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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53화 (53/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53화>

    그 날의 간신 혹은 충신

    ***

    “그 얼굴들을 경도 봤어야 했다.”

    희희낙락.

    임금의 만면에는 웃음이 한가득이었다.

    임도 임금을 따라 방긋 미소지었다.

    “그나저나 무리하신 건 아닌지요?”

    “경을 판서에 제수한 일 말인가?”

    임.

    아니, 사홍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금은 간적들이 전하의 눈치를 보고 있으니 괜찮다지만 후일 어떤 말이 나올까 신은 두렵기 그지 없사옵니다.”

    “일신의 안위가 걱정 되는가?”

    “그럴 리가 있겠사옵니까. 신은 어찌 되든 상관이 없사오나 그 폐를 전하께서 받으신다면 이만한 불충이 어딨겠나이까.”

    사홍의 말에 융은 기꺼이 미소 지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신념과 소신을 지킬 줄 아는 위인들?

    조정에 얼마 있지도 않다.

    친국을 며칠 간 겪으니 바로 저희들이 탄핵하던 사홍의 제수를 찬동하던 자들이 아닌가?

    반면 사홍은 달랐다.

    그는 진정 충신이었다.

    선대왕 시절 폐출을 반대한 인물은 여럿 있었다.

    하지만 끝까지 폐출을 반대한 사람은 사홍이 유일무이했다.

    사홍이 정말 세간의 평처럼 일신의 안위와 부귀영화를 탐하는 간신이었다면 선왕의 뜻대로 폐출을 반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당대 다른 신하들처럼 반대를 표하다가도, 금방 찬성으로 돌아섰어야 했다.

    하지만 사홍은 끝까지 폐출을 반대했다.

    신념을 꺾지 않은 것이고, 소신을 굽히지 않은 것이었다.

    그 결과 사홍은 22년간 귀양살이를 해야만 했다.

    22년.

    말이 쉽지, 어느 누가 22년 동안 신념과 소신을 접지 않을 수 있겠는가?

    민휘?

    이자건?

    윤필상?

    이세좌?

    노공필?

    이극균?

    퍽이나.

    “농이었다. 괘념치 말라. 그대가 일신의 안위를 도외시한 충신이 아니면 누가 충신이란 말인가.”

    “듣기 민망하옵니다.”

    “세간의 평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염려 마시옵소서. 저, 하온데······.”

    “음?”

    “미처 여쭙지 못 한 게 있사온데 아뢰어도 될는지요.”

    “뭐든 말해보라.”

    “윤필상이 말이옵니다.”

    “부원군?”

    “예.”

    “전하께오서 다 깊은 뜻이 있으셨기에 일을 봉한 것일 테지만 어찌 살려두셨는지 어리석은 신으로선 의아하지 않을 수가 없는지라······.”

    사홍의 질문에 융은 찻잔을 입에 가져다댔다.

    후후-.

    찻잔에 입김을 불자 뜨거운 열기가 전해졌다.

    “경을 책하는 건 아니니 마음쓰지 않았으면 한다.”

    “하문하소서.”

    “경이 그간 조정을 떠나 있어 사세를 내다보는 일에 어두워진 게 아닌가 하구나.”

    “···송구하옵니다.”

    “아니다. 22년이지 않았던가. 정배에서 풀려났다고 해도 대간의 눈치가 보였으니 이해한다. 그래, 윤필상이 말이지?”

    “예. 절호의 기회였사온데 어찌 방면하라 명하셨는지······.”

    “필상만 잡는다고 일이 끝나겠는가?”

    “예?”

    융은 식은 차를 한번에 쭉 들이켰다.

    “그래서 말인데, 경이 상소 하나만 올려줘야겠다.”

