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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47화 (47/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47화>

    죄를 자복하겠나이다!

    ***

    나는 잠시 생각해봤다.

    주위에선 내가 태어나자마자 원자라 불렸다.

    귀여움 대신 세간의 과도한 주목과 기대를 한몸에 받으면서 자랐고 그래서 마침내 원자에서 세자가 됐다.

    세자가 됐음에도 시를 즐기는 나를 아버지는 늘 못 마땅해 하셨다.

    “일국의 세자라 함은······.”

    “너의 몸가짐이 지금 바르지 못 하니······.”

    “네가 수행하고 학습함은 곧 백성의 삶을 윤택하게 만드는······.”

    시시때때로 하시는 잔소리와 함께 못 마땅한 듯 혀차는 소리가 들려오고, 그럴수록 나는 세자로서의 무게감과 주변의 기대가 어깨를 짓누르는 것 같다.

    그 무게감과 함께 결국 왕이 되었다.

    “왕은 이러저러 하는 것이······.”

    “무릇 군왕이라 함은······.”

    “지금 가뭄이 든 것은 전하께서······.”

    세자 때의 무게감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중압감이 정신을 괴롭게 한다.

    주변에서 하는 말들과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전부 내 탓 같고, 내가 못 나서 정말로 가뭄이 들고 홍수가 나는 게 아닌가 싶어진다.

    정신적으로 지쳐가고, 점점 고립 되어가는 것 같다.

    외로움은 점점 커져만 가고, 결국 내가 즐겨했던 시와 사냥에 집착하게 된다.

    “군왕이 외출을 이리 자주하시면······.”

    “왕이란 정사를 돌봄에 있어서······.”

    사람들은 늘 내 취미를 반대한다.

    “XX판서가 계곡에서 더위를 피하다 호환을 당할 뻔 했따고 합니다.”

    “XX참의가 기생과 시를 논하다가 소란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들려온 말들.

    내게는 하지 말라 했던 일들을 저희들은 앞장서서 하고 있는 사람들.

    일말의 믿음도 사라지고, 스스로를 점점 고립 시킨다.

    이제는 아무도 믿을 수 없었고, 내가 살기 위해서라도 저들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다소 감정적으로 접근해봤지만 나는 어쩌면 억측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숭재 씨의 말을 듣고 난 뒤의 형님에 대한 내 감상은 그랬다.

    사람의 정신이란 복잡한 것 같으면서도 의외로 단순하니까.

    그리고 내가 본 형님은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은 정신적으로 탈진하기가 더 쉽다.

    동기 중에서도 그런 친구들이 참 많았었고 말이다.

    아, 물론 이게 어떤 중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에 대한 면죄부가 되진 못 한다.

    자라온 환경이 불우하다고 모두가 범죄의 길로 빠져드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형님이 범죄를 저지른 건 아닌데다, 내가 배운 폭군이란 이미지대로 행동하고 있는 건 아니잖나.

    그런 면에서 나는 연산군이라는 왕이 아니라, 이융이라는 인간을 조금 더 믿어보고 싶어졌다.

    이기적이라면 이기적인 일이지만.

    “마마? 듣고 계십니까? 마마?”

    생각이 깊어져서 미처 숭재 씨의 말을 듣지 못 한 모양이었다.

    내 눈앞에서 숭재 씨의 검지 손가락이 좌우로 왔다, 갔다거렸다.

    “잠시 생각좀 하느라. 뭐라고 하셨죠?”

    “가시자고 했습니다.”

    맥락을 상실한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궐에는 안 가는 게 좋을 것 같다면서요?”

    “아, 도승지의 저택 말입니다.”

    도승지? 김감?

    “도승지 집이라면······.”

    “창녕대군께서 드디어 쾌차하셨다고 합니다. 오늘 기별도 없이 마마를 찾은 건 그 때문이구요.”

    ***

    사흘 동안 이어지던 친국은 나흘째 되는 날에도 계속됐다.

    장장 이틀에 걸친 고신에 이미 심신이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진 죄인들은 하나같이 창백한 얼굴로 친국장에 나타났는데, 그 면면은 대개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이들이었다.

    조정의 중신중 한 사람이자 얼마 전까지 좌찬성을 역임하고 잠시 중추부에 머물고 있던 중추부판사(中樞府判事) 박건.

    회묘에 관한 일로 보복성 좌천을 당한 의영고영(義盈庫令) 조중휘.

    상의원정(尙衣院正) 심광보.

    조정에서도 기개가 높다는 평을 만큼 왕에게 쓴소리를 자주해 충청도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좌천된 신용개.

    사헌부 집의 김효간, 간언(諫言)을 두려워 않던 홍문관 직제학 정광필.

