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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49화 (49/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49화>

    아이들과 친해지려면 유치해져라

    ***

    “이젠 대사간마저 들어가게 생겼습니다.”

    “이거, 무오년의 일이 재발 하는 거 아닙니까?”

    “무오년은 차라리 약과지요. 벌써 엮여 들어간 자들만 스물이 넘습니다, 스물이.”

    윤필상과 삼의정들은 퇴궐하다 말고 사정문 행랑 처마 밑에서 걱정을 토로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들 모두의 머릿 속에는 서슬 퍼런 임금의 명이 아직도 선명하게 맴돌고 있는 것 같았다.

    “흐음······.”

    삼의정의 걱정을 뒤로한 채 필상은 침음을 삼켰다.

    그 또한 걱정이 되는 건 매한가지였다.

    “부원군 대감.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영의정 성준이 필상을 돌아보며 묻자, 자연스럽게 극균과 유순의 시선도 필상에게 집중됐다.

    그들의 기대 어린 눈빛에 불편한 마음이 든 필상은 짐짓 불쾌한 표정을 짓다가 입을 열었다.

    “우리가 전하를 잘 못 보필 한 것이오. 그간 잘 뫼시려고 했건만··· 이 노구(老軀)의 잘못이니 낸들 이러자, 저러자 떠들 수 있겠소?”

    “하오나 대감. 잘잘못을 논하기 보단 서둘러 대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방금 편전에서 전하께서 하신 말씀을 듣지 않으셨습니까?”

    극균의 말에 모두가 탄식을 내뱉었다.

    대사간 이자건의 처벌 수위를 논의하라.

    이게 오늘 편전에서 떨어진 명이었다.

    이전처럼 얼렁뚱땅 넘어 갈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뿐입니까? 금부도사는 벌써 사약을 들고 출발했습니다.”

    극균은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세좌에 대한 사사는 이르면 이틀 안에 이뤄질 터였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웃고 떠들며, 나라 걱정을 하던 이세좌에게 사약이 내려졌다니 아직도 믿기지 않는 것이 사실이지만, 믿지 않을 도리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나선들 어찌 전하를 말릴 수 있겠소?”

    “안 말리면 줄초상임을 모르십니까?”

    “어찌 모르겠소.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서 내가 나서서 읍소를 하겠소? 아니면 나라의 온선비들을 모아 대궐 앞에 진을 치게 만들고 읍소를 시키겠소? 설령 시킨다 한들 전하께서 일을 관두시겠소?”

    “흐음. 하면 어찌하자는 말씀이십니까?”

    잠시 멀이 없던 필상은 골똘히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짓다가 입을 열었다.

    “곧 회묘(폐비 윤씨)의 기일 아니오?”

    “그러고 보니 그렇군요. 조정의 일이 하도 급박하게 돌아가는지라 잊고 있었습니다. 이맘때면 늘 전하께서도 챙기셨는데, 이번엔 언급도 없으셨구요.”

    “음, 듣고보니 이번엔 일언반구 말씀도 없으시긴 했구려.”

    고개를 갸웃거리는 극균에 표정을 굳힌 필상이 말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오. 내 저번에 옥중의 세좌를 보니 세좌가 겁에 질린 표정으로 말하길 ‘임금께서 회묘를 언급하셔 놀란 마음이 아직도 진정이 되지 않는다’ 하였소.”

    “그런 일이 있었단 말입니까?”

    “세좌가 누구요? 회묘 생전에 사약을 갖다 바친 이가 아니오. 그 말을 듣고 금방 초연해졌으니 아마 본인이 곧 사사 됨을 알고서 그리 초연히 행동한 게 아닌가 싶소.”

    “그렇다면 정말 큰 일 아닙니까? 전하께서 우릴 불구대천으로 여기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내 회묘를 언급한 게 아니오. 마침 곧 회묘의 기일이기도 하니 릉으로 격상시키자 아뢰는 게 어떻겠소?”

    “릉으로 말입니까?”

    필상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민택과 대사헌의 일을 본다면 전하께서 친국을 여심은 회묘와 관계가 없으나, 세좌를 불경죄로 트집 잡는 것은 어찌 회묘에 관계된 바가 없고서 가능한 것이었겠소? 전하께서 정말로 회묘에 관련된 신하들을 불구대천으로 여기고 있다면, 조정의 신하 절반이 사사 될 게 아니겠소.”

    “과연 그렇겠습니다······.”

    “그러니 전하께 회묘의 일을 급히 아뢰어 운을 떠보자는 거요. 전하께선 일찍이 남을 이해하는 마음이 있으셨고, 또한 남의 입장에서 헤아리는 버릇이 있는 분이셨으니 우리가 그렇게 까지 아뢴다면 어찌 친국을 이어 나가시겠소.”

    “하면 어찌 아뢰는 게 좋겠습니까? 우리 삼의정들이 아뢰기에는 예전의 일도 있고, 전하께서 불순히 여겨 반려 하실 수도 있을 텐데요.”

