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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42화 (42/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42화>

    사화의 시작

    ***

    대군이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라니?

    상식의 범주를 뛰어넘는 말이었다.

    편전안 모든 사람들은 순간적으로 인지부조화가 일어났다.

    하지만 배운 사람들이 모였다는 편전답게 그들은 곧 의영의 말을 이해 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생사람을 잡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당혹스러워 했지만, 특히 필상의 당혹스러움은 그들의 것을 압도했다.

    생사람을 잡아도 한참 잘 못 잡고 있었다.

    필상은 노신이었다.

    노신도 그저 그런 노신이 아니라, 나이 여든 가깝도록 여섯 임금을 모신 노신이었다.

    그는 여섯 임금을 모셔오면서, 그리고 여든 가깝도록 살아오면서 왕자대군이 패악을 부렸다는 말은 숱하게 들었어도 왕자대군이 피해를 당했다는 말은 들어본 바 없었다.

    이번 일도 그랬다.

    민휘를 구원하기 위해 편전에 들었었고 마침 대군이 사건에 연루되자, 으레 가해자라 짐작하고 민휘의 일을 무마시키려 했었다.

    그런데 대군이 피해자라니··· 어떻게 보면 왕자대군을 세치 혀로 능멸한 셈이었다.

    꿀꺽.

    필상은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부들부들.

    몸을 부르르 떨고 있는 임금이 보였다.

    임금께선 감정을 추스르는 일에는 서툴렀다. 그래서 편전에서도 화가 나는 일화를 들으면 화를 내기도 하셨고, 백성이 마음 아픈 일을 당하면 눈시울을 붉히기도 하셨다.

    그만큼 감정을 추스르는 일에는 서툴렀고, 또 굳이 추스르고자 하지도 않으셨었다.

    그런 원자 시절부터 30년 가까이 봬왔다.

    전하께선 원자 시절부터 감당하기 벅찬 분노를 당하시면 말이 없어지고, 금방이라도 눈이 충혈되곤 했다.

    그리고 지금이 딱 그러셨다.

    두 눈이 충혈 된 채 말없이 중신들을 직시하고 계셨다.

    “일이 틀어졌으니 이를 어찌 하면 좋겠습니까?”

    옆에서 이극균이 조용히 귀엣말을 건네왔다.

    필상은 임금의 눈치를 살피며 답했다.

    아니, 답하려고 할 때였다.

    “···참의는 전말을 낱낱이, 하나도 빠짐없이 고하라.”

    곧이어 박의영이 자세한 내막을 전하기 시작했다.

    전말이 알려지면 알려질수록 필상을 비롯한 중신들의 표정은 하얗게 질려갔다.

    차라리 대군이 먼저 시비를 걸어 피해자가 된 거라면 어찌 구사일생 할 길이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리하여 마침내 대군께서 그 개똥이란 아이와 민택의 집을 찾았던 것이온데······.”

    말을 이어나가던 의영이 읍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임금이 옥루를 흘린 까닭이었다.

    “···하면 대군은 개똥의 아비 팔석의 일에 가여운 마음이 들어 나선 죄 밖에 없단 것인가?”

    “저, 정황을 헤아려보자면 그렇사옵니다. 때마침 팔석이 얼굴이 퉁퉁 붓고 매질을 당해 거동이 불편한 모습에 대군께오서, 어찌 제 소작이랍시고 그리 종놈 대하듯 할 수 있냐 꾸짖었사온데 민택이 듣지 아니하고, 대군께 손찌검을 하더니 사칭범으로 몰아가며 말동으로 하여금 형조에 신고를 하게 했······.”

    “···그만하라.”

    임금의 거수와 함께 편전에는 적막이 휘몰아쳤다.

    그 적막은 짧고, 짧았지만 필상을 비롯한 중신들이 체감하기에는 억겁 같았다.

    적막을 비집고 나온 것은 갈라진 임금의 육성이었다.

    “영상.”

    “···예, 저, 전하.”

    “내 오늘 친국을 해야겠으니 석강은 미뤄야겠다. 괜찮겠는가.”

    “어, 어찌 시, 신에게··· 구, 국문을 여시는 것이라면 서, 석강이 무에 대수겠나이까. 저, 전하의 뜻대로 하소서.”

    “부원군.”

    필상은 여태 여섯 임금을 모시면서 심장이 덜컹 내려앉은 적은 많았어도 목소리가 떨린 적은 많지 않았다. 하물며 말을 더듬은 적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예외였다.

    “에, 예··· 저, 전하.”

    “부원군은 무릇 종사에 관계된 일이라면 왕실의 일이 선무가 되는 법이다 하였다. 맞는가.”

    “그, 그렇사옵니다. 신이 분명 그리 말씀 아뢰었나이다.”

    “좌상.”

    “예, 전하······.”