    진보적이며 어떤 재상의 눈치도 살피지 않는다는 평을 받았던 홍문관 부제학 남곤.

    홍문관 응교 장충보, 왕에게 직언을 마다않던 병조참지 이과(李顆).

    전(前) 포도장(捕盜將) 정유지.

    사간 곽종원.

    사헌부 장령 강숙돌.

    전(前) 대사헌 김경조 등이었다.

    “참말이냐?”

    고신을 당하는 자들만 지치는 게 아니었다.

    고신을 가하는 당사자도 지치는 법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듯, 일면에서 보면 명만 내리면 되는 듯 보이는 게 고신이지만, 원한이 있고 말고를 떠나 고신 현장의 그 잔혹한 인상 때문에라도 정신적으로 피로를 느끼기 마련이었다.

    눈그늘(다크서클)이 눈밑까지 짙게 내려온 융은 친국 채비가 끝났다는 금부경력 박기의 말에, 침전을 나오다 상선의 말에 피곤도 잊고 반색했다.

    친국 현장에서 늘 함께하며 자질구레한 수발을 들었던지라, 상선도 피곤한 건 매한가지일텐데 피로감 가득한 얼굴은 온데간데 없이 마치 자신이 당한 일처럼 기뻐했다.

    “그렇사옵니다. 방금 도승지 영감께오서 기별을 보내오셨사옵니다. 과연 열성조께서 보우하심이었사옵니다. 경하드리옵나이다.”

    “다행이다. 참으로 다행이야.”

    융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창녕이 쾌차를 했단다.

    이미 며칠 전부터, 김감의 집에 보내둔 의원들이 병색이 많이 사라지고 열도 내렸다고 말하면서, 슬슬 차도를 보이기 시작한다고 해서 내심 기대를 했는데 내색은 하지 않았었다.

    자칫 기뻐하는 모습을 두신이 보고 다시 창녕에게 깃들 수도 있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완전히 병마를 떨쳤다니 기쁘기 한량 없었다.

    “이를 두고 겹경사라고 하는 모양이로다.”

    융은 만면에 미소를 그득 머금었다.

    나흘에 가까웠던 친국.

    오늘은 드디어 죄인들의 입에서 자백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박기의 첨언이 있었다.

    더군다나 여태 모르쇠로 일관하던 대사간 이자건도 고신을 받던 심열한과 최치가 오늘 옥중에서 숨을 거뒀다는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멍석을 갖고서 대간(臺諫)의 장으로서 민택의 일을 미처 고발하지 못 했다며 여러 대간들과 함께 몰려와 석고대죄를 청했었다.

    그런데 더해 창녕까지 쾌차를 했다니 겹경사는 겹경사였다.

    “내 당장 사람을 보내야겠다. 평소 창녕이 곶감과 약과를 즐겨 먹었으니 사람을 시켜 김감의 집에 하사토록 하라.”

    “분부 받들겠나이다.”

    상선이 기쁜 표정과 함께 물러가자, 곧 상전(尙傳, 정사품 환관직)이 들었다.

    “전하. 친국장에 있는 금부경력 박기가 아뢰건대, 죄인 강숙돌이 서간(西間, 의금부의 구치소의 일종) 숨을 거뒀다 하나이다. 성스러운 친국장이 더러워질 수 있으니, 시체를 치울지 말지에 대해 아뢰나이다.”

    “강숙돌이가?”

    “그러하옵니다.”

    잠시 고심하던 융은 손을 내저었다.

    “내 가서 직접 봐야겠으니 시체는 그대로 두라.”

    “그리 전하겠사옵니다.”

    상전이 물러가고, 환복한 융은 침전을 나섰다.

    잠시 후.

    그가 친국장에 들어서자, 나흘간 이어진 친국에 군기라면 군기요 겁이라면 겁이 바짝 든 중신들은 넙죽 고개를 조아렸다.

    “어찌 친국장에 대사간이 아니 보이오?”

    중신들을 흡족히 둘러보던 융은 짐짓 모르겠다는 듯 말문을 열었다.

    그가 방금 빠져나온 강녕전에서 대간들과 함께 석고대죄 하고 있을 대사간을 못 봤을 리는 없었다.

    “전하께서도 들으셨겠지만 오늘 정오부터 강녕전에서 죄를 청하고 있나이다.”

    “죄?”

    역시 짐짓 모르겠다는 투로 묻자 대답은 영의정 성준에게서 흘러나왔다.

    “일전에 전하께오서 10년간 패악을 일삼은 민택의 일에 대해 책임을 물으시니 사간원에서 자중하다가, 오늘 마침내 멍석을 갖고서 대죄를 청하고 있나이다.”

