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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45화 (45/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45화>

    신념과 소신이 사라진 친국장

    ***

    고신은 정해진 수순에 지나지 않았다.

    결국 민휘에 대한 고신이 가해졌다.

    친국에 참여한 중신들은 내심 설마하다가 고신이 떨어지자 경악을 금치 못 했지만 그 누구 하나 말리는 이 없었다.

    말릴 명분도 없었지만 용기는 더더욱 없었다.

    “끄아아악!”

    민휘의 성품은 과연 고신에서도 드러났다.

    일부 중신들은 고신에도 불구하고 눈을 서릿발같이 치켜뜨고 고통을 인내하는 민휘에 탄성을 내지를 정도였다. 하지만 민휘 역시 사람인 건 다르지 않았다.

    민휘는 어느 순간 무너졌다.

    서릿발처럼 치켜 뜬 눈은 흐리멍덩해졌고 고통을 인내하던 꽉 다문 입은 쩍 벌어진 채 비명을 질러댔다.

    그가 비명을 내지를 때 마다 융은 몸이 찌릿거림을 느꼈다.

    일종의 전율이었다.

    만날 성인의 말씀을 떠올리기에 민휘는 고통도 느끼지 못 하는 성인인 줄 알았건만, 고작 저런 나약한 위인의 혀를 두려워했다니··· 고작 저렇게 나약한 위인에 불과했다니······.

    고신은 장장 한시진 가까이 이어졌다.

    당사자인 민휘와 분위기에 압도돼 지레 겁먹은 중신들에게는 억겁 같았을 시간이었겠지만, 융에게는 찰나의 시간에 지나지 않았다.

    “죄인이 혼절하였사온데 어찌 하올까요?”

    고신을 담당하던 금부도사가 난처한 표정으로 물었다.

    찬물을 끼얹어서라도 고신을 이어가라 명하고 싶었지만, 민휘의 꼴을 보니 말이 아니다.

    이대로 더 고신을 가했다가는 거적에 실려 나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10년 동안 그를 괴롭혀온 민휘다.

    10년 만에 찾아온 설욕의 기회를 잃을 순 없었다.

    두고, 두고 갚아줄 터였다.

    융은 입맛을 다셨다.

    “죄인이 혼절하였으니 일단은 가둬두라.”

    “예.”

    금부도사가 죄인을 끌고 친국장을 빠져나가자 융은 흡사 먹이를 찾는 맹수처럼 눈을 부라렸다.

    중신들은 흠칫거리면서 시선을 회피했다.

    흡족한 미소를 피어올린 융은 금부경력 박기를 불렀다.

    “아까 전동이 말한 죄인들은?”

    “전동을 밖으로 불러내 알아보니 그 일이 있었던 건 홍치(弘治)9년 봄이었사옵고 당시에 형조의 관원으로 있었던 이들은······.”

    박기는 아무래도 눈치가 보이는지, 목소릴 낮췄다.

    “당시 형조의 관원으로 판서 박건(朴楗)이 있었사옵고 참판으로는 권경희(權景禧), 참의로는 김경조(金敬祖), 정랑으로는 조중휘(趙仲暉), 신용개(申用漑) 등이었사옵고 좌랑으로는······.”

    “그만하면 되었다. 하면 죄인들은?”

    “전하께서 전교를 내리신 연후 곧바로 수색하였사옵고 모두 금부로 끌고 왔사옵니다. 다만 경희는 수년 전 명을 달리 했으니 끌고 올 수 없었나이다.”

    “좋다. 모두 끌고오라.”

    “예!”

    경력 박기가 또 다른 죄인들을 데리러 간 사이.

    친국장에는 약간의 공백이 생겼다.

    융은 그 공백을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점점 옮겨갔다. 그의 눈길이 멈춘 곳은 민택이 자리한 곳이었다.

    그는 민휘가 고신을 당하는 내내, 그걸 바로 옆자리에서 지켜봐야했다.

    지켜보는 일이 어찌나 힘들었으면 실수까지 했을 정도였다.

    그 주변으로 샛노란 오줌이 흥건했다.

    눈살을 찌푸린 융이 입을 열었다.

    “저 죄인은 굳이 신문하지 않아도 그 죄가 극에 달했음을 모두 알고 있을 테니 굳이 신문하진 않겠다. 다만 죄가 극에 달했고 무도한 세월이 장장 10년이 흘렀으니 이는 무슨 영문이겠는가? 하물며 이런 패악무도한 자를 가만 놔둔다면 민심이 어찌 이반하지 않겠는가? 전교한다.”

    “···”

    “죄인의 재산은 모두 몰수하고 죄인은 길일을 점쳐 극형에 처하도록 하겠다. 아!”

    잠시 잊은 게 있다는 듯 융은 중신들을 흘겼다.

    “이견은 없소들?”

