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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43화 (43/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43화>

    신하라는 위군자들

    ***

    추포령을 내렸지만, 민휘가 친국장까지 끌려오는 데 소요되는 시간은 최소 반시진이었다.

    기세를 잡았으니 그 기세를 이어나갈 필요가 있었다.

    분위기는 조성이 된 상태라고 봐도 무방했다.

    추포령을 내린 융은 민택에 대한 신문을 재개했다.

    공초를 받으면 받을수록 가관도 이런 가관이 없었다.

    민택은 매사 변명으로 일관했다.

    또, 본인의 죄를 축소시키려 안간힘을 써댔다.

    하지만 그 누가 듣더라도, 심지어 누구보다 민택의 일이 축소되길 간절히 바라는 중신들에게 조차 그 허물이 누구에 있는지는 알만 한 것이었다.

    “···하므로 결국 주인 마님께서 팔석에 매질을 가하라 하시었고 쇤네들이 팔을 걷어 붙이고 매질을 가하는 와중에 팔석이 혼절하자······.”

    신문은 한쪽 말만 들어서는 안 된다.

    객관성을 확보해야 한다.

    때문에 융은 민택의 종과 그 땅을 소작 부치는 소작농 심지어 금석리 주민들까지 소환해 신문에 임했다.

    민택의 공초가 가관에 불과했다면, 소작농과 주민들의 증언에는 기가 차 말도 안 나올 지경이었다.

    민택의 악행은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제 집 종들을 심심찮게 매질하는 건 차라리 약과였다.

    충격적이게도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양인들에 대한 매질도 이번 한 번이 아니란다.

    “어찌 저런 자가 도성 한복판에서 활개침에도 아무도 모를 수가 있었단 말이냐?”

    “···”

    융은 시립한 중신들을 힐책했다.

    하지만 그 누구에게서도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저희들에게 자칫 불통이라도 튈까 입을 꾹 다물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진실로 가증스러웠다.

    “좌윤(左尹)은 답해보라.”

    “···송구하옵니다.”

    한성좌윤 안처량(安處良)이 고개를 조아렸다.

    “좌윤이 답을 못 하니 우윤(右尹)이 답해보라.”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신은 우윤에 제수 된 기간이 얼마 되지 않아······.”

    “과인이 기억하기로 경을 우윤에 제수한 것이 벌써 5개월이 지난 듯 한데 그게 얼마 되지 않은 기간인가?”

    “···송구하옵니다.”

    융은 안처량과 양희지(楊稀枝)를 한심하다는 듯 일별했다.

    한심해도 이만큼 한심 할 수가 없었다.

    거짓말이 아니라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이로 말미암아 칼을 쥐게 되었지만, 역시 이와 별개로 가슴이 아리는 듯 했다.

    저들이 민택에게 받았던 고통은 누가 보상 해줄 수 있단 말인가?

    주민들의 증언을 들어보니 그간 민택의 악행에 병신이 되어 병석에 누운 자들이 한 둘이 아니라고 했다.

    심지어 정조를 잃은 처녀도 한 둘이 아니라고 했다.

    서민이라고 해서 고통이 없는 건 아닐테고, 여염집 처녀라 해서 절개가 없는 건 아닐진대 그들이 입은 상처와 피해는 누가 보상 하느냔 말이다.

    생각 할수록 열이 뻗쳤지만 공초를 중단 할 순 없었다.

    발단은 왕자대군 폭행죄였지만, 증언을 받으면 받을수록 아직 드러나지 않은 죄악이 무수히 많았다.

    “다음 증인을 데려오라.”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음 증인을 호명하자, 금부 나장들이 초로한 노인을 데리고 왔다. 발을 절뚝거리는 게 소위 말하는 다리병신 같았다.

    친국장 한복판에 선 노인은 벌벌 떨다가 나장들의 지시에 오체투지를 위해 몸을 숙였다. 그런 노인을 제지한 건 융이었다.

    “노인은 몸이 불편해 보인다. 그럴 필요 없다.”

    “하오나······.”

    “나장들은 의자를 대령하라.”

