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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44화 (44/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44화>

    민휘에게 고신을 가하라!

    ***

    이세좌의 일로 모든 직무를 중단하고 자택에서 근신하던 민휘는 갑작스런 금부의 오라를 받았음에도 무덤덤했다.

    그저, 올 게 왔다는 듯 읽던 책을 덮고 금부도사를 따라 집을 나섰다.

    금부 나졸들의 등장에 발을 동동 구르며 걱정하는 가족들에게 조차 “잠시 출타하고 오겠소.” 말할 정도로 그는 평온해보였다.

    그건 친국장에 들어서는 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민휘의 얼굴을 보자마자 융은 인상을 구겼다.

    죄인치고 너무 꼿꼿하다. 그리고 너무 덤덤하다. 그는 형틀이 마치 제 지정석이라도 된다는 듯, 형틀에 앉았다. 그러고는 빤히 융을 올려다봤다.

    그 모습이 같잖아도 너무 같잖아 화가 나지도 않았다.

    다만 죄를 저질렀음에도, 그래서 이 친국장까지 끌려오면서도 꼿꼿한 그 모습은 신경에 거슬렸다.

    “죄인에게 형틀은 필요 없겠다. 꿇어 앉혀라.”

    하명에 머뭇거리던 금부 나장들이 우악스럽게 민휘를 꿇어 앉혔다.

    “신을 찾아 계셨다 들었나이다.”

    민휘는 담담히 입을 열었다.

    이미 자택에서 근신하며 마음의 준비는 해둔 터였다.

    올 게 온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런 민휘도 간과한 게 하나 있었다.

    “지금 왕옥(王獄)에 누가 갇혀 있는지 죄인은 아는가?”

    “예판이 갇혀 있겠지요.”

    융은 냉소했다.

    내막을 알지도 못 하면서 저리 꼿꼿한 척을 했단 말인가?

    가증스럽다.

    끝까지 가증스러운 꼴을 보이는 민휘가 가증스럽고, 그런 민휘를 경외의 눈길로 바라보는 중신들이 가증스럽다.

    “그대의 족친이 갇혀있다.”

    민휘의 짙은 눈썹이 찰나지만 꿈틀거렸다.

    “민택. 그자가 그대의 재종질이라지?”

    융은 비릿하게 웃었다.

    미처 예상치 못 했는지, 민휘의 눈에 당혹스러워하는 빛이 서린 까닭이었다.

    “신의 죄가 집안에 까지 미치는 죄였나이까?”

    “집안에 까지? 그대는 정녕 날 우롱하려 함인가?”

    “···”

    융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대가 세좌의 일 때문에 끌려온 것 같은가? 민택 그자 때문이다. 그대의 족친은 감히 대군을 능멸했다. 어디 대군을 능멸한 것 뿐인가? 과인의 백성을 겁박하고 함부로 매질하였으니, 어찌 그 죄가 없겠는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던 민휘는 곧 신색을 가다듬었다.

    “전하께서 제 조카님에게 죄가 있다 말하신다면 있는 거겠지요.”

    “뭐라? 내가 없는 죄라도 뒤집어 씌웠다는 뜻인가?”

    융은 실소를 흘렸다.

    저런 자가 사헌부의 장관으로 있었단 말인가?

    제 집안에 어떤 위인이 있는지도 모르는 자가?

    “대사헌. 마, 말씀을 삼가게.”

    연이어 억측만 내뱉는 민휘에 극균이 넌지시 말했다.

    극균으로서는 민휘가 답답 할 수 밖에 없었다.

    “금부도사는 죄인에게 지금 왕옥에 갇힌 중죄인의 죄를 하나도 빠짐없이 전하라.”

    “예!”

    금부도사가 끝까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민휘에게 다가가 내막을 전했다.

    곧 민휘의 표정이 일그러질대로 일그러졌다.

    소작농을 겁박하고 매타작을 했다.

    심지어 매타작하는 걸 듣고 말리러 온 대군에게 손찌검을 가했다.

    “어, 어찌······.”

    방금의 덤덤한 민휘는 온데간데 없었다.

    그는 황망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극균.

    윤필상.

    이자건.

    .

    .

    .

    여러 동료들과 눈을 마주쳤지만, 그들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눈길을 피했다.

    그때서야 민휘는 일이 잘못됐음을 직감했다.

    하지만 뒤늦은 깨달음에 불과했다.

    “그대의 족친 민택은 금석리에 사는 자로, 금석리는 동대문을 나서면 곧바로 마을 전경이 보일 정도로 도성과는 지척인 거리에 있다. 한데 그가 벌인 패악은 어떠한가?”

    “···”

    “마치, 저 산간에서 과인의 눈을 피해 저지른 패악 같지 않은가? 아니, 어찌 산간벽지에서도 저런 패악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관이 아님에도 백성을 겁박하고 매질하는 세월이 벌써 10년이 훌쩍 넘었는데 과인은 여태 민택의 일을 들어본 일이 없다. 그대는 어떠한가?”

    “시, 신 또한 들어본 적이 없나이다.”

    “그랬겠지.”

