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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48화 (48/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48화>

    잘못했으면 벌 받아야지?

    ***

    김경조가 그 날의 일을 털어놓은지 한참 후.

    어좌에서 메마른 음성이 흘러나왔다.

    “백성이 하소연 함에도 추관(형조)에선 어찌 백성들 끼리의 작은 다툼으로 치부 할 수 있었단 말인가? 설령 다툼으로 치부한다손 치더라도 피해자를 매질로 돌려보내는 율(律)이 대관절 어느 나라의 율인가?”

    “···”

    “과연 이는 추관들이 임금을 임금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빚어진 일이라고 밖에 해석 할 수가 없겠다. 죄인에게 묻는다.”

    “···하문하시옵소서.”

    “너는 모든 걸 자복하겠노라 말한 바 있다. 혹 민휘의 일가가 보복할까 두려워 일을 숨긴 적은 없었더냐?”

    은근하게 묻는 임금에 김경조의 눈알이 좌우로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실은······.”

    “말해보라.”

    “신이 일을 당한 건 홍치9년이었사옵니다. 그 이후 여러 관직을 전전하였으니 형조의 일을 알 까닭은 없겠습니다만, 홍치 11년에 있었던 석발의 일을 우연찮게 들은 적이 있었사옵니다.”

    “어떤 내용이었느냐?”

    “민택의 집에 소작농으로 있는 이가 형조에 잡혀 들어왔는데 반가의 자손을 해하려 했으니 매를 쳤다는 내용이었나이다. 다만······.”

    “다만?”

    “다만, ‘그 반가의 자손이 민휘의 일족이니 함부로 잡아 들였다가는 그 붓에 우리의 이름이 올라갈지도 모르겠다.’라는 첨언을 덧붙여서 떠들었는데 그 반가의 자손이란 정황상 민택이니 당시 형조에서 민휘의 세력을 두려워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옵고, 또한 의아한 일도 하나 있었사온데······.”

    “의아한 일?”

    융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김경조는 피칠갑을 한 동료(?) 죄인들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죄인들의 눈치는 보지 말라. 바른대로만 고하라.”

    “오래된 일이라 기억이 온전치는 못 하나 홍치 11년에 신은 직제학으로 있었을 것이나이다.”

    “맞다. 분명 그랬다.”

    “신이 방금 아뢴 일을 듣자마자 당황스럽고 아찔한 마음에 서둘러 일을 논하려고 했사오나 애석하게도 심한 고뿔에 걸린 상태였사옵니다. 고뿔이 달포 동안 지속 될 정도로 심했는데, 병이 다 낫고 일을 논하기 위해 형조를 찾아 그 일을 캐묻자······.”

    “누군가 훼방을 논 게로구나?”

    기다렸다는 듯 되묻는 임금에 김경조는 잠시 당황한 눈초리를 하다가 황급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그렇사옵니다. 분명 그랬던 것 같사옵니다.”

    “그래서? 그래서 어찌 된 것이냐?”

    “누, 누가 그랬는지 잘 기억은 나지 않사옵니다만 아무개가 사람을 홍문관에 보내 ‘영감이 드디어 일을 망치려 하고 있다 들었으니 사람을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민택의 일을 성상께 아뢴다 한들 성상께서 마음 아파하시기 밖에 더 하겠습니까? 논하지 않는 것이 이로울 듯 합니다.’ 하였사옵니다. 그래서······.”

    “안위가 급급하단 사실을 이해하지만, 어찌 살기 위해 입발린 소리로 임금을 기만 할 수 있단 말이오!”

    “없는 사실을 있는 일처럼 꾸며내고도 네놈이 유학을 자처 할 수 있느냐!”

    김경조가 말을 이어나가려던 때.

    신용개와 남곤이 김경조를 호통쳤다.

    둘의 호통에 김경조가 몸을 움찔 떨었다.

    “공초를 받고 있거늘 감히··· 도사는 저놈들을 당장 끌어내라!”

    “예!”

    나장들의 우악스런 손길에 신용개와 남곤이 끌려나갔다.

    그러는 와중에도 둘은 악담을 퍼부어댔다.

    그 모습을 사색에 질린 표정으로 지켜보던 경조를 위로한 건 융이었다.

    “이제 괜찮다. ‘사실’만 말하라, ‘사실’만.”

    “사, 사실만··· 에, 예, 전하.”

    “그래서 어찌 되었는고?”

    “시, 신이 미욱하고 어리석은 바가 있는데다, 민휘의 붓을 잠시 두려워 해 협박을 듣고도 감히 발끈하지 못 하고 일을 숨기게 된 것이옵니다. 그 결과가 이럴 줄 알았다면 진작에 아뢨을 터인데, 신의 죄가 참으로 크옵니다.”

