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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41화 (41/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41화>

    반전에 반전의 미학

    ***

    평온하던 형조가 발칵 뒤집혔다.

    무려 왕자 사칭범이 들어온 까닭이었다.

    불과 몇 년 전, 간 크게 관헌을 사칭한 대도(大盜) 홍길동의 무리가 있긴 했지만, 감히 왕자를 사칭한 자는 없었다.

    “신고자는 누구인가?”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아니고, 백주대낮에 홍두깨를 맞은 인물은 형조참의 박의영(朴義榮)이었다.

    상급자들이 전부 이세좌의 일로 조회에 참석해 있는 지금 형조를 지휘할 수 있는 이는 박의영 뿐이었다.

    박의영은 아득한 마음과 함께 소식을 가져온 서리에게 물었다.

    그러자 20년 서리 인생에 이런 일은 또 처음이었는지, 서리 역시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동대문 밖 금석리 사는 학생 민택의 종 말동이라는 자였사옵니다.”

    “그자가 제 주인의 명을 받고 신고를 한 것이렷다?”

    의영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직도 가슴이 진정이 안 된다.

    왕자 사칭범이라니······.

    “한데··· 의아한 것이 있사옵니다.”

    “의아? 어떤 것이?”

    “왕자 사칭범이 너무 드레지게 포박에 응해서 군사들이 차마 포승을 채우지도 못 했다고 하옵니다.”

    “자세히 말씀해보게.”

    “그러니까······.”

    서리가 군사들이 민택의 집에 들이닥쳐 사칭범을 포박하던 정황을 전하자, 의영은 혀를 내둘렀다.

    “간이 큰 자인가.”

    “아니면 예전 홍길동의 무리처럼 재상과 연이 닿은 게 아니겠사옵니까?”

    조심스레 의견을 피력하는 서리에 의영은 버럭 호통쳤다.

    “입조심 하게! 그 입으로 누굴 죽이려고.”

    홍길동의 무리는 엄귀손을 믿고서 관헌을 사칭한 도적 무리였다.

    하지만 제아무리 날고 기는 재상이라 한들 감히 왕자 사칭범을 뒤봐줄 이는 없었다.

    왕자 사칭범에 비하면 새발의 피에 불과한 관헌을 사칭한 홍길동의 무리를 뒤봐준 엄귀손도 결국 옥중에 숨을 거뒀으니 말이다.

    한데 왕자 사칭범을 뒤봐준 재상이 있다?

    사건은 일파만파로 번져나갈 터였다.

    ‘가뜩이나 주상께서 신경이 예민하시거늘 그런 일이 있다면······.’

    으으.

    절로 오한이 드는지 의영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있다면 조정은 줄초상이 날 터였다.

    나라에 공로가 있는 예판조차 죄주시려는 전하신데, 하물며 종친을 능멸한 자를 뒤봐준 재상이라면 구족이 멸해져도 할 말이 없었다.

    “소, 송구하옵니다.”

    “어느 재상이 감히 왕자 사칭범을 비호하겠나. 그저 실성한 놈일 테지.”

    동감하는지 서리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실성한 놈이 아니고서야 백주대낮에 왕자를 사칭할 간 큰 백성은 없었다.

    “그 도적 놈 면상이나 한 번 보지.”

    의영은 이미 사칭범을 도적으로 낙인 찍었다.

    왕자를 사칭한 놈들은 없었어도 세도가의 종이나 관헌을 사칭해 돈을 뜯는 모리배들은 종종 있었던 때문이었다.

    그 왕자 사칭범도 비슷한 경우였겠지.

    “소인이 뫼시겠나이다.”

    잠시 후.

    서리와 함께 마당으로 나온 의영은 눈을 게슴츠레 치켜떴다.

    마당 한복판에 신고자로 보이는 종놈과 사칭범으로 보이는 도적이 있었다.