    잠시 후.

    나장들이 의자를 가지고 오자, 융은 노인을 그곳에 앉혔다.

    “노인은 이름이 어찌 되는가?”

    “소, 소인은 금석리 사는 전동이라고 합니다요.”

    “금부도사에게 듣자니 과인에게 특별히 고할 말이 있다고 하던데, 무슨 말인가?”

    이번 증인은 좀 특별한 경우였다.

    다른 금석리 주민들은 자발적으로 나온 주민들이 거의 없었다.

    사실이 그랬다.

    제아무리 민택이 친국장에 끌려갔다는 소리를 금석리 주민들이 들었다 한들, 그들에게 민택과 그 집안은 하늘 같은 존재일 터였다.

    아무리 나랏님의 명일지라도 증언을 하기란 쉽지 않았을 테고, 그 과정에서 증언 할 주민을 확보하는 것도 사실상 강제성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전동이란 이 노인은 달랐다.

    거의 유일하게 자발해서 증언을 하러 나온 자였다.

    “아뢰옵기 소, 송구하나······.”

    평생을 땅만 바라보고 산 농군이 궁중의 격식을 잠깐 사이에 배울 수 있을 리는 만무했다.

    눈치껏 격식을 차렸지만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노인은 편히 말하라. 굳이 예를 갖출 필요 없다.”

    괜찮다는 말에도 노인은 괜히 나장들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다, 본인을 데려온 나장이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보이자, 조금은 편안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무지렁이인 소인이 해도 될 말인지 모르겠지만 소인은 교리댁 어르신의 잘못을 고하기 위해 찾은 것이 아닙니다요.”

    교리댁 어르신은 민택이었다.

    금석리 주민들은 흔히 민택을 교리댁이라는 택호와 함께 어르신이라 불렀다.

    “하면 어찌 진술할 게 있다고 나장들을 붙들었는가?”

    “아뢰기 송구하지만 이 노인은 벌써 강산이 일곱 번 변하는 걸 봤습지요.”

    “그렇겠구나.”

    “하나 남은 자식놈도 장사하러 간답시고 호환이라도 당했는지 소식이 끊긴지 20년이 지났고, 50년 해로한 안사람도 재작년에 죽어버렸으니, 이제 소인에게 아쉬울 게 무에 있겠습니까요.”

    “계속하라.”

    “죽을 날을 점지 받고 하루, 하루 근근이 살아가고 있으니 설사 입을 잘못 놀려서 매타작 당해 죽으나, 노환으로 죽으나 매한가지이니 잘못된 관행이나 고할까 합니다요.”

    “관행?”

    “쇤네가 원체 무식해서 관행이라고 표현해도 될는지 모르겠습니다만은 교리댁 어르신의 악행은 동대문 바깥 사는 사람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 것입지요.”

    “과인이 부덕한 소치다. 등잔 밑이 어두워 미처 헤아리지 못 하였다.”

    “나랏님 잘못이라고 할 게 있겠습니까요. 나랏님 귀에는 들어가지도 못 했을 텐뎁쇼. 그저, 그치들의 팔자라면 팔자옵고, 운명이라면 운명인 것입죠.”

    “어허! 네놈이 감히 어느 안전인 줄 알고 입을 천박하게 놀리느냐! 어전이다, 이놈!”

    누군진 모르겠다.

    다만 목소리를 들어보니 윤필상이 아닐까 싶다.

    “부원군은 그만하시오. 들어나 보십시다. 노인은 계속하라.”

    “교리댁 어르신에 병신된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었습죠. 7년 전이었나··· 이웃에 사는 가놀이라는 이가 제 딸이 범해진 걸 듣고 교리댁 어르신을 해하겠다고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요.”

    “실패했겠구나.”

    “···예. 그집 행랑에 머무는 종놈들만 해도 수십이 넘는데 단신으로 어찌 어르신을 해할 수 있겠습니까요. 그러다가 포청에서 사람이 나왔사옵고 가놀이는 포청에 끌려갔습지요. 아, 근데 글쎄 그 가놀이가 병신불구가 돼서 포청에서 나오지 않았겠습니까요?”