    “좌상은 방금 참의가 편전에 들기 전에 대사헌 민휘의 일도 중하나 지금 시급해진 일은 대군의 일이라 하면서, 대군이 그 지위를 이용해 백성을 구타한 일은 작은 일이 아니라 하였다. 하면 대군이 백성에게 구타 당한 일은 어떠한가?”

    “···”

    입을 열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금부는 들으라.”

    “전교하소서.”

    “내 오늘 여기 사정전 뜰에서 국문을 열 것이다. 지금 속히 민택과 그 종놈들을 끌고오라. 대군을 겁박한 놈이라 처자를 숨길 수 있으니, 그 처자 또한 모두 끌고오라.”

    “그리하겠사옵니다.”

    “친국은 금부에서 준비를 마치는대로 거행하겠소. 경들 모두 참석하시오.”

    통보하듯 말한 융은 편전을 빠져나갔다.

    융이 빠져나가고 중신들이 대책을 논했지만, 이미 틀어져도 한참 틀어진 마당에 대책이란 게 나올 리 없었다.

    ***

    금부에서는 친국 준비까지 두시진 가량이 소요된다고 일러왔다.

    기분이 언짢았다.

    지금껏 기다리고 기다리던 일이지만, 칼을 이렇게 휘둘고 싶진 않았다.

    어떻게 보면 진성 아우를 이용하는 셈이니까.

    꿀꿀한 마음에 진성을 불렀다.

    형조에서 처결을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인지, 아우는 금방 강녕전에 들었다.

    표정을 굳히고 있던 융은 언제 그랬냐는 듯 환히 웃었다.

    “여! 아우님.”

    “어우, 덥다. 안 더우세요? 저희 집에 대자리 하나 있는데 그거 하나 갖다 드릴까요.”

    친국을 앞두고 웃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저 밝고 유쾌한 아이만 보면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그래서 더 걱정이 됐다.

    저 아이마저 마음을 돌릴까봐.

    “여전히 밝아서 다행이구나. 망측한 일에 연루됐다 하여 의기소침해 질 줄 알았는데.”

    “아, 그 일이요. 솔직히 좀 어이가 없긴 했는데··· 여기 보실래요?”

    그렇게 말하면서 진성이 제 볼을 내밀었다.

    “빨갛죠?”

    빨갛지는 않았다.

    “그, 그런 것 같구나.”

    “이게, 거기서 맞은 거라니까요.”

    “일은 들었다.”

    “어찌나 개차반이던지, 하긴 제 소작도 패는 놈인데 대군인들 못 패겠습니까? 그런 놈은 아주 다리몽둥이를 분질러야 하는데······.”

    “넌 마음이 여린 듯 하다.”

    “제가요?”

    끄덕.

    “개똥의 일에는 어찌 참견하게 된 것이냐. 혹 네가 잘 아는 아이였더냐?”

    “아뇨. 마침 집에서 할 일도 없이 빈둥거리고 있는데 그 아이가 찾아왔거든요.”

    “갑자기 말이냐? 아무 연고도 없는 네게?”

    “예. 자기가 사는 마을에 뭐, 똑똑한 형님이 하나 계신데, 그 형님이 나는 도움을 줄 수 없으니 저한테 찾아가라고 했나봐요.”

    “그자의 이름은 무엇이라더냐?”

    “석평···이라던가?”

    “그래서, 그 개똥이란 아이가 다짜고짜 널 찾아오니 도움을 준 것이로구나?”

    “사람이 또 어떻게 꼬마 아이 부탁을 외면합니까. 얘기 들어보니까, 지주도 아주 갑질을 밥먹듯 하던 위인이라서 약간 과거의 저랑 오버랩······.”

    “오, 오버?”

    “아, 마음이 쓰였단 말입니다. 좌우지간 마음도 쓰이고··· 막상 갔는데 피가 떡이 돼서 누워있는 개똥이 아버지를 보니까 저도 화가 나서······.”

    “화가 날 만 하다. 제 종놈을 함부로 매질해도 손가락질 받거늘 어찌 양인이 양인을 매질한단 말이냐.”

    “제 말이요. 근데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도령이랑은 상관 없으니 꺼지라는 둥··· 어휴. 아, 근데 이번 일로 제가 형님 전하께 폐 끼치거나 그런 건 없겠죠?”

    “폐?”

    “일단 화가 나서 일을 저지르긴 했는데, 저지르고 보니까 예전에 그 살곶이벌 때 일이 떠올라서······.”

    작게 웃은 융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일 없다. 설령 있어도 없어야 한다.”

    “다행이네요.”

    “저기, 진성아.”

    “예.”

    “너는 이 형님을 믿느냐?”

    잠시 말이 없던 진성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믿죠.”

    “어찌? 어찌 날 믿느냐?”

    “가족이니까?”

    장난스레 답하는 진성에 너털웃음을 터뜨린 융.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표정을 하다 입을 열었다.