    ***

    《신은(新恩)처럼 성은을 받잡은 신(臣) 임사홍이 삼가 목욕재계하고 글월을 올립니다. 신이 이제 예조의 장관에 제수 되었으니 그 은혜가 참으로 거룩합니다. 하지만 신이 제수 받은 자리가 예조의 자리이니 어찌 예를 귀히 여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은 비록 불민하고 불측하다는 평이 있으며, 또한 세간에선 용렬하다 함께 말하니 예에 통현하지 못 함이 실로 세상 사람들도 알만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신도 알 수 있는 것이 있는데, 바로 파평부원군 윤필상의 일입니다. 중략··· 하므로 한(漢)나라 광무제(光武帝)는 한 가지 일로써 곽후(郭后)를 폐한 바 있고, 송(宋)나라 인종은 이간(夷簡)의 참소를 듣고 곽씨(郭氏)를 폐출(廢黜)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건대 사람은 본시 누군들 티끌만한 실수를 하기 마련입니다. 선왕께서 폐비를 바라신다 한들, 어찌 신하된 자로 반대치 않는 게 온당한 처사겠습니까? 더욱이 예부터 왕비는 비록 덕이 없다 할지라도 종사에 관계된 게 없다면 도의적으로라도 폐할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한데 앞다투어 폐출을 찬동하였으니 신은 참으로 참담한 심경이었으나, 선왕의 어지가 확고한 탓에 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일이 천추의 한으로 남았건만 신이 예조에 등청하면서 드디어 윤필상의 일을 전해 들을 수가 있었사온데 참담하고 또 참담하여 가슴이 미어지는 기분이었습니다. 감히 아뢰건대 필상은 회묘(연산군의 생모 윤씨)에 관계해서는 입도 뻥긋하지 않는 것이 도의에 부합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당시 원자였던 전하께서 마침내 보위에 오르시자, 일평생 그걸 두려워하고, 본인이 관계된 바를 혹 누군가 전하께 아뢸까 밤낮으로 근심하다가 이번에 전하께서 중죄를 지은 죄인들을 벌주는 모습에 화들짝 놀라 진성대군을 설득하고, 대신 상소를 올리게 했으며 감히 회묘를 언급한 것입니다. 그 죄는 이세좌나 민휘나 이자건의 죄를 모두 합친다 한들 윤필상의 죄에 이를 수가 없을 터인데, 전하께서 방면을 명하셨으니 신은 의아하기 짝이 없습니다. 자식은 불구대천과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 하였으니 그것이 조정의 대신이라 한들 가당키나 한 일이겠습니까? 하물며 필상은 나라의 원수나 다름이 없는 자이며, 폐비를 앞다투어 쫓아낸 원흉인데 아직 중추에 있는 것이 의아하다 아니 할 수 없겠습니다. 이에 따라서 회묘를 회릉으로 격상시킴은 가한 일이 되겠으나 필상을 벌주지 않는 것은 부당한 일이 되겠습니다. 삼가 목숨으로 바라건대 필상을 벌주소서. 그리하여 사직(조정)의 정의와 기강을 바로잡으소서.》

    한직이 아니라 예조판서라는 요직으로 화려하게(?) 복직한 임사홍은 복직하자마자 상소 하나를 올려 파장을 일으켰다.

    한마디로 윤필상은 윤씨 생전에 폐출을 앞장서서 찬동한 인물인데 이제와서 회릉으로 격상시키자는 주장을, 본인의 입도 아닌 남의 입을 빌려 했으니 이건 또 다른 기만이며 위선이라 돌려 까기(?)를 시전한 것이었다.

    조정이 충격의 도가니에 빠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나이를 지긋하게 잡순 노신들은 윤씨의 일을 모두 알고 있었다.

    꼭 노신들 뿐만이 아니라 이제 막 출사한 관리들도 선배 관리들에게 윤씨의 일을 전해 들어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엔 입밖에 꺼내선 안 되는 말이 있다.

    그게 바로 윤씨에 관한 일이었다.

    폐비 윤씨에 대한 일은 수십년간 금기에 해당했다.

    가끔 그 이름이 거론된 적은 있었으나, 그때마다 조정의 신하들은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었고, 그 이후로는 지위고하를 막론한 그 누구도 감히 폐비 윤씨에 대한 일은 거론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금기가 깨졌다.

    다른 사람도 아닌 임사홍의 상소를 통해서.

    임사홍이 누군가.

    폐비 윤씨의 폐출을 그 누구보다 앞장서서 막은 장본인 아니던가?

    그로인해 임금의 총애를 잃고 신뢰를 잃어 결국 20년이 넘도록 유배 생활을 했으니, 중신들은 임사홍이 조정에 복귀하자마자 당시의 일에 연관된 자들에게 일종의 복수를 하는 것이 아닌가 두려운 마음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두려운 마음은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편전.

    “모두 예판의 상소는 보았는가?”

    “···보았사옵니다.”

    “예판.”

    “예, 전하.”

    “예판은 어찌 해괴한 상소를 올려 과인을 번거롭게 하였는가.”

    “성은을 받잡고 출사했사온데 대신 한 사람이 성총을 흐리게 한 일이 바로 엊그제 일어 났나이다. 신이 어찌 좌시 할 수 있겠나이까?”

    “필상이 내 생모의 일과 연관되어 있는가?”

    짐짓 모르는 척 묻는 임금에 중신들은 경악을 금치 못 했다.

    모를 수가 없는 일이었다.

    수십년간 조정의 금기어에 가까웠다지만 당시의 일을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중신들의 마음 한켠에 불길함이 싹트기 시작했다.

    “신이 상소에 올린 것은 일부에 불과하옵니다. 신의 심경으로는 국모를 폐한 필상을 당장 난장치고 싶은 심정일 뿐이옵나이다.”

    “예판은 도가 지나치시오. 필상이 무슨 국모를 폐했다고 하시오? 폐비의 일은 선왕께서 바라신 일이었소이다. 선왕의 뜻을 우리가······.”

