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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46화 (46/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46화>

    원자가, 세자가, 왕이 아닌 사람

    ***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심하지 않은가? 김 씨 한테 들어보니 대사헌 영감을 아주 초주검 만들어 놨다던데?”

    “이 사람아. 자네 뉘 집에서 종살이 하나?”

    “낮더위라도 잡쉈나. 몰라서 묻는 건 아닐 테고?”

    “나랏님이 대사헌 영감 초주검 만들어 논 사실은 듣고, 대사헌 영감의 족친이 주인 마님께 손찌검 한 건 못 들었나?”

    “듣긴 했지.”

    “그런데도 그런 말이 나와? 자네 삼시 세끼 밥 먹여주는 게 뉘신데 지금 누구 편을 들어.”

    긁적긁적.

    “아니, 누구 편을 드는 게 아니라··· 너무 충격적인 일이잖은가.”

    “충격적은 무슨. 다 예상 된 일일세. 소문 들어보면 나랏님 앞에서도 모가지 빳빳하게 든 세월이 자그마치 10년이라던데, 그만하면 나랏님이 보살이란 거 아니겠는가? 그리고 말이 나와서 말인데, 자네도 동대문 그 개차반 소문은 익히 들었잖나. 그 동안 동대문 사람들 얼마나 앓는 소리 해댔어? 난 앓는 이가 다 빠진 것처럼 시원하더구만.”

    “동대문 개차반이 그렇게 된 건 나도 앓는 이 빠진 것처럼 시원하더군. 근데 말일세.”

    “또 쉰소리 하려거든 하지 말고.”

    “쉰소리는··· 그냥 나랏님이 좀 변하신 것 같지 않냐고.”

    “이 사람. 또, 또! 재수없는 소리 하지 말어. 그리고 나랏님이 어찌 바뀌든 종놈 팔자인 자네나 나나 무슨 상관인가? 우리야 삼시 세끼만 잘 챙겨 먹으면 되는 게지.”

    “아니, 나는 우리 주인 마님도 잘못되면 어떡하나 싶어서 그러지······.”

    “하이고! 노비 팔자 암만 드세다지만, 걱정도 팔자구만. 나랏님이 설마 우리 주인 마님께 무슨 해코지라도 하겠나? 말이 되는 소릴 해야 듣는 시늉이라도 하지..”

    “하긴. 그건 또 그래?”

    “그럼! 사람, 참. 말이 되는 소릴 해야··· 히익!”

    뒤에서는 나랏님 욕도 한다더니 정말이었다.

    뭐, 정확히 말하면 욕이 아니라 하나의 가십거리에 대한 걱정 정도지만.

    하지만 말이 걱정이지 당사자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는 나에겐 퍽 감정이 상하는 일이었다.

    나는 일그러진 얼굴로 날 보고 헛바람을 들이킨 팔덕이라는 행랑 식구에게 말했다.

    “대화 다 끝났습니까?”

    털썩!

    “아이쿠. 대, 대감마님······.”

    “남 얘기 함부로 하는 거 아닙니다.”

    “소, 송구하구만요.”

    “가서 일 보세요.”

    “아, 예······.”

    잔뜩 주눅 든 채 사라져가는 둘을 일별한 나는 사랑방으로 향했다.

    곧 장곤 선생님이 도착할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선생님이 도착하기 전까지, 어제 했던 공부나 할까 싶어서 책을 펼쳤지만 도무지 글이 들어오지 않았다.

    착잡했다.

    내색을 안 할 뿐이지, 여러모로 걱정이 되는 건 나도 마찬가지니까.

    물론 내가 조선에 온 지(?) 5개월 밖에 안 돼서 이런저런 부분에서 이 시대 사람들에 비해 모자라고 어리숙하다는 건 나도 느끼고 있지만, 그런 나라고 듣는 귀가 없는 건 아니다.

    엊그제는 대사헌 아저씨에 대한 조사가 있었다.

    조사 결과는 행랑식구들이 말한대로 처참했다.

    대사헌 아저씨는 초주검이 돼서 친국장에서 끌려나갔고, 개똥의 아버지를 핍박한 그놈은(?) 사형을 면치 못 하게 됐다.

    뭐, 그놈 때문에 착잡하진 않다.

    사형이 심한 감은 없잖아 있다.

    이건 분명하다.

    하지만 툭 까놓고 말해서 생명이 소중한 거?

    교과서적인 말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위험한 생각일수도 있지만, 전생에서 TV를 보다보면 그리고 인터넷 기사를 접하다보면 와, 저런 새끼도 버젓이 살아 숨 쉬고 있네? 역겨울 때가 종종 있었다.

    예컨대 잊을만 하면 대서특필 되는 연쇄살인범.