    “네가 알던 내가 갑자기 변한대도 날 믿을 테냐?”

    “어떻게 변하시냐에 따라 다른 거 아닐까요?”

    “예를 들면?”

    “방금 제가 겪은 것처럼 애꿎은 소작농을 불러다 매질 한다던가··· 아니면 지위를 이용해서 협박을 한다던가, 뭐 그런 것들?”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럼 됐죠, 뭐.”

    “전하. 금부경력(禁府經歷) 박기(朴基)가 알현을 청하옵니다.”

    상선이었다.

    “알았다. 잠시만 기다리라 전하라.”

    “그리 전하겠사옵니다.”

    융은 진성을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진성아.”

    “아, 예.”

    “지금부터 큰 일들이 벌어질 것이다.”

    “큰 일이라시면······.”

    “친국이다.”

    “친국······.”

    “그게 시발점이 될 테지. 사람들은 날 두려워할 것이다. 그래서 종국에는 폭군이라 수군거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단언컨대 네가 말한 것처럼 변할 일은 없다. 백성을 사랑하고, 백성을 위하는 군주가 될 것이야. 그러니, 너 마저 등돌리진 말거라.”

    “···무, 무슨 말씀이신지······.”

    “이게 어렵다면 하나만 기억하거라.”

    “마, 말씀하십쇼.”

    “이건 우리 왕가를 위한 일이기 전에 백성들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 이것만은 꼭 명심해야 한다. 알겠느냐?”

    “아, 알겠습니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답하는 진성이 융은 자못 걱정스러웠다.

    제대로 알아 들은 것 같지가 않았다.

    하지만 진성을 이해시키기엔 시간이 촉박했다.

    ***

    진성을 내보낸 융은 약간의 공백과 함께 친국장으로 향했다.

    친국장은 편전에서 이른대로 사정전에 마련됐다.

    타탁- 탓.

    사정전은 화롯불 타는 소리를 제외하곤 고요했다.

    어두침침한 표정의 중신들은 융이 어좌에 오르자 읍을 했다.

    중신들을 일별한 융은 봉교추국과 함께 끌려온 죄인들을 흘겼다.

    죄인들은 하나같이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죄인의 단자(單子)이옵니다.”

    금부경력 박기가 종이를 몇 장 건넸다.

    보통 때의 친국이라면 이미 죄인의 단자는 물론 약력까지 모두 보고를 받고 친국장에 나왔겠지만, 오늘 날의 친국은 속전속결이 우선되는 친국이었다.

    따라서 보고도 친국장에서 듣는 융이었다.

    “흐음··· 선대가 함께 벼슬을 지냈군.”

    보고서를 쓱 훑어보니 유학이라고만 기재되어 있었다.

    아비와 할아비는 고관대작은 아니어도 나름 청요직이라 손꼽히는 홍문관에서 벼슬을 지냈는데 반해, 자식 놈은 변변한 백패(白牌, 생원이나 진사 급제자에게 주던 증서) 하나 받지 못 한 것 같았다.

    “죄인은 고개를 들어라.”

    “저, 전하··· 신. 동대문 금석리 사는 미, 민택······.”

    “죄인의 인사는 받지 않겠다.”

    “전하. 시, 신은 어, 억울하나이다.”

    융은 피식 웃었다.

    고금의 역사를 상고해본다면 죄인들은 늘 억울하다.

    억울하지 않은 죄인은 하나도 없다.

    “대군에 감히 손찌검을 한 네놈이 억울할 게 무에 있단 말이냐?”

    “그, 그건······.”

    “됐다. 친국을 시작하겠다.”

    융이 친국을 선포하던 그때였다.

    사정전문으로 금부도사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오기 시작했다.

    친국에 앞서 지각을 했으니 벌을 줘도 할 말이 없겠지만, 분위기를 망치고 싶진 않았다.

    다만 금부도사는 제 자리를 찾아 가기보다, 어좌로 향해 다가왔다.

    그가 걸음을 멈춘 곳은 금부경력 박기가 시립해있는 섬돌이었다.

    그러고는 곧바로 박기에게 뭐라 속삭였다.

    “뭐라, 그게 참말이냐?”

    “예.”

    “어찌 그같은 사실을 이제 알린단 말이냐?”

    “보고 과정에서 누락이 된 듯 하옵니다.”

    금부경력과 도사의 실랑이를 지켜보던 융이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일인가?”

    연유를 묻자 황망한 표정을 짓던 박기가 조심스레 섬돌 위로 올라왔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무엇이냐?”

    “미, 민택 저자와 대사헌 영감이 족친이라 하옵니다.”

    “민휘와?”

    “그, 그렇사옵니다.”

    박기의 말을 곱씹던 융의 입이 곧 귀에 걸렸다.

    “속히 대사헌 민휘를 추포해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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