    다만 흥미로운 점은, 종놈은 서슬퍼런 형조 관원들의 눈길에 부복한 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고, 사칭범은······.

    ‘흐음. 확실히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자로다.’

    그게 아니라면 설명이 안 된다.

    어지간한 사람들은 형조에 끌려오면 넙죽 부복부터 하고 본다.

    세도가의 자제가 아닌 이상, 대부분이 그랬다.

    그런데 사칭범 놈은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로 앉아 있었다.

    반개한 눈과 쥐죽은 듯 양무릎에 올라가 있는 손만 본다면 좌탈한 고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모습.

    저리 간이 크니 왕자도 사칭 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을 무렵.

    ‘한데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단 말이지.’

    의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얼굴 크기에 비해 흑립이 다소 큰 데다, 흑립이 살짝 기울어져 있어서 상판은 잘 안 보이지만 어딘가 낯이 익은 모습이었다.

    ‘복색도 말끔하구나.’

    뭐, 홍길동의 무리도 관복을 챙기고서 관헌을 사칭했으니, 왕자 사칭범이 그러지 말란 보장은 없지만 일단 겉보기로는 멀쩡해보이는 모습이었다.

    “네놈이 신고자렷다?”

    “아이쿠, 예!”

    “내 여기 서리에게 듣기론 저자가 감히 왕자를 사칭하고 네 주인 댁에서 패악을 떨었다고 들었는데 사실이냐?”

    “그, 그렇습니다요. 처음에 장정 한 사람을 시켜 도끼로 제 주인 댁 문을 부수더니 다짜고짜 종놈을 시켜 가갈을 하지 않겠습니까요?”

    “가갈까지? 가관이로다. 가갈은 어찌 했느냐?”

    “진성대군 행차시다. 길을 비켜라. 라고 소인이 똑똑히 들었습죠.”

    “진성대군?”

    의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저 간 큰 놈이 하필이면 진성대군을 사칭했다니.

    진성대군은 최근 주상께서 총애하는 왕자대군이었다.

    일개 종친을 능멸한 일도 참형을 면치 못 할 텐데, 하물며 왕이 총애하는 대군을 사칭했으니······.

    쯧쯧.

    가볍게 혀를 찬 의영이 입을 열었다.

    “하면 저 사칭범은 아무 연고도 없는 네 주인 댁의 문을 도끼로 쳐부순 것이냐?”

    “아, 그게······.”

    종놈이 난처한 표정을 보이는 그때였다.

    “이제부터 제가 설명 드리면 될까요?”

    여태 말이 없던 사칭범이었다.

    이맛살을 구긴 의영은 고개를 돌려 사칭범을 바라보았다.

    방금 못 본 그 상판이나 자세히 눈에 담기 위해서.

    그리고 그 상판이 눈에 확대될 무렵.

    “억!”

    그는 체신머리 없이 억! 소리를 냈다.

    “대, 대군마마!”

    ***

    대질 신문은 금세 중지되었다.

    박의영이 진성을 알아본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대군이라는 위치 때문에 자주 뵐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잔치가 있을 때마다 먼발치에서 뵀었고, 가장 최근에는 몰래 궐 담장을 넘은 주상 전하를 찾으러 갔다가 살곶이 벌에서 뵀었다.

    당돌하게 중신들의 잘잘못을 따지던 그 모습이 의영의 머릿속엔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런 왕자대군을 사칭범이랍시고 군사들이 끌고 왔으니······.

    골이 지끈거리는 기분이었다.

    “자넨 도대체 일의 전후를 헤아려보지도 않고 어찌 신고자의 말만 듣고 대군을 포박해왔단 말인가?”

    불통은 애꿎은 서리에게로 튀었다.

    하지만 서리로서도 퍽 억울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신고자는 말동이었지만, 신고를 지시한 건 민택이라는 자였다.

    민택은 비록 한량에 학생 신분이었지만, 서리 신분으로선 무시 할 수 없는 자였다.