    “아아. 낮 것을 들 때 상선에게 들은 기억이 있소. 그래도 그렇지, 대사간이 친국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일의 형평성은 어찌 따지겠소? 나중에 뒷 말이 나올까 두렵소.”

    원칙적으로 대사간은 친국에 참여해야만 한다.

    또 위관을 임명해 왕이 참여하지 못 할 땐 그 과정을 지휘하고 감독하게 해야했고, 문랑(問郎)들이 친국을 기록해야했다.

    하지만 원칙은 그 일의 기본이 되는 법칙이었지, 매사 지켜지진 않았다.

    원칙적으로라면 사정전을 친국장으로 개설한 것 부터가 오류였으니까.

    융의 말은 비꼼에 불과했다.

    “뒷 말이 나올 까닭이 있겠나이까? 전하께서 공명정대하게 일을 돌보시니 추후 뒷 말이 나올 까닭이 없나이다.”

    “영상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도사는 죄인들을 구인(拘引) 해오라.”

    금부도사가 곧 죄인들을 끌어다 형틀에 앉혔다.

    역시 이틀에 걸친 고신에 그들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죄인 정유지는 들으라.”

    더운 날에 피딱지가 내려앉은 상처 부위를 간질이는 날파리에 눈을 파르르 떨며 무의식 중에 날파리를 쫓던 정유지가 휘청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대는 정녕 본인의 죄를 모르는가?”

    “전하··· 신은 억울하나이다······.”

    “그대가 포도장으로 있던 홍치 9년(1496년). 동대문 밖 금석리 사는 가놀이 찾아와 민택의 일을 하소연 한 일을 정녕 모른단 말이냐?”

    “신은 저, 정말 모르는 일이옵니다, 전하··· 미, 믿어주시옵소서.”

    “네놈이 지금 정신이 온전치 못 한 것 같아 당시의 일을 다시 짚어주마. 홍치 9년 3월. 가놀의 딸 사혜가 민택에게 범해졌다. 주민들이 모두 쉬쉬하자 가놀이 민택을 해하겠답시고 찾아가자 곧 포도군이 들이닥쳐 쫓겨났다. 그리고 가놀은 포도청으로 멀쩡히 끌려갔다가 불구가 되어 나왔다. 이때는 네가 서울의 포도장으로 있던 시절이니 이를 어찌 설명하랴?”

    “하오나 시, 신은 모르는 일이옵니다······.”

    “당시의 일을 기억은 하는가?”

    “···모르는 일이옵니다.”

    쾅!

    “죄인이 아직 자백할 준비가 덜 된 모양이다. 놈을 난장쳐라!”

    그의 명이 떨어지자마자 고신의 후유증이 채 가시지도 않아 제대로 서지도 못 하던 정유지를, 별장들이 내팽개쳤다.

    그러고는 준비된 방망이를 마구 휘둘렀다.

    연달아 울려퍼지는 피육 터지는 소리에 흡족해 하던 융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길이 멈춘 곳은, 사건이 있던 홍치 9년 형조판서로 있던 박건이 앉은 형틀이었다.

    “죄인 박건은 들으라. 너는 평소 임금을 기만하는 행위를 자주하여 은연중 왕을 무시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리하······.”

    “아, 아니옵니다. 어찌 천부당만부당하신 말씀을······.”

    “이 보아라. 임금이 하는 말을 대관절 어느 신하가 끊는단 말이냐? 이는 네가 임금을 우습게 여기는 마음을 갖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

    “홍치 9년 그 날에도 마찬가지였다. 네가 임금에 무시하지 않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면 그 날의 일을 듣고 어찌 무시로 일관하였겠느냐? 너는 응당 민택의 죄를 고발했어야 옳다. 너도 정유지처럼 모르쇠로 일관하겠느냐?”

    “저, 전하. 신은······.”

    변명.

    그리고 호통과 신문.

    다시 고신.

    상황은 앞전의 정유지 때와 똑같았다.

    박건도.

    그 다음 신문을 받던 조중휘와 심광보도, 신용개와 정광필도······.

    모두 모르쇠로 일관하거나 너무 오래되어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식으로 변명을 했다.

    하지만 앞전의 열 사람이 죄를 부인한다 한들, 한 사람.

    이번 일에 연루된 딱 한 사람만 자복을 해도 모두를 엮을 수 있었다.

    그리고.

    “시, 신은 그 날 일을 기억하나이다.”

    그의 바로 앞에서 고신을 받던 정광필이 혼절한 모습에 사색에 질려있던 다음 고신 대상자(?) 전 대사헌 김경조의 입에서 드디어 자복하겠다는 말이 흘러나왔다.

    친국을 선포한 지 나흘.

    홍치 9년 ‘가놀 사건’의 죄인들에 대한 고신은 사흘 째 되던 날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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