    잊을만 하면 대서특필 되는 발바리.

    잊을만 하면 대서특필 되는 아동 성범죄자들.

    그들에 의해 피를 토하는 유족들은 무슨 죄겠나?

    오히려 유족들은 그 일이 평생을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면서 시달린다.

    잊을만하면 그 날의 일이 떠오를 테고, 잊을만하면 그 날의 일이 가십거리로 뉴스에 보도된다.

    몇몇 유족들은 피해자를 지키지 못 했다는 생각에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하고, 정신적으로 평생을 고통 받는데 반해, 가해자는 국민들이 내는 세금에서 편히 발 뻗고 잔다.

    얼마나 형평성에 어긋나는 일인가?

    게다가 여긴 조선이었다.

    인권에 대한 얕은 인식은 존재하지만, 그 인식이 보편적 범위에 적용되진 않는 세상.

    내가 그 인간의 사형이 과하다는 건 대군이란 신분만 빼면 똑같은 사람인 날 상대로 손찌검을 한 죄가 시발이 된 것 때문이지, 조사 결과 드러난 여죄만 놓고 본다면 21세기에서도 사형을 언도 받을 가능성이 컸다.

    오히려 더한 놈이었다, 그 인간은.

    고로 내가 착잡한 건 민택과 대사헌 아저씨 때문만은 아니다.

    물론 대사헌 아저씨가 초주검이 된 건 나로서도 깜짝 놀랄 만한 일이었다.

    알아보니 대사헌 아저씨는 불경죄를 저질렀다고 한다.

    불경죄에 더해 동대문 개차반의 악행을 막지 못 한 죄까지 추가가 된 것이다.

    그 정도로 사람을 초주검 만들 정도는 당연히 아니지만, 누차 말했듯 나의 상식과 조선의 상식은 통하지 않는다.

    방금 행랑식구들의 걱정도 대사헌 아저씨가 아니라, 갑작스레 무서운 일을 벌이는 ‘나랏님’을 걱정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내가 착잡한 게 그것 때문이기도 했다.

    연산군.

    처음에 나는 그 이름 석 자를 떠올리자마자 학을 뗐었다.

    역알못(?)인 나라고 해도 조선조 500년 최악의 폭군인 그 이름을 기억 못 할 정도는 아니니까.

    돌아가지 못 한다면, 여기서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내 입장에선 더더욱 막막한 일이었다.

    하지만 걱정이 무색하게 직접 본 형님은 폭군의 프레임에서 한참 벗어나는 사람이었다.

    폭군으로 기록 됐기 때문에, 당연히 성격도 지랄 같고 대인 관계도 서툴고, 예민하고, 신경질적일 줄 알았는데 정반대였다.

    성격은 자상한 편이었고, 대인 관계도 오히려 학창 시절 흔히 볼 수 있는 인싸 스타일에 가까웠다. 예민하다기 보단 감수성이 풍부해 것 같았고, 신경질적이라기 보단 섬세한 것에 가까웠다.

    그런 성격 때문에라도 갑작스레 조선에 떨어져 모든 게 낯선 내겐 마음 의지 할 구석이 하나 생긴 셈이었고.

    그런데 지금 하는 행동은 내가 아는 형님과는 다소 상반되는 것이었다.

    이 역시, 내 상식과 조선의 상식이 통하진 않으니 형님으로선 지극히 상식적인 일을 하시는 것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지만 문제는 어제의 일이었다.

    대사헌 아저씨에 대한 조사만 있었다면 나는 조선의 상식이 생각보다 잔인하구나, 하고 넘겼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제 친국장에는 17명이 모두 초주검이 되어 나갔다.

    개중에 2명은 고문을 이기지 못 하고 숨을 거뒀는데, 모두들 민택이 한참 악행을 벌일 때, 피해자들이 관에 신고함에도 자의반 타의반 외면했던 당시 형조와 포청의 관계자들이었다.

    사실 이것만 보면 착잡할 건 전혀 없다.

    어제 초주검이 된 17명이나 민택 그 인간이나.

    죄가 아주 없는 게 아니라 백성들 입장에선 속시원한 일이니까.

    내가 걱정되는 건 이로 말미암아 지금 내가 알고 있는 형님이, 종국에는 교과서에서 배웠던 폭군이 되지 않을까 하는 점이었다.

    교과서에서 배운 ‘연산군’에 대한 기억은 단편적인 것이지만, 그 단편적인 것 중 하나는 사소한 일이 시발점이 되었다로 기억하고 있으니까.

    “후.”

    착잡한 마음이 한숨이 돼서 새어나왔다.

    어떡하면 좋을지 선뜻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대로 방관한다면 형님께서 정말 역사 속의 폭군이 되실 것 같았다.

