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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51화 (51/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51화>

    사연있는 남자(?)

    ***

    “허.”

    “···?”

    나는 나도 모르게 콧방귀를 뀌고 말았다.

    역시, 내 할아버지 뻘.

    아니, 이 시대 기준으로는 거즘 증조 할아버지 뻘에 가까운 분 앞에서 콧방귀라니··· 조선이 아니라 대한민국에서도 지팡이 안 맞으면 다행인 일이지만 의도한 건 아니었다.

    차라리 어처구니가 없어 터져 나온 실소에 가까웠다.

    누차 역알못 드립을 치지만, 난 진짜 역알못이다.

    역사를 알지도 못 했고, 사실 흥미 있는 학문도 아니었다.

    차라리 철학에 더 흥미가 갔었지.

    그런 나라고 돌아가는 추이를 전혀 이해 못 할 백치는 아니었다.

    사회 생활하면서 눈치가 없다는 말도 숱하게 들었고 직설적이라서 싸가지가 없다는 말도 엄청 많이 들었지만, 그건 내 꼴리는 대로(?) 사회 생활을 해서 그랬던 거다.

    싫다면 싫다.

    좋다면 좋다.

    그건 내 소관 아니다.

    딱 잘라서 말하니 눈치가 없다, 저놈은 싸가지가 없다는 말을 듣게 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정말로 눈치가 없는 건 아니다.

    말했다시피 역알못이라 해도 돌아가는 추이를 모를 정도의 백치는 아니다.

    왜냐고?

    친국이 좀 화제여야지.

    길을 가다보면 다들 수군거린다.

    화두는 단연 친국이었다.

    사바세계와 연을 끊은 절간 스님들도 친국에 관한 말을 나눌 정도라니, 이 친국이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는지는 알만한 것이었다.

    그런데 나더러 상소를 대신 올려달란다.

    그래, 깔끔하게 인정한다.

    처음엔 무슨 의미인지 정말 몰랐다.

    그래서 누차 되물었고, 직접적으로 ‘내가 대신 상소를 올려 친국을 중단해달라는 거죠?’라고 묻기까지 했다.

    그리고 들려온 대답은 Yes.

    연일 화제가 되고 있는 친국 덕분에 나도 친국이라는 것에 좀 잘 알게 됐다.

    친국은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일이기도 했다.

    왕의 권위가 뭔가?

    당장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대통령의 권위가 손상되면 큰 타격을 받는데 하물며 왕조 국가에서 왕의 권위란 절대적인 것에 가까웠다.

    감히 훼손 돼서도 안 되고, 훼손을 시켜도 안 되는 그것.

    그런데 그걸 본인들은 차마 못 하겠으니 핏줄인 너가 대신좀 해달라.

    왕의 권위를 훼손시키는 일이지만, 설마 혈육인 널 친국장에 끌고 가시기라도 하겠느냐.

    난 꼭 그렇게 들렸다.

    “저기요, 부원군 대감.”

    “예.”

    “그렇게 말씀하시는 저의가 뭡니까?”

    연배로 보나 예법으로 보나.

    예를 갖추는 게 맞기에 지금까지 예를 갖췄던 나지만, 나에게 적의에 가까운 부탁을 한 사람에게 끝까지 예의를 갖출 필요는 없었다.

    전생에서는 이렇게 행동해서 불이익도 수차례 받았지만 뭐 어쩌겠나.

    사람 성격 어디 안 가는데.

    “저, 저의라니··· 당치도 않사옵니다. 무슨 음흉한 계책을 숨기고서 말씀 아뢨겠나이까? 소인은 그저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었사옵니다.”

    “나라를 위하는 마음.”

    “예.”

    “제가 말입니다.”

    “말씀하소서.”

    “이 선비에 관해 배울 때 말이예요? 그러니까, 아주 옛날에 선비에 관해 배울 때요.”

    “아, 예.”

    “꼿꼿하다고 배웠거든요. 소신과 신념을 지킬 줄 아는 사람들이 바로 선비들이라구요. 이게 선비의 참뜻 맞습니까?”

    “그렇지요.”

    “그런데 직언을 남의 손 빌려서 하면 그게 소신과 신념을 지키는 선비입니까, 시정잡배입니까?”

    내가 철학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닐 것이다.

    모든 사람은 신념과 소신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을 존경한다.

    역사에 이름난 위인들을 왜 존경하겠나?

    소신과 신념대로 외적과 맞서 싸우고, 독재자와 맞서 싸웠기 때문 아니겠는가?

    부원군 할아버지의 말은 내가 아는 선비와는 너무 다른 모습이다.

    이것도 환상이라면 환상이겠지만, 선비들은 신념과 소신을 ‘나름’ 지킬 줄 안다고 생각했던 나에겐 이루 말할 수 없는 실망감이었다.