    “네 사실대로 진술 하였으니 큰 화는 면하게 해주마. 도사는 죄인을 서간에 가둬두라.”

    “예!”

    “죄인이 자복하였으나 참담한 마음이오. 경들은 어떠오?”

    “···”

    “과연 나는 죄인의 자복을 들으니 방금 말한대로 백관이 임금을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에 무게를 두지 않을 수 없소이다. 따지고 보면 세좌가 불경을 저지른 것도 그런 맥락 아니겠소?”

    “···”

    “경력.”

    “예, 전하.”

    “이세좌는 어디쯤 도착 했겠는가?”

    “이틀 전 출발했으니 못 해도 곡산(황해도의 군현)은 지나쳤을 것이옵니다.”

    갑작스런 친국이 선포되어 미뤄진 이세좌에 대한 처결은 이틀 전 이뤄졌다.

    그는 중신들의 합의(?)에 의해 온성에 부처가 됐었다.

    “곡산이라··· 음, 영상.”

    “예, 전하.”

    “이세좌는 선왕조 때, 티끌만한 공로를 쌓고 으스대는 바가 있었소. 오늘 날에 이르러서는 나이와 지위가 오르니 교만과 방종을 떨었고, 결국 술잔을 엎는 불경을 저질렀지. 경이 보기엔 세좌 한 사람만 임금을 업신 여기는 것 같소?”

    “소, 송구하오나 신은 어리석은 바가 있는지라······.”

    “일이 이 지경까지 온 것은 역시 백관들이 임금을 업신여기는 풍습이 있었기 때문이오. 그게 아니라면 이세좌가 불경을 저지르지도 않았겠고, 민택의 일을 언관들이 숨기지도 않았겠지. 그뿐인가? 경조는 당시 홍문관 직제학이었는데 나라의 대부를 어찌 협박 할 수 있었겠소? 이는 민휘 일가의 세력과, 조정 내에 임금을 업신여기는 풍조가 있었기 때문인 것이오.”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시옵니다. 신들이 어찌 전하를 가벼이 여길 수 있겠나이까.”

    “책 잡는 게 아니오. 다만 본보기를 내보일 필요는 있지 않나 싶은데 경의 의견은 어떠하오?”

    “보, 본보기라시면······.”

    “이세좌에게 사약을 내려 본보기로 삼고자 하는데 경과 의정들은 어찌 생각하오?”

    ***

    사사(賜死).

    논의 끝에 이세좌에게는 사약이 내려졌다.

    이세좌를 사사 시킨다면 더 큰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경각심 때문인지, 조정 내에서는 사사 만큼은 막으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다만 몸까지 내던져가며 막은 사람들도 있었는데 사헌부 지평 박소영(朴紹榮), 사간원 정언 조유형(趙有亨), 각각 정광필과 남곤이 죄인이 되면서 홍문관 부제학, 직제학에 제수된 정수강(丁壽崗)과 강징(姜澂), 이 4인이 대표적이었다.

    이들은 말그대로 몸까지 내던져가며 사사를 막았다.

    서슬 퍼런 시국 속에 이세좌의 사사가 부당하다 상소를 올린 것인데, 이미 명분 싸움에서 진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융은 오히려 이 4인을 죄인으로 지목했다.

    아직도 석고대죄하고 있는 대사간 이자건처럼 죄를 빌기는커녕, 오히려 죄인을 두둔하고 죄인이 불경을 저질렀을 때 붓을 놀리지 않았다는 죄목(?)이었다.

    삼사의 중추들이 굴비두릅 엮이듯 엮여 들어가자, 중신들은 더더욱 몸을 사릴 수 밖에 없었다.

    분위기는 이전보다 더 살벌해졌고, 왕의 눈치를 살피지 않는 사람은 없어졌다.

    하지만 중신들에겐 안타깝게도 이게 시작에 불과했다.

    ***

    “전하. 신(臣) 이자건 이전 날의 일로 죄를 청하나이다. 신이 밤새도록 엎드려 호소했지만, 아직 하교를 받지 못 했으니 지난 며칠 사이 참담한 마음은 더욱 커졌나이다. 신의 마음이 너무나 답답하고 절박한데도 전하께서 하교를 내려주지 않으시니 울음만 나오나이다. 울고, 또 울다가 죽고 싶으나, 전하께서 아직 하교를 내려주시지 않았기에 죽을 수도 없사옵니다.”

    “···”

    “이번에 신이 듣기를 죄인의 공초에 신의 이름이 오르내렸다고 들었나이다. 죄인의 입에서 신의 이름이 올랐으니 대죄를 청함은 천만번 지당한 일이겠으나, 신이 어찌 죄인의 말처럼 민택과 민휘의 세력을 두려워하여 고하지 않았겠나이까? 민택의 일과 다르게 세좌의 일을 고하지 않은 것은 언관중 한 사람으로서 부끄러운 일이라 할 수 있으니 석고대죄하며 명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나이다! 삼가 죽기를 무릅쓰고 아뢰나이다!”