    민 씨 가문의 족벌이었고, 대사헌 민휘 영감과는 7촌 사이였다.

    그 패악이 동대문 일대에 자자하면서도 관헌들이 쉬쉬한 건 그 때문이기도 했었다.

    한데 그런 민택의 신고를 받고도 무시를 한다?

    대사헌 영감이 제아무리 청백한 분이라 한들 팔은 안으로 굽기 마련.

    일개 서리인 그는 당장 모가지가 달아나도 할 말이 없었다.

    “송구하옵니다······.”

    억울하긴 했지만 서리가 할 수 있는 말은 제한적이었다.

    고개를 조아리며 송구하다 아뢰는 서리에 의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멀리 형조의 대청에 앉아 발을 동동 구르면서 한가로이 일처리를 기다리고 있는 대군을 바라보았다.

    “휴우.”

    “···어찌 하올까요?”

    “소란이 있었던 건 사실인가?”

    “예. 그건 확실하옵니다.”

    “폭행 사건이랬던가?”

    “그렇사옵니다.”

    폭행 사건.

    상식적으로 왕자 대군을 폭행할 간 큰 놈은 없으니, 당연히 왕자 대군이 가해자일 터였다.

    하지만 확실한 건 아니었다.

    확실히 알아보는 게 중요했다.

    “냉수 한 사발만 떠오게.”

    잠시 후, 서리가 냉수를 떠오자 의영은 냉수가 담긴 질그릇을 들고 진성대군에게 향했다.

    “날이 덥사옵니다.”

    “아, 고맙습니다. 마침 목 말랐는데.”

    “저기, 대감.”

    “예?”

    “제가 신문을 하는 것은 아니옵고··· 그저, 대감께오서도 아시다시피 형조에 속한 관원중 한 사람이다 보니 개인적으로 궁금해서 여쭙는 것이온데······.”

    의영은 ‘개인적’이라는 부분을 강하게 발음하며 말문을 이었다.

    “어찌 된 영문이옵니까? 혹 대감께오서 저 종놈의 주인과 시비가 붙어 주먹질을 한 것 이옵니까?”

    “아, 그거요. 어떻게 된 거냐면······.”

    자초지종을 털어놓는 진성대군에 의영의 안색은 파리하게 질려갔다.

    전말을 전해 들은 의영은 발등에 불똥 떨어진 것처럼 형조를 박차고 뛰쳐나갔다.

    그의 머릿속에는 검무 추는 임금이 자연히 그려지는 듯 했다.

    ***

    “대사헌 민휘의 일도 중하나 지금 시급한 일은 대군의 일이라 사료되옵니다. 대군이 그 지위를 이용해 백성을 구타한 일은 작은 일이 아니옵나이다.”

    진성대군의 일은 대신들에게 있어서 좋은 물타기 소재였다.

    그들은 ‘아직 확실한 건 아니지만 진성이 폭행 사건에 연루가 됐다’ 두리뭉술하게 말했던 임금의 말을 아예, ‘진성대군이 지위를 이용해 백성을 핍박했다’로 기정사실화 해버렸다.

    사실 무리도 아니었다.

    상식적으로 폭행 사건에 대군이 연루됐다면, 그 가해자는 누구라도 대군이라 생각할 테니까.

    중신들의 성토 아닌 물타기는 장시간 이어졌다.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 물고 늘어졌다.

    융이 화제를 전환할라치면, 금세 양녕대군의 일을 꺼내들며 이번 일을 강조했고, 융이 민휘의 일을 거론하면 중신과 대군이 죄를 지었다면, 대군의 일이 급선무라며 물타기를 해댔다.

    의도는 뻔했다.

    시간을 벌기 위함일 터였다.

    저들에게 민휘는 왕을 겁박 할 수 있는 수단이요, 도구니까.

    그래서 그런 사람이 하나라도 사라진다면 앞으로는 제놈들이 활개치지 못 할 테니까.