    “이견이라시면 어인 말씀이시온지······.”

    “왜, 경들이 잘 하는 것들 있지 않소? 나중에 딴 말하는 것.”

    “···”

    “이견이 없는 것 같아서 죄인을 극형에 처하도록 했는데 나중에 다른 말이 나오면 얼마나 우스운 일이겠소. 그러니 이견이 있다면 거리끼지들 말고 말해보오.”

    중신들이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그 모습에 융은 냉소했다.

    군자는 언제나 소신을 굽히지 않고 신념을 좇아야 한다더니, 중신 하나 매질했다고 소신과 신념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자들이지 않은가?

    “있소, 없소!”

    흠칫!

    “어, 없나이다. 전하의 뜻대로 하소서.”

    소신과 신념이 사라진 친국장에서 거리낄 게 있을 턱이 없었다.

    융은 나장에게 눈짓했다.

    나장이 성큼성큼 민택에게 다가갔다.

    “사, 살려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전하!”

    돌아가는 추이가 결코 본인에게 이롭지 못 하다는 걸 깨달았는지 민택이 울며 불며 사정했다.

    융은 냉소했다.

    “내 무슨 권한으로 죄인을 살릴 수 있겠느냐.”

    “하, 하지만 신에게 무슨 죄가··· 신에게 죄가 있다면 감히 대군 마마를 알아뵙지 못 하고 손찌검을 한 것 뿐이옵니다! 어, 억울하나이다, 전하!”

    “억울?”

    “예! 신은 억울하나이다!”

    “네놈이 정녕 민휘처럼 불구가 되어봐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압슬(壓膝, 고문기술의 일종)이라도 가하랴? 아니면 더 이상 말을 못 하도록 그 혀를 뽑아 버리랴?”

    “···”

    “내 지금 대군의 문제만으로 너를 벌하겠다고 하는 것 같으냐?”

    “하오나 신은 진정 억울하여······.”

    “이놈! 네놈이 10년 세월동안 부린 패악을 떠올려 보아라!”

    융은 순간 눈이 시큰해짐을 느꼈다.

    민택은 조정의 대신들이었다.

    자신을 겁박하고, 성현의 말씀으로 옭아매고, 경연으로 종속시키려던 조정의 대신들.

    반대로 민택에게 해를 입은 백성은 자신이었다.

    온갖 매질과 불합리함에도 결국은 변변한 반항 한 번 못 하던.

    “네놈이 양심이 털끝만치라도 있다면 어찌 그 더러운 입으로 억울이란 단어를 올릴 수 있단 말이냐! 억울은 죽은 가놀과 석발이 해야 하는 것 아니냐! 묻겠다.”

    “···”

    “네 정녕 억울하더냐?”

    눈을 부라리며 묻는 임금에 몸이 움츠러들었지만 민택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

    “좋다. 네가 정 억울하다 하니 어쩔 수가 없겠다. 금부는 들어라.”

    “하문하소서.”

    “저놈의 처자를 모두 끌고와라.”

    “저, 전하!”

    “억울하다지 않았더냐? 내 너의 원통함을 네 처자들로 하여금 풀어주마. 그래서 억울하단 말이 네놈의 더러운 입이 아니라 네놈 처자들을 통해 나오게 해주마. 들으라.”

    “···”

    “네놈으로 인해서 네 처는 함경도 관아에 노비로 끌려 갈 것이다. 자식들은 장성했다면 그 목이 온전치 못 할 것이니, 죽기 직전 너를 원망하면서 목이 잘릴 게다. 설령 나이가 어려 목을 간수 한다 할지라도, 집안의 재산이 모두 몰수 당했으니 어찌 살아가겠는고? 백발 노인이 되도록 억울하다 너를 원망하면서 죽어갈 것이다. 내 꼭 그리 해주마.”

    “사, 살려주시, 십시오! 전하! 전하!”

    “가놀과 석발도 네 발치 아래 무릎 꿇고 살려달라 사정을 했겠지. 어디 가놀과 석발 뿐이겠는고? 동대문 사는 수백, 수천의 나의 백성들이 너의 악행에도 벌벌 떨면서 제발 너의 마수가 뻗치지 않기만을 바랐을 것이다.”

    “···”

    “나의 백성들이 억울함과 원통함에 일을 관아에 알려도, 관에서는 네놈의 가문과 민휘의 눈치를 살피느라 일의 전후를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속이 썩어 문드러져 갔을 테니 내가 살려야 할 것이 죄인 네놈이겠느냐, 나의 백성이겠느냐?”

    “하오나··· 크흑. 흑흑흑. 하, 한 번만 자비를 베풀어주시옵소서. 부디 한 번만······.”

    민택이 기어코 추태를 부렸다.