    냉소한 융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죄인에게 다가갔다.

    죄인과의 거리는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로 가까웠다.

    내관들이 어좌를 갖고오자, 융은 그 자리에 착석했다. 그러고는 죄인을 죽일 듯 직시했다.

    민휘는 굳이 그 눈길을 피하진 않았으나, 그럼에도 동공은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리고 있었다.

    “보위에 오른 지난 10년간 나는 군왕으로서 노력을 기울였다. 군왕이 힘들어야 백성들이 잘 살 수 있다는 그대의 간언 때문이었다. 그래, 그대의 마음에는 내가 왕으로서 차지 않았겠지. 선왕과 비교한다면 나는 노름만 일삼는 왕이었을 테니까. 하지만 무릇 사람이란 제각기 노력의 그릇이 다른 법이다. 또 상대적인 법이다. 내가 기울인 노력은 선왕의 것 그 이상이었다. 묻겠다.”

    “···”

    “내가 잠시 정사에 대한 시름을 잃고자 사냥을 한 것이 그리도 못 마땅 하였는가?”

    “···”

    “내가 잠시 정사에 대한 시름을 잃고자 계집을 가까이 한 것이 그리도 못 마땅 하였느냐 말이다.”

    “···전하께서 노력의 크기를 말씀하셨습니다만 군왕은······.”

    “군왕! 군왕! 군왕!”

    “···”

    “그 빌어쳐먹을 일은 왜 나만 해야 하는 것이냐? 왜 너희는 하지 않는 것이냐? 왜 나에게만 강요하면서, 너희는 지키지 않느냐 이 말이다! 너희는 늘 내게 군왕으로서의 몸가짐과 도리를 말했다. 나는 그걸 지킨다면 나의 백성들이 편히 살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어땠느냐? 백성들이 편히 살기보다 너희가 편히 살지 않았더냐? 내가 너희의 말을 좇았다가 본 것은 내 백성이 아파하는 것 뿐이었다. 백성의 고통을 목도했으니 나는 이제 너희의 말을 좇지 않을 것이다.”

    “···”

    “너희는 진실로 위군자다. 위군자 중에서도 만세에 따로 없을 위군자다. 내게는 성현의 말씀과 덕으로 백성을 다스리라 말하면서, 결국 네 족친이 백성을 다스리는 방법은 덕이 아니라 매가 아니었더냐?”

    “신은 진정 몰랐나이다.”

    “그래. 몰랐겠지. 나도 내 생모가 폐서인이 될 정도의 죄를 지었는지는 모르겠으니.”

    “···!”

    융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사정전 섬돌 위로 올랐다.

    “공초를 시작하겠다.”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그 숙연한 분위기 속에 공초가 시작됐다.

    “죄인에게 묻는다. 네 족친의 죄는 진실로 가볍지 않다. 대군이 먼저 신분을 밝혔음에도 손찌검을 가했는데, 이는 극형으로 다스려도 할 말이 없는 중죄이다. 하물며 대군은 그대의 족친에게 시비를 건 것이 아니라 그대의 족친이 매질하는 양인을 구하러 간 것이었다. 그런데도 손찌검을 가했으니 민택의 불의는 도대체 누구에게 발현한 것이겠는가?”

    “···”

    “왕실을 모독하는 것이 민 가의 특성인가, 아니면 그대가 왕을 업씬여기기에 그대의 족친 또한 종친을 업씬여기는 것인가.”

    “신은 전하를 업씬여긴 적이 없나이다.”

    융은 헛웃음을 흘렸다.

    물증은 없어도 정황은 명백했다.

    “그대가 날 업씬여긴 적이 없다면 민택의 죄는 어찌 설명하랴?”

    “개인의 허물이옵니다. 신이 조카가 그런 일을 벌이는 왈패인 줄 알았다면 어찌 가까이 했겠사옵니까.”

    “몰랐다?”

    “신이 어찌 알았겠나이까.”

    “실로 우습다.”

    “···?”

    “너희는 늘 간언을 받들고 구언을 행해 민생을 도모하라 하지 않았는가? 한데 지금껏 너희가 내 귀에 속삭인 것은 간언(諫言)이 아니라 간신들의 간언(間言)이었던가?”

    “간언이라니 당치 않나이다.”

    “너희가 모른다면 구중궁궐에 틀어박혀 너희가 하란대로 경연에나 참가하는 과인이 어찌 백성의 고통을 알 수 있냐 이 말이다!”

    “···”

    민휘에게서 시선을 뗀 융은 잡아먹을 듯 중신들을 노려보았다.

    “그대들 또한 같다!”

    흠칫.

    “이 자리에 있는 자중에 과연 민택의 악행을 들어본 이 하나도 없었겠느냐? 민초들도 다 아는 사실을 그대들이 어찌 몰랐겠는가? 그런데도 어찌 함구하였단 말인가? 그대들이 말한 백성의 범주에는 사대부만이 들어가기 때문인가, 아니면 민택에게 해를 입은 피해자들은 그대들과 그대 족속들에게 한 푼의 이익도 되지 않기 때문에 외면한 것인가?”