    말을 이어나가던 극균은 실수를 뒤늦게 인지했는지 입을 틀어막았다.

    “흠흠. 선왕의 뜻을 어찌 필상이 꺾을 수 있었다고 그리 필상을 음해하시오?”

    “아.”

    “···”

    “그러고 보니 좌상께서도 폐출을 자의반 타의반 찬동하셨지요?”

    “커험! 찬동이라니! 어전이외다! 말씀을 중히 하지 못 하시겠소?”

    “당시의 일을 겪은 자들이라면 어찌 필상을 두둔 할 수가 있겠습니까? 나라의 어미를 폐한다는 게 가당키나 한 발상이랍니까? 하물며 이제와서 회묘를 그 입으로 언급하는 것은 사람의 도리를 저버린 일이나 다름이 없는 것인데, 다른 사람도 아닌 진성대군을 통해 본인의 계책을 이루려 한단 말입니까? 또, 이걸 직접 보고 어찌 참을 수 있겠습니까?”

    다소 감정이 깃든 사홍의 공박에 극균은 꿀먹은 벙어리가 됐다.

    사실 반박할 여지는 없었다.

    누군들 폐비의 원자가 그대로 장성해 보위에 오를 줄 알았을까.

    아니, 그건 차치하더라도 수십년 뒤에 당시의 일이 까발려질지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

    앞전의 친국은 차라리 약과에 불과했다.

    이건 살 떨린다는 말로도 형용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회릉으로 격상시키자는 말이 나온 게 아닙니까? 지금 예판은 선왕의 업을 부정하는 것이오?”

    의금부지사 노공필이 반박을 못 하는 극균을 대신했다.

    “누가 선왕의 업을 부정하자고 했습니까? 사직의 기강을 다시 세우자는 겝니다. 이세좌의 일 또한 따지고 본다면 사직의 기강이 해이해졌기 때문에 일어난 일 아니겠습니까?”

    “아니, 예판. 지금 예판은······.”

    쾅! 쾅!

    “어전임을 잊었단 말이냐?”

    임금이 분위기를 환기시키자, 중신들이 고개를 조아렸다.

    “예판은 혹 필상과 원한이 있는가?”

    “없사옵니다.”

    “하면 갑자기 회묘를 언급한 건 무슨 까닭 때문인가?”

    “앞서 말씀 아뢴대로 폐비를 폐출시킨데 적극 찬동한 인물이 바로 윤필상이었사옵니다. 한데 이제와서 회릉으로 격상하자니, 당시 폐비가 끌려가는 참상을 눈으로 목도했던 신으로선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사료되었사옵니다. 엄밀히 필상은 신과 원한이 있다기 보다는 국모를 폐한 나라의 원수라 할 수 있나이다.”

    사홍이 속사포로 말을 쏟아내자, 융은 다시 한 번 처음 듣는다는 듯 되물었다.

    “끌려가다니? 무슨 말인가? 나는 내 생모께서 폐출된 것이 잘못을 해서 인 줄 알았는데?”

    “잘못을 저지르긴 했습니다만, 여염집의 부부 생활도 사사로이 알 수 없사온데 어찌 중궁전의 생활을 일일이 알 수 있었겠사옵니까? 선왕께선 진실로 성군이셨으나, 오로지 한 가지 잘못이 있다면 바로 중궁을 폐한 일이니, 하물며 찬동한 자들이야 죄가 없다 할 수 있겠사옵니까?”

    “지금 이게 무슨 말인가?”

    역시 융은 짐짓 모르겠다는 듯 반문했다.

    그 표정만 본다면 순진무구하기 짝이 없었다.

    마치 처음 듣는 이야기라는 듯 말이다.

    “전하께선 마음에 담아두지 마소서. 세간에 사홍은 간신이란 평이 있는 자이옵니다.”

    노공필이 식은 땀을 흘리며 대꾸하자 융은 어좌를 내려쳤다.

    “내가 사홍의 평을 물었느냐! 그 날의 일을 물은 것이다!”

    “···”

    “너희들이 정녕 나를 우롱하려는 심산이렷다? 여봐라!”

    문차비가 문을 열자 왠 일인지 금부도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품계상 조회에 참여 할 수 없는 금부도사다.

    친국 때라면 몰라도 친국은 끝났으니 더더욱 밖에 대기할 까닭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문차비가 문을 열자마자 금부도사가 기다렸다는 듯 모습을 드러낸다.

    “하문하시옵소서.”

    “내 필상에게 은혜를 베풀었으나, 감히 회묘의 일로 날 기만하였으니 이런 일이 또 있겠느냐? 당장 필상을 잡아 들여라! 그리고······.”

    중신들을 일별한 융이 말했다.

    “회묘에 관계된 자들은 죽은 자건, 산 사람이건 모조리 잡아들여라! 내 그 날의 진상을 알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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