    극균의 말에 우의정 유순이 답했다.

    “조지서(趙之瑞)에게 상소로 전달케 함은 어떻겠습니까?”

    “지서?”

    “지서는 주상의 스승이기도 했던 인물이니 더 면이 서는 일 아니겠습니까?”

    “역효과가 날 거요. 지서는 전하께서 탐탁지 않아 하는 대표적인 인물이 아니오?”

    필상의 말에 유순은 금방 고개를 주억거렸다.

    생각해보면 그랬다.

    임금의 스승이긴 하지만, 임금이 못 잡아 먹어서 안달인 인물이기도 했다.

    더군다나 지서 또한 폐비의 일에 관련된 바가 있기 때문에 부원군의 말대로 역효과가 날 가능성이 컸다.

    “하면 누가 좋겠습니까?”

    고심하던 필상.

    곧 그의 머릿속엔 적절한 인물 하나가 떠올랐다.

    “지금 당장 북촌으로 좀 가십시다들.”

    ***

    “반칙이다, 반칙!”

    나는 손을 휘저으며 반칙을 선언(?) 했다.

    휘슬이 있었다면 아마 불지 않았을까?

    “또요?”

    새초롬히 되묻는 이 아이는 다름 아닌 창녕대군이다.

    천연두로 병석에 누워있던 창녕대군이 완쾌 된 건 사흘 전이었다.

    창녕대군이 완쾌 됐다는 말에 나는 숭재 씨와 함께 김감의 저택을 찾았고, 난생처음으로 조카를 보게 되었다.

    생물학적으론 혈연 관계지만, 사실 이 몸뚱아리의 기억은 하나도 없는지라 남남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한데 계속 보고 있노라면 뭔가 마음 한구석이 푸근해지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이를 원래 좋아해서 그럴지도 몰랐고, 여태 가족 없이 혈혈단신으로 살아왔다가 이 몸에 스며들면서 ‘조카’라는 존재가 생겼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문제가 있다면 창녕대군이 날 어려워한다는 것이었다.

    어린 아이일지라도 조선의 예법에 익숙하다 보니 당연한 걸 테지만, 나는 괜히 치기 어린 서운함이 생겼고 친해지기 위해 골몰했다.

    뭘할까 고민했고 금방 놀이가 떠올랐다.

    아이들과 친해지기 위해선 그 눈높이에 맞춰야 한다.

    함께 유치해져야 한달까?

    나도 덩달아 유치해지는(?) 그 노력이 통해서였을까.

    처음에 본 창녕대군은 분명 소심했었다.

    하지만 함께하면 할수록 점점 활발해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난 왠지 그게 더 슬픈 느낌이었다.

    임금의 적자로서 체통을 지켜야 한다는 말을 듣고 자랐을 테니, 그러기 위해서라도 아이의 본색을 숨기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었거든.

    내 짐작이 틀린 거라면 민망하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지금껏 보여준 창녕대군의 모습이 내 추측에 무게를 실어줬기에 안타까운 마음에서라도 더 열성적(?)으로 놀아주게 되었다.

    뭐, 귀엽기도 하고.

    “축구 할 때 손은 쓰면 안 된다니까?”

    지금은 창녕대군과 축구를 하고 있었다.

    마땅히 할 만한 놀이를 생각하다가, 투호를 했는데 내가 지겹지 뭔가.

    그래서 새로운 놀이를 제안했고, 그게 바로 축구였다.

    정확히 말하면 동네 축구에 가까웠지만.

    “자꾸 손이 가는 걸요.”

    긁적긁적.

    시무룩해져서는, 제 머리를 긁적거리는 창녕에 절로 실소가 새어나왔다.

    피식 웃은 나는 돼지 오줌보를 통해 임시적으로 만든 축구공을 약하게 걷어찼다.

    “덕산아 얼마나 됐냐?”

    “반시진은 됐습지요?”

    얼굴에 난 땀을 소매로 훔쳤다.

    얼마 안 놀아준 것 같은데 벌써 1시간이나 지났다니.

    “숙부님. 축구는 끝났어요?”

    “벌써 반시진이나 했잖아. 날도 더운데 밖에서 그렇게 놀면 쓰러진다?”

    축구는 그만하겠다는 말에 창녕이 금세 시무룩해진 표정으로 저 멀리 굴러간 오줌보 축구공을 힐끗거렸다.

    “왜, 더하고 싶어?”

    “네!”

    아이들 체력은 성인 어른도 못 당한다더니 그 말이 딱이었다.

    어찌나 왕성한지, 여태 대군으로서의 체통을 어떻게 지켰나 모르겠다.

    내 체력이 방전 상태인 건 맞지만 그렇다고 안 놀아주자기엔, 저 간절한 눈빛을 외면하기가 어렵다.

    “축구는 이 숙부가 지쳐서 안 되겠고··· 음.”

