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군으로 살어리랏다-52화 (52/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52화>

    파평부원군이 상소 올려달래요

    ***

    《삼가 진성대군이 주상 전하께 처음으로 상소를 올립니다. 거두절미하고 오늘 파평부원군이 도승지의 저택을 찾아왔습니다. 창녕대군과 놀이하고 있다가, 이 집의 노(奴) 가울이 부원군이 오셨다 하여 황급히 의관을 정제하고 맞았습니다. 신변잡기를 하다가 본론으로 들어갔는데, 부원군께서는 요즘 친국이 너무 지나치다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긴가민가했는데 구품관도 벌벌 떨고 있다고 하니까, 생각보다 무서워하는 사람들이 많은가 보다 싶어서 상소를 올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아우는 선비란 신념과 소신을 지킬 줄 아는 사람들이라고 배웠습니다. 조정의 어른이기도 부원군의 부탁을 받아 이렇게 글월을 씀으로써 전하께 심려를 끼치고는 있으나, 이게 정말 맞는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 그리고 부원군께서 회묘를 회릉으로 격상시키면 좋겠다고도 하셨습니다. 제가 어리석어서 잘 모르겠지만 전자는 형님 전하에 대한 월권이니 차치하더라도 회묘는 형님 전하의 생모 되시는 분의 봉분이니 확실히 묘보다 릉으로 격상시키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전하께선 한 나라의 지존이신데, 지존의 어머니가 묘라 불리면 얼마나 마음이 쓰이시겠습니까? 다시 한 번 이상한 상소로 전하께 심려를 끼쳐드려서 송구하옵고, 상소를 언문으로 올림을 용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처음으로 쓰는 상소라서 좀 더 길게 쓰고 싶지만, 아우가 아둔하여 글을 더 늘릴 수가 없겠습니다. 마침 창녕도 놀아달라 떼를 쓰고 있으니 이만 줄이겠습니다. 진성대군 올림.》

    보름 가까이 친국장으로 사용되고 있는 사정전.

    사정전에 오라를 받고 불려온 윤필상은 진성대군의 상소를 보자마자 경악을 금치 못 했다.

    상소를 올려달라고 했지, 누가 그걸 곧이곧대로 일러 바치는 편지를 써달랬던가?

    아니, 그건 차치하더라도 이런 상소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격식에 어긋나도 한참 어긋난다.

    서간(편지)이라면 차라리 이해가 가련만 승정원을 통해 전달됐다니 명백한(?) 상소였다.

    하지만 상소가 격식에 어긋난 건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 신경써야 할 건······.

    촤락!

    상소문 낭독이 끝난 융은 진성의 상소문을 고이 접어 상선에게 건네주었다. 그러고는 단을 내려왔다.

    화들짝 놀란 필상이 사색에 질린 얼굴로 부복을 했다.

    “부원군은 참으로 대단하시오.”

    꿀꺽.

    “아니.”

    잠시 말을 끊은 융은 필상을 흘기고 사정전에 모인 중신들을 돌아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여기 계신 모두가 대단하시오.”

    도처에 마른 침 꼴깍거리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비록 임금이 성을 내고 있진 않지만, 중신들이 모를 리가 없었다.

    임금이 분노를 가까스로 짓누르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이번 사안이 얼마나 중한지는 속세와 연을 끊은 땡중들도 알만한 것이니, 닳고 닳은 중신들은 바짝 몸을 사릴 수 밖에 없었다.

    “···”

    사정전 뜰에는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죄인이 돼서 끌려온 필상은 필상대로.

    예정에 없던 갑작스런 친국에 놀란 중신들은 중신들대로.

    감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부원군.”

    “에··· 예! 저, 전하!”

    “부원군은 출사한 지 얼마나 되었소?”

    “소, 소과를 이르시온지 대과를 말씀하시온지······.”

    출사라 함은 조정에 나아가 녹을 받는 걸 이르니, 당연히 대과를 이름일 테지만, 정신이 아득해질대로 아득해진 필상에겐 분간이 어려운 말이었다.

    “정신을 도승지의 집에 놓고 오신 모양이오.”

