과는 하등 관계가 없던 대군이 치료하겠답시고 설친데 모자라, 총책이 되었으니······.

    종두법 박멸 의지를 내비친 전하에 대한 보답이 노력이라면, 저들이 날 따를 수 있게 만드는 건 성과 밖에 없었다.

    하지만 당장 성과에 목을 맬 수는 없었다.

    나는 일단 조직의 체계를(?) 세웠다.

    혜민서, 전의감, 내의원.

    소위 말하는 삼의사(三醫司, 혜민서, 전의감, 내의원)의 관원들이 각각 직계가 다르고 품계도 다르다 보니 그걸 통일 시키는 게 필요해보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왕도 아닌 내가 나 좀 편하자고 주부니 판관이니, 봉사니, 직장이니··· 소꿉놀이 하듯 부를 순 없었다.

    입에 설지도 않고.

    결국 나는 편의상 직급과 부서를 만들었다.

    주임-계장-대리-과장-차장-부장 같은 직급 말이다.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들은 부장~과장으로 불러주고, 그 밑에 있는 사람들은 과장~주임이라고 불렀다.

    반발은 없었다.

    다행히 가끔씩 설치되기도 하는 도감(都監)의 임시관직이나 별명 정도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이런 일련의 통일 과정(?)을 끝마치자마자 성과를 내기 위해 몰두했다.

    다행히 나라에서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기 때문에 어려움은 별반 없었다.

    “이 소들입니까?”

    “예.”

    내가 혜민서에 등청한 지 사흘 째 되던 날.

    혜민서에는 여러 마리의 소들이 구슬피 울고 있었다.

    모두 두창 걸린 소들이었다.

    “좀 잡고 있어줄래요?”

    사복시에서 지원을 나온 관리들이 관노들을 부려 소를 잡고 있는 사이, 나는 재빨리 소들을 살폈다.

    이전에 내가 학당리에서 사온 두창 걸린 소처럼 몸에 두창 종기가 나있었다.

    “이걸로 정말 끝이옵니까?”

    내가 임시적으로 설치된 종두도감의 총책을 맡게되자마자 한 일은 직급을 만든 일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한 일이 바로 두창 걸린 소를 수소문하고, 모두 혜민서로 들이라고 한 것이었다.

    내 말은 곧바로 어전에도 올라갔고, 어전에서는 곧바로 전국의 목장에 있는 소들 중에 두창 걸린 소는 하나도 빠짐없이 혜민서로 보내라는 령이 하달된 상태였다.

    이 소들 역시 그런 일환으로 혜민서에 온 소들이었다.

    소라는 게 값어치가 나가는 귀한 재산중 하나라지만, 이런 미물로 천연두를 예방 할 수 있다니··· 내의원정 아저씨, 아니지.

    김 부장님은 여전히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끝입니다.”

    “하면 이 두종을 긁어내는 것입니까?”

    김 부장님이 발버둥치는 소를 피해 두종을 가리키며 물었다.

    “네. 사람들좀 모아주시겠어요?”

    저번엔 가볍게 개념만 설명했었다.

    하지만 실습할 재료(?)가 왔으니 손수 보여주면서 강의를 하는 게 좋아보였다.

    “알겠습니다.”

    김 부장님이 사람들을 데리러 나간 사이, 실습때 쓸 재료들을 구비했다.

    마침 두묘를 채취하자, 김 부장님이 여러 사람들과 함께 뜰에 나타났다.

    좁은 뜰이 인파로 바글거렸다.

    몇몇은 반신반의 하는 표정으로,

    몇몇은 생기발랄한 표정으로,

    몇몇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표정들은 모두 제각각이었다.

    자연스레 긴장이 됐다.

    팔자에도 없는 강의라니.

    “모두가 보는 앞에서 시범을 보이려 하는데 혹 살면서 두창에 안 걸리신 분들 중에 자원하실 분 계십니까?”

    떨리는 마음을 다잡고 자원할 사람을 구했다.

    시범을 보이려면 임상실험 대상자가 필요했다.

    혜민서에 속한 노비라던지 내의원이나 전의감에서 지원 나온 노비들을 써도 되겠지만, 강압적으로 하고 싶진 않았다.

    웅성웅성.

    혜민서 뜰이 금세 시끌벅쩍해졌다.

    뜰에 모인 사람들은 제각각 ‘자네가 지원하게.’, ‘혹 소처럼 둔해지는 건 아니겠는가?’ 동료 의원들끼리 말을 할지언정 자원은 꺼리는 모습이었다.

    ‘···없네.’

    없으면 하는 수 없이 관노들 사이에서 자원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하던 그때.

    “계집도 자원을 할 수 있사옵니까?”

    어디선가 들려온 음성은 분명 가녀린 그것이었다.