    “정히 억울하다면 네 원통함은 하늘에 고하라. 내 너를 잘못 죄준 것이라면 하늘이 내게 벌을 내리지 않겠느냐? 도사는 뭣하느냐! 당장 끌고가라!”

    “옛!”

    민택이 끌려 나가자 친국은 잠시 소강 상태에 접어 들었다.

    친국장 뜰에 남은 죄인은 없었고, 친국장에는 씩씩거리는 융과 그런 융의 눈치를 살피는 중신들만 남았다.

    그렇게 잠시 후.

    “아.”

    마침 생각난 게 있다는 듯 융이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일이 일어나기 전에 세좌의 일을 논하고 있었는데, 일이 급박하여 깜빡했구려. 영상.”

    영의정 성준이 읍을 했다.

    “예, 전하.”

    “일이 벌어지기 전에 경들이 세좌의 유배지로 영산을 꼽았다고 하지 않았었소?”

    “그, 그리 했나이다.”

    “내 말했다시피 불경죄를 저지른 세좌를 고작 영산에 부처시킴은 온당치 못 한 일 같소이다. 그렇게 생각지 않소?”

    “신등이 일을 당하고 전하께오서 무안에 부처시킴이 좋겠다는 말씀을 하시매, 각각이 전후를 따져보니 과연 영산보단 무안이 옳다는 판단이 들었나이다. 불경죄를 저지른 죄인이 노구의 몸이라 하여 충청에 부처시킴은 후세에 본보기가 되지 못 할 수 있음이니 전하의 뜻대로 하소서.”

    “그럼 온성으로 보내야겠소.”

    “예? 하오나 무안을 말씀······.”

    “과인이 이번 일을 당하고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말이오?”

    “···”

    “아무래도 세좌의 일은 세좌 개인의 문제가 아닌 것 같더이다.”

    “어, 어인 말씀이시옵니까?”

    “세좌가 평소 과인을 업씬여기던 마음도 있었겠지만, 민택의 일을 보시오. 백성들이 왕실을 얼마나 가벼이 보고 있으면 이런 일이 일어났겠소?”

    여기서 말하는 백성은 일반적인 서민이 아니라 사대부를 뜻함을 모두 다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을 지적하는 이는 하나 없었다.

    “그런데 불경죄를 저지른 세좌를 무안으로 유배 보낸다? 내 어찌 면이 서겠소. 오히려 왕실을 가벼이 보고 참람한 짓을 벌이는 자들이 더 나타날 테니, 내 확실히 본보기로 삼아야겠소. 그런 의미에서 온성이 아주 온당하지 않겠소?”

    “···”

    “허어. 어찌 말씀들이 없으시오? 자고로 옳은 군왕이란 재상들과 함께 정치를 도모하는 군왕이라 하였고, 나 또한 그리 가르침 받았으니 내 경들이 부당한 일이라 한다면 다시 재고해보리다. 하니, 말씀들 해보오. 세좌를 온성으로 유배 보내는 일은 온당한 일이오, 부당한 일이오?”

    “아뢰건대, 온성은 험지인지라 아무래도······.”

    신념과 소신이 사라진 친국장에 대사간 이자건이 조심스레 소신을 밝혔다.

    융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반겼다.

    “부당한 일이다?”

    “부당하단 것 아니지만, 노구의 몸을 참작할 필요가 있지 않나 하는 그런······.”

    “경의 말을 듣고 보니 확실히 그런 듯 하오. 생각해보면 세좌가 쌓은 공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닌데 온성은 좀 과한 감이 있었던 것 같소. 자, 보시오. 군왕과 재상이 함께 정사를 도모하니, 이 얼마나 아름답고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오? 그런 의미에서 말인데, 대사간.”

    “에? 예! 전하.”

    융은 표정을 굳혔다.

    “경은 명색이 대간(臺諫)의 한 사람이자, 대간들을 책임지는 장관이지 않소?”

    “신은 본래 용렬하고 또 재주가 없사온데, 성은을 입게 되어 그리 될 수 있었나이다.”

    본인이 사간원의 장관이 맞다는 말을 참 장황하게도 한다.

    융은 비릿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서 말인데. 어찌 경은 이번 사태에 있어서 아무런 말씀이 없소?”

    꿀꺽.

    “시, 신이 아둔하여 성상의 분부를 헤아리지 못 하였나이다. 부디 교(敎)하여 주시옵소서.”

    “민택 저자가 10년 동안 무도한 짓을 일삼았소. 그 패악이 동대문 근방엔 파다했는데 대간들이 몰랐다는 것이 어찌 말이 되겠소? 설령 몰랐다면 그건 대간들이 대간으로서의 소임을 제대로 지키지 못 하였다는 것이니 직무유기가 아니겠소?”

    “···”

    “그렇다면 응당······.”

    친국장이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그리고 고요해진 친국장을 울린 건,

    “응당 그 죄를 청해야지?”

    융의 고저없는 음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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