    “겨, 경오년(1450년)에 그, 급제하였으니 5, 50년은 넘었사옵니다.”

    “50년. 참으로 긴 세월이오. 안 그러오?”

    꿀꺽.

    “그렇사옵니다.”

    “우리 부원군은 참으로 나라에 많은 공을 세웠소. 그 옛날 이시애가 판을 칠 때는 도승지로 있으면서 공을 크게 세웠고, 선대왕 시절에는 경상도에 가뭄이 들어 진휼사로 백성을 구제해 경상도에도 크게 이름을 떨쳤고, 역시 지난 선대왕 시절 오랑캐들의 난리를 평정한 공이 있으니 참으로 많은 공을 세웠소.”

    “서,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한데 사람이 어찌 공만 있을 수 있겠소. 참으로 많은 과도 있소. 백성들의 재산을 강탈하여 사리를 채웠다고 하여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었고, 삼공(삼정승)으로 있으면서는 사사로이 뇌물까지 받아 쳐잡수셨으니 어찌 공만 있었겠소?”

    “소, 송구하옵니다.”

    “하지만 경이 지은 죄중에 가장 큰 죄가 무엇인지 아시오?”

    “···”

    “진성을 통해 친국을 무마하려 한 점?”

    “···”

    “진성을 이용해 날 겁박하려 한 점?”

    “···”

    “아니면 감히 뒤에서 계책을 세운 점?”

    “···”

    “아니오. 그대가 지은 죄중에 가장 큰 죄는······.”

    자리에서 일어난 융은 천천히 필상에게 다가갔다.

    필상과 지근거리에 이르자, 그는 허리를 살짝 굽히고 부복해 벌벌 떨고 있는 필상의 귀에 속삭였다.

    “그대가 더러운 혀를 놀려 폐출한 내 생모의 묘를 감히 그대의 더러운 입으로 다시금 릉으로 격상하자고 한 것이다.”

    “저, 전하!”

    화들짝 놀란 필상이 감히 임금의 용안을 올려다봤다.

    대단한 무례였지만, 그만큼 필상의 당혹감은 컸다.

    “너의 죄가 이에 이르렀는데 내 어찌 널 벌하면 좋겠느냐?”

    “저, 전하. 황송하옵니다. 신이 아둔하여 일을 그르쳤으니 전하께서 얻은 상심은 감히 신의 입밖으로 꺼내서도 아니 되는 것이었는데, 신이 미욱하고 불민하여 미처 헤아리지 못······.”

    “그 입 다물라.”

    “···”

    “내 너의 몸을 육시내고 너의 머리는 저자 한복판에 효수하고, 또한 너의 살점을 하나, 하나 도려내 젓갈을 담가 너의 자손에게 임금이 하사하는 젓갈이라 하여 먹이고 싶은 심정을, 너는 아느냐?”

    “전하······.”

    “사람은 도리를 알아야 한다. 너는 이미 선대왕 시절에 도리를 저버렸다. 하물며 이번엔 진성을 통해 도리를 저버렸으니, 내 너를 살려둘 까닭이 없다. 아니 그러하냐?”

    “하, 하오나 신은······.”

    필상이 안간힘을 쓰며 변명을 이어나가려 했지만, 미처 말을 꺼내기도 전에 융은 어좌로 걸어 올라왔다.

    “경들은 부원군을 보라.”

    “···”

    “나라의 기강이 무너졌음이 부원군을 통해 확연히 알 수 있다. 애통하다. 그래서, 참으로 비통하다. 하지만 내 어찌 그를 벌할 수 있겠는가?”

    “···?”

    필상을 필두로 중신들 모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개중에 필상의 당혹스러움이 가장 컸다.

    방금 전까지 젓갈 운운하던 주상이 아니시던가?

    한데 벌하지 않으시겠다니··· 임금이 재고를 한 까닭인가?