    “그것이 아니오라··· 대감. 부디 상황을 냉철히 통찰해주시옵소서. 남의 손 빌리는 직언이 아니옵니다. 조정의 제신(諸臣)들은 구품관마저 친국에 벌벌 떨고 있으니, 어찌 나라가 제대로 돌아가겠사옵니까?”

    “후··· 알겠습니다. 상소 올려드리죠.”

    “참말이시옵니까?”

    “참말이고 말구요.”

    부원군 할아버지께서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대감의 가상한 용기는 필시 만대에 걸쳐 널리 칭송될 것이옵니다. 감읍하나이다.”

    그거야 두고 볼 일이다.

    ***

    부원군 씨가 돌아가고, 부원군 씨가 바라마지 않던 상소란 걸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써봤다.

    장장 한시진에 걸쳐 작성한 그 상소는 곧바로 이 집 행랑 식구들 손에 딸려 보냈다.

    배달 사고가 나지 않는 한, 창녕대군이 쾌차하고 난 뒤부터 승정원에 등청을 하게 되신 도승지 아저씨(?)께도 잘 전달이 될 것이었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사랑방을 나서는데, 덕산이가 멀리서 허둥지둥 뛰어온다.

    “이, 일어났습니다요! 일어 났어요!”

    자연스럽게 내 하초를 내려다봤다.

    “일어나긴 뭐가 일어나. 5개월째 겨울잠 자고 있구만.”

    생각해보니 마지막 잠자리를 언제 가졌더라?

    조선에 온 게 벌써 5개월 전이니 반 년은 족히 됐겠다.

    심지어 이 몸으로는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

    “예?”

    “아니다. 그래서 뭐가 일어난건데?”

    “아까 그 거렁뱅이 말입니다요. 방금 정신이 들었습니다요.”

    “그래? 다행이네.”

    진심으로 다행이었다.

    생색내자는 게 아니라, 지나가는 똥개 생명도 귀중한 법이다. 하물며 사람 생명은 암만 신분 사회라 해도 고하에 관계없이 더 귀중한 법이고.

    몰골이 꼭 떠돌이 같은지라 죄 짓고 도망치고 있는 사람 살려논 걸 수도 있지만, 음.

    그건 그때가서 생각할 문제니까.

    “부엌에 가서 미음좀 가져올래? 난 바로 가볼테니까.”

    “알겠습니다요!”

    덕산이 부엌으로 헐레벌떡 뛰어갔다.

    저러다 넘어지면 코 깨지는데··· 헐레벌떡 뛰어가는 덕산에 쯧쯧 혀를 찬 나는 남자가 있는 방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남자가 머물고 있는 방은 행랑이었다.

    “이분이 댁의 생명의 은인이라고 할 수 있소. 이분이 안 거두어주셨다면 객사를 면치 못 했을 거요.”

    가울 할아버지가 낯뜨겁게 날 소개하자, 방안에 누워있던 사내가 조심스럽게 일어나 큰 절을 올렸다.

    “감읍하옵니다. 큰 빚을 졌사옵니다.”

    “한 것도 없는데 절까지··· 그래, 몸은 괜찮아요?”

    꼬로록-.

    “···”

    마침 덕산이가 소반을 들고 행랑으로 들어왔다.

    “미음은?”

    “끓이는데 오래 걸릴 것 같다 하여 급하게 누룽지라도 긁어 왔습니다요.”

    “잘 했다.”

    남자를 쳐다보자, 남자의 시선이 누룽지에 머물러있다.

    “뭐, 먹으라고 갖고 온 거니 들어도 됩······.”

    눈치 보지 말고 먹어도 된다는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남자가 허겁지겁 누룽지를 먹기 시작했다.

    얼마나 굶었으면 저렇게 허겁지겁 먹을 정도일까, 안쓰러울 정도였다.

    “덕산아, 가서 찬 밥 있으면 그것도 좀 가져오거라.”

    “예.”

    잠시 후.

    “가, 감사합니다······.”

    덕산이가 가져온 찬 밥 마저 걸신 들린 듯 입에 꾸역꾸역 집어넣던 남자가 마침내 바닥을 보인 그릇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민망한지 얼굴은 빨갛게 달아오른 채였다.

    “며칠을 내리 굶었던지라 저도 모르게······.”

    “괜찮습니다. 사흘 굶으면 고상하신 선비님도 여염집 담장 넘는다는 소리도 있는데요, 뭘.”

    장곤 선생님께 배운 말중 하나다.

    그만큼 굶주림과의 싸움이 쉽지 않다는 뜻으로, 위정자들이 어떻게 정치를 해야할지에 대해 말해주면서 알려주신 말이기도 하다.

    “근데 어쩌다가···?”