    그럼 나는 역사 속의 진성대군처럼 중종이 되어야 한다.

    내 의지와 상관 없이 추대를 받고 왕위에 오르게 된다는 말이다.

    말이 추대지, 결국 21세기 기준으로 흔히 말하는 쿠데타다.

    이 시대 말로는 역모.

    성공하면 내 손으로 형님을 죽여야 한다.

    실패하면 내 의지도 아니었건만 목을 내놓아야 한다.

    이런 최악의 상황은 절대 맞이하고 싶지 않았다.

    목숨이 아깝고 말고를 떠나서, 왜 형제들끼리 그래야만 한단 말인가?

    내가 고아였기 때문에 골육상잔에 더 민감한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형제들끼리 목숨을 거는 싸움을 한다는 건 내 상식이나 조선 사람들의 상식에서나, 그 궤를 한참 벗어나는 것이잖은가.

    내가 처음으로 조선에 와서 마음을 줄 수 있었던 사람과, 의지 할 수 있게 해줬던 사람과 그런 처절한 싸움은 하고 싶지 않았다.

    생각을 정리한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사랑방을 나섰다.

    아니, 나서려고 할 때였다.

    “아니 가시는 게 좋을 듯 합니다.”

    숭재 씨였다.

    ***

    “궐에 가시려던 참이시지요?”

    친절한 숭재 씨는 이전의 서글서글 웃는 낯이 아니라 다소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네.”

    “아니 가시는 게 좋을 듯 합니다.”

    “하지만······.”

    “마마께오서 무슨 걱정을 하는지 소인이라고 하여 어찌 모르겠습니까? 하오나 설령 마마께서 전하를 알현한다 한들, 무슨 말을 아뢸 수 있겠습니까? 말리기라도 하시겠습니까?”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전하께서 혹시 감정을 제어하지 못 하시는 것일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전하께선 그 어느 때보다 침착하시고 냉철하십니다.”

    모순적이게도 나는 어쩐지 안심이 되는 것 같았다.

    연산군 형님에 이어 조선에서 내가 의지할 수 있는 또 다른 사람인 숭재 씨이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대감.”

    “예.”

    “마마의 걱정을 모르진 않습니다. 하지만 소인이 주제 넘게 한 말씀 아뢰어도 되겠는지요?”

    “편히 하셔도 됩니다.”

    숭재 씨는 대청에 걸터 앉았다.

    사람은 썩 유쾌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선은 칼같이 지켰던 모습을 떠올린다면 분명 대비되는 모습이었지만 딱히 책 잡진 않았다.

    솔직히 그걸 책 잡을 만큼 거리감이 느껴지는 사이도 아니고.

    숭재 씨가 대청에 걸터 앉자, 나도 자연스레 대청에 걸터 앉았다.

    “전하께서 대군을 얼마나 총애하시는지 아십니까?”

    “알죠.”

    “그럼 왜 그런 줄도 아십니까?”

    “혈육이라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숭재 씨는 씁쓸히 웃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전하께선 사람을 잘 믿지 않으십니다. 혈육이라 한들 마찬가지시지요.”

    “···”

    “전하께서 냉혈한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자라온 환경이 그러셨습니다. 원자 시절부터 보위에 오른 지금까지. 어찌 사람을 믿을 수 있는 환경이었겠습니까. 원자 시절엔 믿었던 중신들이 앞다투어 중전 마마를 폐하라 간했었고, 세자 시절엔 믿었던 부왕께 버림을 받으셨사옵고, 보위에 오르시고 나서는 스승이라 믿었던 자들 마저 결국은 추악한 모습을 보여주었는 걸요.”

    “···”

    “그런 분께서 혈육이란 점으로 가까이 하실 리는 없으시지요. 대군께서도 아시다시피 이전에 전하께오서 마마를 사냥이나 연회에 부르신 적이 있으셨습니까?”

    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사실은 내가 이 몸 주인의 이전 기억까지 알고 있는 건 아니라서 한 부정의 의미의 고갯짓이었지만.

    “전하께서 마마를 믿으시고, 총애를 하신 것은 소인에게도 뜻밖의 일이었습니다. 그 연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니 곧 알 수 있었습니다.”

    “뭐였나요?”

    “다른 사람과 다른 것.”

    “···?”

    “누군들 전하를 어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 어느 누가 전하를 사람대 사람으로 대할 수 있겠습니까? 원자 시절부터 지금껏 전하를, 원자가, 세자가, 왕이 아닌 하나의 사람으로 대해주신 건 마마께서 처음이셨습니다.”

    나는 어딘가 슬퍼보이는 숭재 씨에 감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저, 그가 하는 말을 가만히 듣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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