    그렇다면 임금의 은혜에 눈물이 나오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내 아까 말한대로 부원군은 공과가 극명한 사람이다. 하지만 마땅히 죽을 죄를 지었다고는 볼 수 없겠다. 진성을 사주하여 상소를 올리게 한 것은 참으로 화가 나는 일이나, 오죽하면 정사에 관련이 없어야 할 진성을 통해 상소를 올렸겠는가? 이는 과인이 반성할 일이다.”

    “크흑. 전하······.”

    “경들은 들으라.”

    “···”

    “내 오늘 부원군의 일을 겪으니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여, 예정된 일정을 제외하고는 더 이상 친국을 열지 않을 것이다. 다만 이자건과 민휘 등은 오늘의 일이 있기 전에 친국을 받은 위인들이니, 한 사람도 빠짐없이 벌하겠다. 부원군.”

    “크흐흑. 예, 전하.”

    “그래도 되겠는가?”

    “여부가 있겠나이까. 전하의 뜻대로 하소서.”

    “민휘는 온성에, 이자건은 갑산에 부처하고 길일을 따라 사사함이 좋겠다. 그리고 부원군.”

    눈물이 범벅이 된 윤필상이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의문점이 한가득이지만, 이번 일을 없던 일 해주겠다는 말은 분명해보이셨다.

    그로서는 구사일생이 아닐 수 없는 일.

    눈물로 범벅이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자칫 잘못했다면 일족 전체에 화가 미칠 뻔 하지 않았던가.

    “앞으로 직언할 게 있으면 두려워말고 직접 올리라.”

    “서, 성은이 망극하옵고 황송하옵고······.”

    “무슨 의미인지는 알겠으니 그만하라. 금부는 들으라.”

    “하명하시옵소서.”

    “죄인의 허물을 과인이 직접 덮도록 하겠으니 죄인은 절차를 밞아 방면하라.”

    “그리하겠나이다.”

    금부에 명을 전달한 융은 사정전을 빠져나갔다.

    여전히 부복해 흐느끼는 필상과 중신들만 남은 사정전.

    필상과 중신들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

    며칠이 지났다.

    중신들은 임금이 파평부원군의 일을 책잡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기우에 불과했다.

    조정은 언제 살떨리는 친국이 벌어지고, 언제 사람이 죽어 나갔냐는 듯 금방 평온해졌다.

    임금이 회묘의 일로 의도적인 숙청을 벌이는 게 아닌가 의심하던 사람들의 의심도 점점 사그라졌다.

    사실이 그랬다.

    회묘와 관계된 일로 대대적인 숙청을 벌일 것이라면, 윤필상의 일은 좋은 본보기가 됐을 테니까.

    평온을 되찾은 조정이었지만, 바로 얼마 전까지 재상들을 눈하나 깜짝없이 사사시키고 유배 보낸 임금의 모습을 목격했던 중신들은 그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는 없었다.

    “하면 어찌 전파 시키는 게 좋겠소?”

    편전.

    아직도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것 같은 편전에서 융이 운을 뗐다.

    사안은 다름이 아니라 종두법에 관한 것이었다.

    “일단은 팔도 목장 전체를 수소문하는 것이 우선일 듯 하옵고, 대군의 말씀처럼 목장에 천예로 종사하는 자들이 두창에 앓은 일이 있는지 알아봄이 우선일 듯 하옵니다.”

    “흐음. 하면 기호(경기도)부터 알아보면 되겠소.”

    “그리하소서.”

    “하면 두창 걸린 소를 소집시킨 뒤에 종두는 어느 기관에서 맡도록 하는 것이 좋겠소이까?”

    “혜민서(惠民署)에서 전지를 따르도록 함이 어떻겠는지요?”

    “혜민서라··· 과연 그렇겠소.”

    혜민서가 도성을 포함한 경기도 일대의 백성 모두를 상대할 규모가 아닌 것이 걱정되긴 하지만, 일단 백성을 시료(무료 진료)하는 기관이니 더불어서 왕의 자애로움과 백성을 가여이 여기는 마음도 알릴 수 있을 것이었다.

    규모야 전의감과 내의원에서 보충 받아 일시적으로 늘려도 되는 문제니까.

    이후 여러 사안들이 논의 됐다.

    친국에 관한 사안은 일절 언급되지도 않았다.