    “···”

    “그대들이 궁궐에 틀어박혀 경연만 하라지 않았느냐! 성현의 말씀을 깨우치면 덕치로 나라를 다스릴 수 있다 하지 않았느냐 말이다! 그대들의 말만 좇으면 백성들이 태평한 세월을 누릴 수 있다 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그렇다면 궐 밖에서 일어나는 일은 응당 과인에게 알림이 마땅하지 않은가? 너무 마땅하지 않느냐 말이다!”

    “···”

    “민택에게 해를 입은 팔석의 아들 개똥이가 어찌 자리에 있는 수십 재상들 집에 찾아가지 않고, 정사와 종사에는 하등 관계 없는 대군의 집을 찾았겠느냐?”

    “···”

    “어찌 어린 백성이 해를 입었음에도 재상의 집을 찾지 않고 대군의 집을 찾았느냐 이 말이야!”

    털썩.

    “주, 죽여주시옵소서.”

    말없이 부복하는 필상에 눈물이 났다.

    드디어 필상을 무릎 꿇려서가 아니었다.

    저자가 무릎 꿇는 것과 옥루가 무슨 관계가 있겠나.

    다만 어린 개똥의 모습이 자연히 머릿속에 그려지는 듯 했다.

    그 조막만한 손으로 제 아비를 구하기 위해,

    그래서 그 짧은 다리를 미친 듯 놀려 제 아비를 구하기 위해 달려갔을,

    종국에는 매맞는 아비를 위해 지푸라기라도 잡는 그 심경으로 대군의 저택 문을 두드렸을,

    그 어린 백성이 떠올라서, 그리고 어머니가 끌려감에도 아무 것도 하지 못 했던 무력한 내가 떠올라서.

    소매로 눈물을 훔친 융이 말을 이었다.

    “그대들도 어린 백성 앞에 똑같은 죄인이다.”

    “···”

    융은 다시 민휘에게 다가갔다.

    “그대는 민택의 패악을 정녕 몰랐는가?”

    “신은 정녕 몰랐사옵니다. 알았다면······.”

    “변명은 듣지 않겠다.”

    “···예.”

    “그대는 민택의 일을 알고서 은연중에 그를 비호한 사실이 정녕 없는가?”

    “···없사옵니다.”

    “그대는 밑의 관리를 시켜 민택의 일을 무마시키라 지시한 적이 단 한차례도 없는가?”

    “한 차례도 없나이다.”

    “그대는 민택의 소문을 단 한 번이라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없나이다.”

    융은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럼 그대는 내게 말했던 것처럼 백성의 삶을 스스로 돌본 적이 있는가?”

    “···”

    “과인이 하문했다. 있는가.”

    “···”

    “그대는 나라에 흉년이 들고 기근이 닥쳤을 때, 곳간을 열어 백성을 돌본 적이 있는가?”

    “···”

    “하면 그대는 대군처럼 어려운 일을 당한 백성이 도와달라 저택 문을 두드린 적이 있는가?”

    “···”

    “한 번도 없단 말이냐?”

    “···”

    “네놈이 내게 말했던 덕치는 이제 잘 알겠다. 여봐라.”

    “하문하소서.”

    “죄인이 완악하여 묻는 말에 대답을 하지 않는다. 고신을 가할 것이니 준비하라.”

    역적 모의로 끌려온 것도 아닌 일국의 재상, 그것도 언론을 책임지는 사헌부의 장관을 고신한다.

    평상시 같았다면 친국에 참여한 중신들이 들고 일어났을 테지만, 분위기에 압도된 중신들은 입하나 뻥끗 할 수 없었다.

    아니, 하지 못 했다.

    오히려 가상한 용기는 중신들이 아니라 상선에게 있었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중신을 고신했다는 사실은 사초에도 기록 될 것이옵니다. 전하께서 이미 굳게 마음을 먹었으니 이같은 명을 내린 것이겠지만, 신으로선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나이다. 진정 고신을 가하오리까?”

    상선은 지금껏 융이 묻는 말에 대꾸를 한 적이 거의 없었다.

    그는 그림자처럼 융을 따라다녔고, 어떤 사소한 명일지라도 높게 받들어 따랐다.

    그런 상선의 되물음.

    그리고 대꾸.

    중신들이 더 한심해졌다.

    일개 내시만도 못 한 자들이 아니었던가.

    저런 자들을 믿고 정사를 맡겼으니 자신이 다 한심해질 지경이었다.

    “상선.”

    “예, 전하.”

    “내가 민휘를 고신하면 어찌 기록되겠는가?”

    “사관의 평이란 실로 날카롭고 매서우니 부정적으로 묘사가 될 테지요.”

    융은 동석한 사관을 흘겼다. 그는 역시나 열심히 붓을 놀리고 있었다.

    “저들의 하찮음이 만천하에 증명이 되었는데, 이제 저들의 평이 무에 두렵겠나. 내가 두려워할 것은 후세의 평과 백성들의 평 뿐이다. 고신을 가하겠다.”

    “분부 받들겠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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