    “···”

    “처음에는 그래도 교리댁 어르신을 해하려는 것 때문에 곤장을 맞았나 싶었습죠.”

    “가놀은 어찌 되었느냐?”

    “매 맞고 나와서 한 석 달 뒤엔가? 송장 치렀습죠.”

    “계속하거라.”

    “가놀의 일이 있고 한 2년 뒤에는 석발이라는 친구가··· 아, 이 친구는 어르신 댁에 소작 부치는 소작농이었습니다요. 한데 어르신이 그 땅을 다른 사람에게 주겠다는 말씀에 지대를 올려서라도 본인이 부치고 싶다 아뢰러 갔는데 매질을 당해서 그 집에서 나오게 됐습죠.”

    “과연 한 두 번이 아니구나. 과인이 부덕하다. 참으로 과인이 부덕해.”

    “매질을 당한 건 그런가보다 했습죠. 근데 이 석발이란 친구가 원체 분기가 많은 친구였습니다요. 매질을 당한 게 분하니 형조에 신고를 했습죠. 형조에서 사람이 찾아왔사온데 석발이 매질 당한 일은 유야무야 넘어가고, 오히려 어르신을 겁박한 죄로 매를 맞았습니다요.”

    “석발이는 아직 살아있느냐?”

    “모르겠습니다요. 그 뒤로 마을을 떠나서······.”

    “흠.”

    “석발의 일이 있고 또 1년 뒤에 비슷한 일이 발생했습죠. 이번에도 신고자는 매를 맞고 나왔습니다요. 3번 정도 그 일이 있으니, 이제는 마을 사람들도 아예 신고를 꺼렸습죠. 한데 말입니다요, 나랏님.”

    “말하라.”

    “소인이 암만 무식한 무지렁이라 하나, 정황을 헤아리지 못 하는 건 아닙니다요. 어찌 교리댁 어르신의 잘못을 고한 세 사람이 연달아 매를 맞고 나올 수가 있겠습니까요?”

    융은 참담한 표정과 함께 한숨을 내쉬었다.

    “노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겠다. 상선은 지필묵을 내어오라.”

    때아닌 지필묵 타령에 친국장의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의아함 속에 상선이 지필묵을 가져오자, 융은 일필휘지로 글을 써내려갔다.

    도극난수루(悼極難收淚)

    너무나 애달파서 눈물 거두기 어렵고

    비심수불성(悲深睡不成)

    슬픔은 깊으니 잠 이루지 못 하겠네

    심분장사단(心紛腸似斷)

    마음이 어지러워 애간장이 끊어지는 듯 하매

    종차각상생(從此覺傷民)

    이로 해서 백성이 상하는 줄 이제 알았도다

    일필휘지로 써내려간 글은 시였다.

    융은 전동에게 그 시를 건넸다.

    까막눈인 전동이 뜻을 이해 할 순 없을 것 같지만, 이래야 마음이 조금은 편해질 것 같았다.

    “노인은 스스로 말하기를 죽을 날을 점지 받았다고 하였다. 맞는가.”

    “그렇습죠.”

    “이 시를 노인에게 내리니 죽는 날 관에 들어간다면 함께 넣어 장사 치루라.”

    “가, 감사합니다요.”

    전동이 예를 갖춰 인사를 올리고 친국장을 빠져나갔다.

    친국장엔 잔잔한 바람이 일었다.

    “대사간.”

    “···예, 전하.”

    “전동의 증언을 경 또한 들었을 것이오. 어떠오?”

    이자건은 덤덤히 답했다.

    “마음이 아프옵니다.”

    “과인은 가슴이 미어지는 듯 한데 혹 경도 그러하오?”

    “그렇사옵니다.”

    역시나 덤덤히 긍정하는 자건에 융은 냉소를 흘렸다.

    “저 노인은 죽음을 무릅쓰고 관의 잘못을 고했소. 담담하게, 너무 담담해서 담백하게 느껴질 만큼 증언했지만, 일이 틀어진다면 제 목이 달아난다는 건, 그대들이 업씬 여기는 저 노인도 알고 있었을 테지. 그런데도 관의 잘못을 고했소. 한데 느껴지는 것이 고작 가슴이 미어지는 것 뿐이오?”