    음성을 따라 고개를 요리조리 돌려댔다.

    저 멀리.

    백 여명에 가까운 의원들 틈사이에서 까치발 들고 있는 소녀의 코빼기가 간신히 보였다.

    “물론 의녀님들도 지원 할 수 있습니다.”

    자원한 소녀가 주위의 따가운 눈총과 함께 성큼성큼 걸어나오기 시작했다.

    직접 본 소녀는 생각보다 훨씬 어려보였다.

    열여섯 일곱이나 먹었을까?

    “대감. 그 아이는 초학의(初學醫)로 있는 자이옵니다.”

    어린 애가 용기가 가상하네.

    생각을 하고 있는데, 김 부장 아저씨가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초학의는 일종의 의대생에 가까운 개념이었다.

    “뭐, 어때요. 종두만 놓는 건데.”

    “그래도······.”

    “자원한 사람이 없잖아요.”

    그 사이.

    초학의라는 의녀가 내 앞까지 다가왔다. 그러고는 처분을 기다리는 양, 공손히 고개를 조아렸다.

    “이름이 뭡니까?”

    “소녀 초학의 장금(長今)이라 하옵니다.”

    “장금이?”

    “예.”

    설마 《대장금》의 그 장금?

    사극을 안 본 사람도 《대장금》은 봤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당대 대장금의 인기는 대단했었다.

    나도 사극은 잘 안 봤어도 《대장금》은 1화부터 봤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라 사실 기억 나는 장면은 장금이가 남주 민정호와 함께 역병이 창궐한 지역에 가는 것 밖엔 없지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대장금》의 장금이가 맞다면 놀랄 노자가 따로 없겠다.

    신기한 마음이 한가득었지만, 초롱초롱 눈을 빛내고 있는 사람들 때문에 임상실험(?)을 더 지체 할 순 없었다.

    “저번에는 종두의 개념에 대해 설명해드렸었습니다. 이번에는 종두 놓는 방법을 설명드릴 건데요. 그전에 앞서서 이게 바로 종두 놓을 때 필요한 도구 들입니다.”

    “그것들만 있으면 두신을 무찌를 수 있다는 말씀이시옵니까?”

    생각보다 별 거 없는(?) 재료들에 곳곳에서 탄식이 나왔다.

    반신반의하는 의원은 질문까지 해 올 정도였다.

    “네, 이거면 충분합니다.”

    침, 채취한 두묘.

    “단, 이 침과 두묘를 담은 호리병은 접종 전에 깨끗이 씻고 살균을 해야 합니다.”

    “깨끗이 씻는 건 어이 그러한 것이옵니까?”

    “일전에 설명드린 두신의 졸개들이 침에 남아 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면 살균은 무엇인지요?”

    나는 관노들을 시켜 솥을 가져오라 시켰다.

    곧이어 펄펄 끓는 솥에 침을 넣었다.

    “이게 바로 살균입니다. 1차적으로 두신의 졸개들을 흐르는 물에 씻겨낸다 해도 남아 있는 졸개들이 있을 수 있으니 끓는 물에 삶아 죽이는 겁니다.”

    “아······.”

    “자, 그럼 접종을 시작하겠습니다.”

    낙하산 인사(?)를 알 게 모르게 씹어대던 의원들도 이때만큼은 집중하기 시작했다.

    ***

    며칠 후.

    “대감! 대감!”

    여느 날처럼 혜민서에 출근해서 다른 의원들에게 기초적인 보건 의식을 전파(?)하던 나를 김 부장님이 황급히 찾았다.

    멀리서 달려오셨는지 숨이 곧 넘어갈 것처럼 헐떡거리셨다.

    “무슨 일이신데 그렇게 호들갑이세요, 김 부장님?”

    “나, 나았다고 하옵니다!”

    “네?”

    “자, 장금이 말이옵니다! 장금이가 다 나았다고 하옵니다!”

    난 또 뭐라고.

    당연히 나았겠지.

    장금이에 대한 임상실험은 잘 진행이 됐었다.

    행랑식구들한테 접종을 하자마자 행랑식구들에게 나타났던 것처럼 장금이에게 가벼운 천연두 증세가 나타난 것이었다.

    모두가 걱정하는 기색을 내보였었다.

    나 빼고.

    나는 대수롭지 않게 볼가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이제 병석에서 일어났을 테니 장금이에게는 바깥 활동은 삼가라고 전해주세요.”

    “그리 하겠사옵니다!”

    이전에 날 바라보던 김 부장님의 눈빛이 반신반의였다면 지금은 호의가 한가득이었다.

    김 부장님이 물러가자, 나는 강의를 계속했다.

    “자, 그럼 왜 손발을 잘 씻어야 하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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