    뭘할까 고민하자 창녕이 알아서 재잘재잘 떠든다.

    “딱지치기? 아니, 아니. 비석치기··· 음, 아니다. 땅 따먹기!”

    “땅 따먹기?”

    내가 되묻자 잠시 고민하던 창녕이 고개를 세차게 가로젓는다.

    “아니,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지난 사흘간 제법 많은 게임을 알려줬더랬다.

    개중에 창녕이 제일 좋아하는 건 숨바꼭질과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였다.

    점심 무렵에 한 걸 또 하자는 걸 보니, 질리지 않을 정도로 재밌는 모양이다.

    ‘어쩌면 지금까지 이렇게 놀아본 적이 없어서 그럴지도 모르겠고.’

    괜히 입맛이 썼다.

    사실 충격적이랄 것도 없지만, 나름의 충격을 먹었던 게 대군이 놀이를 하나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투호나 연날리기 정도는 알지만, 그 외 잡다한 게임은 모르고 있었다.

    대군이란 신분 때문에 아이들과도 어울리기 힘들어서 그랬을 터였다.

    자고로 아이는 아이답게 놀아야 쑥쑥 잘 크는 법인데.

    “그래, 하자.”

    으차.

    몸을 일으키고 한 켠에 쭈구려앉아 쉬고 있는 덕산이를 돌아봤다.

    이제 덕산이는 척이면 탁인 수준에 이르렀다.

    덕산이가 금방 김감 아저씨네 어린 노비들을 모아왔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둘이서 할 순 없잖아?

    덕산이가 데려온 아이들은 일구, 달복, 손우, 천녀.

    모두 네 명이었다.

    지난 사흘간 창녕대군과 친해진 아이들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아무래도 신분이 신분인지라 창녕대군과 날 어렵게 대하던 아이들이었지만, 시간이 약이었다.

    뭐, 20세기에 태어난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만난 생면 부지의 아이들과 금방 친해지고, 또 친해진 아이의 집에 가서, “XX아 놀자~” 부를 만큼 가까워진 건 아니라지만 그래도 이게 어딘가.

    아, 처음에는 노비들과 창녕이 뛰어논다는 소리에 식겁하며 달려온 김감 아저씨가 이러면 안 된다고 말하기도 했었지만,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고 뛰어노는 창녕을 보곤 금방 뒤돌아간 적도 있었다.

    그만큼 애들이 뛰어노는 모습이 정겨워보였다는 뜻이겠지.

    “술래는 숙부님이 해주세요!”

    난 해탈한 스님처럼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그래.”

    곧바로 금강송 나무로 만든 기둥으로 털레털레 걸어갔다.

    아이들은 시시덕 떠들면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준비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뒤를 돌아보니 모두가 얼음이다.

    다시 고개를 돌리고,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쓰윽.

    “달복이 움직였네?”

    “아, 안 움직였습니다요.”

    “에이, 움직였잖아? 자.”

    새끼 손가락을 내밀자 시무룩해진 달복이가 털레털레 걸어와 새끼 손가락에 손을 걸었다.

    그렇게 다시 구호를 외우고를 반복했다.

    머잖아 창녕대군이 나와 달복이의 손을 끊고 도망가자, 잡으러도 가고, 다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시작하고.

    모르긴 몰라도 한식경은 게임을 이어나가던 그때였다.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무시하고 게임을 이어나갔다.

    내 집안 일도 아니고, 괜히 남의 집 일에 끼어들었다가 오지랖 부리는 모양새니까.

    그런데.

    “마, 마마!”

    이 집의 수노로 있는 가울 할아버지가 헐레벌떡 뛰어오신다.

    “무슨 일 있어요?”

    “송구하오나 가, 가, 같이좀······.”

    “무슨 일인데요?”

    “집 밖에 시체가 있는 것 같습니다요.”

    “예? 시체요?”

    깜짝 놀라 되묻자 가울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거린다.

    오늘은 좀 유별난 날이었다.

    김감 아저씨는 입궐을 했고, 사모님 되시는 분은 출타를 했다.

    한마디로, 이 집에 상황을 유도리 있게 처리 할 수 있는 어른(?)은 나밖에 없다는 뜻.

    가울 할아버지도 그래서 나한테 오신 것 같았다.

    “잠깐 너희들끼리 하고 있어.”

    달복이에게 술래를 맡기고 떨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행랑으로 향했다.

    향하면 향할수록 소란은 커졌다.

    노비들은 저희들끼리 모여 쑥떡거리고 있다가, 내가 나타나자 일제히 고개를 조아렸다.

    “어딥니까?”

    가울 할아버지가 손가락을 가리킨다.

    그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꿈틀!

    가울 할아버지가 시체라던 ‘그것’이 꿈틀 움직였다.

    죽은 건 아닌 것 같았다.

    일단 사람부터 살리고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안으로 옮기세요, 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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