    지금처럼 시간을 끈다고 묘수가 나오는 건 아니지만, 저들의 입장에선 당장 민휘를 세좌처럼 벌하는 것보단 나을 것이었다.

    융으로서도 대군의 일을 무작정 덮어놓고 민휘의 일만 캐묻는 건 명분이 안 서는 일이었다.

    사실상 민휘를 처벌하는 건, 혹자가 보기엔 애매한 감이 있었지만 대군의 일은 전혀 아니니까.

    융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 일은 차제에 논하도록 합시다. 아직 확실한 건 없지 않소.”

    “어찌 차제에 논하라 하시옵니까? 대군의 일을 지금 덮어둔다면 나라 안팎의 백성들이 왕실을 어찌 생각하겠사옵니까?”

    눈엣가시 윤필상이었다.

    “부원군은 종사를 논하려거든 민휘의 일부터 매듭 짓고 논하시오. 대신이란 작자들이 아직 확실하지도 않은 일에 매달리는 꼴을 보면, 흡사 어린 대군이 틈을 보여 일을 그르치길 기다린 것 같지 않소. 부끄럽지 않소들?”

    명분을 상실한 융이 할 수 있는 말은 감정 호소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닳고 닳은 대신들이 그 감정 호소에 넘어갈 리는 역시 만무했다.

    “전하께서 종사를 논하려거든 민휘의 일부터 매듭 지으라 하셨습니다만, 무릇 종사에 관계된 일이라면 왕실의 일이 선무가 되는 법이옵니다. 또, 어린 대군이 틈을 보여 일을 그르치길 기다린 것 같은 모양새라 하셨습니다만 신들이 어찌 그렇겠사옵니까? 신들은 그저······.”

    필상이 말을 이어나가는 그때.

    편전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전하. 형조참의 박의영 입시이옵니다.”

    상선의 알림과 함께 연신 헐떡거리는 박의영이 편전에 들었다.

    융은 또 다시 인상을 구겼다.

    이 편전에 있는 것들은 죄 장사치다.

    어떻게든 군왕을 겁박하고, 본인들의 잇속을 채우려는 장사치들.

    같은 맥락에서 박의영도 마찬가지였다.

    형조에서 대기 중이던 박의영이는 가장 먼저 소식을 접했을 터였다.

    당연히 편전에서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다는 소리도 들었을 터였고, 쐐기를 박으려 했을 것이다.

    이 자리에서 대군을 신문 할 수 있게 해달라는 재가를 내려달라 한다면 그로서도 물릴 명분이 없으니까.

    그렇다면 어떻게든 민휘의 일을 들먹이며 대군의 일을 축소시키려 했던 융의 입지도 좁아질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속전속결로 대군의 일부터 처리 될 터였고, 민휘의 일은 그만큼 흐지부지 될 가능성이 컸다.

    “참의. 대군께선 형조에 계시는 것이오?”

    동상이몽이라 했다.

    융과 비슷한 생각을 하지만, 결과는 달리 생각하는 중신들은 박의영의 입시를 반겼다.

    그들에겐 박의영의 입시가 절호의 한수였을 테니까.

    “그, 그게······.”

    “그래, 말씀해보시오. 대군께서 백성을 핍박하였다는데, 어찌된 영문이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자신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달싹이는 의영에 융은 시간이 멎은 것 같았다.

    “뜸 들이지 말고 어서 말해보시오!”

    그리고, 마치 정해진 답을 내놓으라는 듯 의영을 채근하는 필상에는 살심이 일었다.

    “마, 망측한 일이오라······.”

    “망측하고 말고 할 게 어딨소? 이미 대군께서 백성을 핍박하였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소이다. 속히 전말을 털어놓으시오.”

    의영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럴 줄 알고 뭐 빠지게 달려왔건만 일은 이미 틀어진 것 같았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대군께오서 가해자로 연루된 것이 아니오라 피해자로 연루가 된 것이라 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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