    “···”

    “증언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지만, 노인의 살아온 생이 어땠을지 짐작이 되진 않으시오?”

    “···”

    “경들은 들으라.”

    모든 이목이 융에게 집중됐다.

    융은 뭔가 일그러진 표정으로, 그렇게 뭔가 씁쓸한 표정으로, 그래서 분기가 깃든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과인이 보위에 오른 지난 10년간 민택의 허물을 고한 이 있으면 나오라.”

    좌중은 고요했다.

    “하면 금석리 주민들의 일을 언급한 이가 있으면 나오라.”

    역시 고요했다.

    융은 피식거렸다.

    “아무도 없단 말이냐.”

    “···”

    “경들은 늘 내게 말했다. 백성의 삶을 돌보소서. 백성의 아픔을 좌시하지 마소서. 백성을 하늘처럼 받드소서. 백성을 구제하소서. 백성을 군자로 만드소서. 백성을 사랑하소서. 백성을 가여이 여기소서.”

    “···”

    “내 지금 알겠다. 경들이 지난 10년간 내게 했던 말들은 그저 경전에 나온 말들을 외는 것에 불과했다. 실천에 옮긴 이 한 명이라도 있었더냐?”

    “전하. 신 윤필상 아뢰오.”

    “···말하라.”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저 노인의 말은 객관성이 떨어지옵니다. 저 노인의 말대로 금석리 주민 세 명이 세 번이나 관에 고했다면 어찌 민택의 일이 알려지지 않았겠나이까. 노인이 무식하여 어전임을 잊은 듯 하오니, 전하께선 마음 쓰지 마소서.”

    “마음 쓰지 말라?”

    “그러하옵니다.”

    “저 노인의 말이 객관성이 없다면, 객관성은 대관절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경전에서 찾아야 하는가, 아니면 황상 아래 무릎 꿇고 찾아야 하는가? 이것도 아니라면 죽은 공자의 무덤에서 찾아야 하는가.”

    “···”

    “금부는 들으라.”

    “하교하소서.”

    “저 노인이 말한 연도에 형조에 있은 자. 그리고 포청에 있은 자. 모두 색출하라. 내 그 죄를 엄히 물을 것이다.”

    일이 점점 커져감에 중신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에 영의정 성준이 나섰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너무 오래 된 일이옵니다. 과거의 일을 캐내다 억울한 피해자가 나올 우려가 있······.”

    쾅!

    “억울한 피해자? 영상은 억울한 피해자라 하였느냐? 전동이 말한 세 사람이 억울한 피해자가 아니면 누가 억울한 피해자란 말이냐! 영상.”

    갑작스런 임금의 진노에 당황한 성준이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예, 전하.”

    “영상의 자리는 모름지기 백성의 아픔을 과인과 함께 돌보아야 하는 자리 아닌가? 그대들이 연루 될까 전전긍긍하는 게 영상의 자리인가?”

    “그런 것이 아니옵고······.”

    “그게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이냐! 형조와 포청의 관리들이 민휘의 그늘에 압도되어 민택을 감히 잡아 들이지 못 한 사실은 일평생 땅만 보고 산 농군도 아는 이치일진대, 그래서 그 같은 이치를 영상 또한 잘 알고 있다면 민택의 허물을 미리 고하지 못 한 죄를 자진해서 청해야 할 진대, 지금 영상은 과인을 능멸하는가!”

    털썩.

    “시, 신이 어찌··· 송구하옵니다.”

    “그대들 모두 들으라!”

    “···”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이번 일에 있어 사건을 은폐하는 자. 사건을 축소시키려는 자. 사건을 조작하는 자. 모두 극형으로 다스릴 것이다.”

    융이 길길이 날뛰던 그때.

    “전하. 대사헌께서 드셨나이다.”

    “대사헌? 대사헌이 아니라 죄인이다! 형틀을 대령하고 죄인을 꿇어 앉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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