    편전.

    “며칠 째요?”

    박소영, 조유형, 정수강, 강징.

    4인에 대한 추국마저 떨어지고, 이 4인에 대한 친국도 곧 있을 예정인지라, 편전의 분위기는 살벌하다 못 해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다.

    그 와중에 밖에서 대죄 청하는 이자건의 음성에 임금이 묻자, 중신들은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화들짝 놀라 아뢨다.

    “오, 오늘로 나흘이 되었나이다.”

    “나흘. 나흘 동안 대죄를 청한 사람치곤 목소리가 성성한 듯 하니 해괴한 일이오.”

    정말로 해괴해서 신기한 마음에 독백하듯 툭 내뱉었지만, 중신들은 마른 침만 꼴깍거렸다.

    “하지만······.”

    꿀꺽.

    “···”

    “괘씸하지 않소? 대죄를 청한다면 응당 죄를 뉘우치면서 청해야 할 것이지, 어찌 변명으로 일관한단 말이오. 과인은 어리석어 변명으로 일관하는 대죄는 들어본 바가 없는데 경들은 어떠하오?”

    “지, 지당하신 말씀이시옵니다.”

    “음.”

    “···”

    “상선은 자건을 들라하라.”

    “예, 전하.”

    잠시 후.

    상선과 함께 눈물이 범벅(?)이 된 이자건이 편전에 들었다.

    장시간 무릎 꿇고 있었는지, 다리가 덜덜거리는 것이 다리 저림이 한 눈에 보였다.

    이자건은 냅다 부복부터 했다.

    “신, 이자건. 성은을 입고도 감히 어지를 헤아리지 못 하였으니 죽어 마땅한 죄를 지었나이다.”

    “이세좌에 대한 일은 들었소?”

    “드, 들었나이다.”

    “대죄를 청하면서도 두 귀는 다 열어둔 모양이로구만.”

    “···”

    “그래. 경의 죄가 무엇이오?”

    “에, 예?”

    “나흘 되도록 대죄를 청하지 않았소. 경의 죄가 무엇인 것 같소?”

    “먼저······.”

    이자건이 줄줄이 본인의 죄라 생각하는 것들을 나열했다.

    어지를 미처 받들지 못 한 죄.

    민택의 일을 아뢰지 못 한 죄.

    이세좌의 불경을 막지 못 한 죄.

    크게 세 가지였지만, 융이 받아들이기엔 죄를 청하는 게 아니라 자기 변호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김경조의 공초에 경의 이름이 거론된 건 들었소?”

    “드, 들었나이다.”

    “김경조는 말하기를 홍치 11년 자신을 협박한 인물이 아무래도 대사간 같다고 하더이다. 어찌 생각하오?”

    “처, 천부당만부당 하신 말씀이시옵니다. 시, 신이 어찌··· 비, 비록 죄인의 공초에 이름이 거론 된 것은 사실이나 신은 일평생 누굴 사주하거나 청탁하여 이문을 취한 적이 없나이다. 부디 고찰하여주시옵소서.”

    “하면 내 경에게 묻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하, 하문하소서.”

    “지금 기분이 어떠한가?”

    뜻밖의 질문이었는지 이자건은 고개를 들어 예? 반문했다.

    “지금 경이 느끼고 있는 기분을 물었소. 기분이 어떻소?”

    “차, 참담하옵고··· 또, 중신중 한 사람으로서 조정에서 일어나는 일을 바로잡지 못 한 것이 부끄럽고, 토, 통탄스럽고, 답답하나이다.”

    “참담하고, 부끄럽고, 통탄스럽고, 답답하다.”

    “예, 전하. 이 마음을 씻을 길은 오직 전하의 하교 밖에 없사옵니다. 부디 신에게 죄를 주어, 오욕을 씻게 해주소서.”

    융은 용상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저벅저벅.

    아주 천천히 이자건을 향해 다가갔다.

    이자건이 황공한 마음에 고개를 조아리자, 융은 그의 귀에 입을 가져다대고 속삭였다.

    “참담하고, 부끄럽고, 통탄스럽고, 답답하다.”

    “···”

    “과인이 지난 10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겪은 기분이다. 내 네놈들을 편히 죽게 만들 것 같으랴?”

    자건이 눈을 부릅뜨자, 흡족히 웃은 융은 도로 용상으로 돌아갔다.

    "죄인이 스스로 죄를 뉘우치고 죄를 청하니 기쁘기 한량없다만, 그렇다고 죄를 면죄 해줄 순 없다. 오늘 초경이 치면 곧바로 친국을 할 것이니, 도사는 죄인을 가둬뒀다가 구인해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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