    창녕대군이 쾌차한 지 퍽 오래됐고, 창녕을 살뜰히 보필한 도승지 김감에게 어떤 물품을 하사할지에 대한 논의.

    삼포(三浦) 왜인(倭人)에게 감히 집을 판 자들을 어찌 벌할지에 대한 논의.

    팔도의 관찰사들이 계문(啓聞, 임금께 글로 알리던 일)해 온 속현 수령들의 포상 여부에 대한 논의.

    말그대로 평범한(?) 정사에 불과했다.

    이 평범한 정사가 차츰 불길한 징조를 보인 건 임금이 한 사람의 이름을 거론하면서였다.

    “지금 친국으로 공석이 된 자리가 모두 몇 곳이오?”

    “서른 아홉 곳이옵니다.”

    “가장 시급한 곳은?”

    “사간원과 사헌부인줄로 아뢰옵나이다.”

    “그 다음은?”

    “예조판서의 자리가 공석이 된 지 오래되었나이다.”

    “예조판서 자리는 하루라도 비워서는 안 되는 막중한 자리가 아니오?”

    “그러하옵니다.”

    “내 마땅한 인물이 생각나는데······.”

    “누구이옵니까?”

    “숭재의 아비 임사홍이 어떻겠소?”

    중신들의 표정이 일그러질대로 일그러졌다.

    “하, 하오나······.”

    “안 된다는 것이오?”

    임사홍.

    조정에 있으면서 숱한 분란과 물의를 일으킨 장본이었다.

    선대왕 시절에는 도승지 자리에 있으면서 임금에게 온갖 아첨을 떨어댔고, 붕당까지 이루면서 중신을 음해한 자였다.

    그뿐인가.

    역시, 선대왕 시절 황사가 크게 발생한 일로 왕에게 근신을 부탁할 때 오로지 저 혼자 그깟 황사 때문에 왕에게 근신하라는 게 말이나 되냐며 왕의 환심을 사려 노력한 간신중의 간신이었다.

    그런 간신이 또 폐비 윤씨 때는 중전을 폐출함은 부당한 일이라 고상까지 떨어댔었다.

    세월이 흘러서 그 아들 숭재가 의빈이 되어 결국 유배에서 풀려났고 금상이 서용(죄지은 사람을 복직시킴)하라는 령까지 내렸지만, 대간들의 격렬한 반대로 서용은 하되 한직에 머무는 것으로 그쳤던 것이다.

    그게 불과 올초에 있었던 일이었고, 평상시였다면 중신들 모두 반대를 표명했을 터였다.

    20년 넘도록 유배 다녀온 간신을 조정에 들인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하지만······.

    “아, 생각을 해보니 금부도사에게 아직 연락이 없다. 세좌는 사사가 된 것인가, 아니면 도망한 것인가?”

    융이 김감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길이 험한데다 폭우가 쏟아져 지체되고 있다고 하나이다.”

    “날이 얼마나 흘렀는데··· 불경을 크게 저지른 이세좌야 말로 필히 사사를 해야 한다. 그를 사사시키지 않으면 누굴 사사시킨단 말이냐? 속히 사람을 금부도사 안처직(安處直)에게 보내 길을 서두르라 전하라.”

    “그리 이르겠나이다.”

    치떨리는 정국이 바로 엊그제까지 진행됐었다.

    서슬퍼런 임금과, 줄줄이 끌려와 고신 당하는 죄인들의 비명.

    그들의 울부짖음이 아직도 귓가에 선명한 중신들로선, 반대를 표명하고 싶어도 표명할 수가 없었다.

    중신들이 가타부타 말없이 난감한 표정만 짓고 있자, 융은 작게 웃으며 말했다.

    “미안하오. 내 갑자기 세좌가 떠올라서··· 그래, 사홍을 제수하는 건 불가하단 거요?”

    어느 순간 싸늘해진 융의 음성에 흠칫 몸을 떤 중신들은 저희들끼리 눈치를 봤다.

    “그, 그럴 리가 있겠사옵니까. 전하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하, 좋소. 좋아.”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