    나는 되도록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실 굶주림과 허기가 일상인 시대라곤 하지만, 한양 한복판에, 그것도 남촌에서 아사 직전인 사람을 보기란 쉽지가 않다.

    고금을 막론하고 부촌은 괜히 부촌이 아니니까.

    무슨 사정이 있나 싶어 물어본 것이었다.

    일전에 민택 그놈같은 악덕 지주에게 착취(?) 당하거나 핍박 받는 사람일수도 있으니까.

    오지랖이라면 오지랖이겠지만, 꼴을 보면 안 도와줄수가 없을 것 같달까.

    “그게······.”

    머잖아 남자가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남자가 털어놓은 자초지종은 이 시대 민초라면 새삼스럽지도 않을 사연이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퍽 새삼스러운 사연이었다.

    ***

    편전.

    친국을 내리 진행하다 보니 오랜만에 정사를 돌보는 기분이었다.

    실상은 어제도 정사를 돌봤고, 그제도 정사를 돌봤으니 그리 오랜만의 일도 아닌데 말이다.

    어쩌면 난생처음이라면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정책을 편전에서 발했기 때문도 몰랐다.

    이전에는 중신들이 “XXX가 괜찮겠사옵니다.”하면 검토를 해보다가 “그리 하라.” 윤허하는 게 전부였고, 마음에 드는 정책을 발한다 한들 중신들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었다.

    사정이 그러한데, 정책을 거세게 밀어붙이는 건 언감생심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경들은 어찌 생각하시오? 과인은 퍽 괜찮은 것 같은데.”

    방글방글.

    입가에 미소를 한가득 머금은 융의 물음에도 중신들은 떨떠름한 표정만 지을 뿐, 감히 반대를 표명하진 않았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그 효과는 입증이 된 것이온지······.”

    기껏 한다는 반발은 이게 전부였다.

    이 정도는,

    “경은 과인이 불민한 군주 같은가? 입증이 됐으니 하는 말 아니겠는가?”

    움찔.

    “하, 하면 망설일 필요가 없겠나이다.”

    가뿐하다.

    그래, 이것이다.

    이게 그가 바라마지 않던 왕권이었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권한.

    그래서 종국에는 그 권한으로 하여금 나라를 이롭게 하는 것.

    그리고 이번에 그가 발한 정책은 나라를 이롭게 하는 일환중 하나였다.

    일전에 민휘가 진성을 탄핵하려 했던 적이 있었다.

    양로연 핑계를 대며 보류시켰고, 이후 진성을 불러 자초지종을 캐물었다.

    종두법.

    두신을 막을 수 있는 예방법이었다.

    융은 이걸 전국적으로 시행하고자 했다.

    지금 당장은 팔도 전체의 백성에게 혜택이 돌아가게끔 할 순 없겠지만, 기호지방부터 시작한다면 그가 제위에 앉아 있는 동안에는 팔도 전체 백성에게 혜택이 돌아갈 수 있게끔 할 수 있을 것이었다.

    “하면 그 일은 진성대군을 따로 불러 논의토록 하는 걸로 알겠고··· 이자건이 말인데.”

    “···!”

    “금부도사에게 듣자니 죄를 실토치 않는다지?”

    “그, 그게······.”

    “고신이 너무 약했던 것 아닌가?”

    “그, 그럴 리가 있겠사옵니까.”

    “이전에 자건이 편전에서 본인의 죄로 어지를 받들지 못 한 죄, 민택의 일을 아뢰지 못한 죄, 이세좌의 불경을 막지 못 한 죄. 세가지를 꼽았지만 어찌 이 세 가지 뿐이겠는가.”

    “···”

    “내 이자건이의 상판을 보며 고신하고 싶진 않으니 도사는 추국함에 있어 압슬을 포함하도록 하라.”

    “부, 분부 받들겠나이다.”

    “하면 이만 파하도록 하겠소.”

    조회를 파하려던 그 순간이었다.

    도승지 김감이 허둥지둥 들어왔다.

    조심스레 편전에서 물러나던 중신들도 바짝 얼어서는 도승지에 이목을 집중했다.

    “어인 일인가?”

    “사, 상소가 올라왔사온데······.”

    “급한 것인가? 따로 분류해두라. 내 밤에 읽어보겠다.”

    “그것이··· 사체(事體, 사리와 체면)를 따질 것이 아니오라 지금 당장 보셔야 할 듯 하여······.”

    “음. 가져오라.”

    품안에 들고 왔는지, 김감이 소매에서 예의 상소를 꺼내 건넸다.

    그렇게 한참 후.

    아무 표정 변화 없이 상소를 읽어나가던 융은 상소를 상선에게 건넸다.

    “필상은 어디에 있다던가?”

    “자택에 있는 줄로 아옵니다.”

    “필상을 들이라.”

    “패초를 보내오리까?”

    융은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잡아 들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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