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군으로 살어리랏다-40화 (40/365)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40화>

폭행 사건에 연루된 대군마마

***

내가 진성대군이 되기 전에는 SNS 선동이란 게 참 많았었다.

예컨대 B라는 사람이 어떤 사건에서 본인이 피해자랍시고 SNS 여론에 호소하면, 해당 사건에 분노한 여론이 들고 일어나고 사건은 확대 된다.

하지만 사건이 확대 되고 보니 피해자랍시고 호소했던 B가 가해자였다던지 혹은 무고로 밝혀진다던지, SNS가 제 기능을 못 한 일이 참 많았다.

꼭 SNS 선동 같은 일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어떤 사건이든 쌍방의 말을 잘 들어봐야 한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

개똥이의 말에 분노하긴 했지만 어떤 곡절이 숨어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나는 최대한 냉정을 유지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내 눈앞에 펼쳐져 있는 상황은 갑질의 표본을 보여주고 있었다.

피떡이 돼서 널부러진 개똥의 아비 팔석을 보니 과거의 내가 떠올랐다.

어디가서 쳐맞고 다니진 않았지만 어려서부터 많은 일을 해보고, 많은 사람들과 부딪혀보니 비상식적인 일을 셀 수 없이 당했었다.

치킨 배달을 할 때는 내려가는 길에 음식물 쓰레기를 갖다 버려달라던지.

음료수가 시원하지 않으니 다시 갖다달라던지.

이건 애교로 넘어가줄 수도 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시간이 애매하게 떠버려서 호프집에서 4시간 정도 파트타임 알바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점잖게 생기신 중년 손님 네 분이 와서 안주 두 개를 시켜놓고 술이 불콰하게 취하자, “이 정도면 안주도 많이 시킨 것 같은데 서비스 하나 없냐” 투덜거렸었다.

여기까지라면 으레 있을 수 있는 일이었지만 난생처음으로 뺨을 맞았다.

“마카로니는 얼마든 더 드릴 수 있지만 따로 제공되는 서비스 안주는 없습니다.”

알바 따위가 말대꾸를 한다는 게 그 이유였다.

이런 일들을 자주는 아니어도 종종 겪었던 나는 약자의 설움을 최소한 다른 또래 친구들보단 잘 알았다.

하물며 지금 팔석이란 아저씨가 당한 상황은 내가 겪은 일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

“저분이 네 아버지 맞······.”

사실 확인은 필요했다.

함께 따라온 개똥에게 바닥에 피떡이 돼서 널부러진 아저씨를 가리키며 묻자, 차마 말을 맺기도 전에 개똥이 뛰어나갔다.

“아부지!”

엉엉 울며 아저씨의 품에 안 기는 개똥이를 보니 괜히 내가 다 눈시울이 붉어진다.

자식이 달려옴에도 팔석 아저씨는 미동도 없었다.

그때.

“왠 소란이냐. 팔석이 깨어나기라도 했··· 음?”

동파관(東坡冠)에 심의(深衣) 차림의 중년인이 방에서 나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개똥의 아버지를 피떡이 되도록 두들겨 팬 원흉일 터였다.

“뉘시오?”

“이분은 주상 전하의 아······.”

정체를 묻는 중년인에 덕산이 대꾸하려 하자, 나는 황급히 덕산의 입을 틀어막았다.

괜찮은 생각이 떠오른 탓이었다.

“그냥 외가에 놀러온 학생인데요”

“학생? 어느 집안 사람인고?”

“이 가(家)요.”

“여기 금석리엔 반 가와 민 가 밖에 아니 사는데··· 아니, 그건 그렇고 도령은 어인 일로 이 집을 찾았는고?”

하여간 나이 많다고 은근슬쩍 말놓는 꼰대들은 여기나 저기나 새고 샜다.

“저 아이가 제 아버지가 지금 땅주인에게 매질을 당하고 있으니 도와줄 수 있느냐 해서 찾아왔다. 한데 매질을 하셔도 적당히 하셔야지, 아주 피떡을 만들어 놨네?”

빠직.

“도령은 예를 어디서 배웠는가. 친가에서 배웠는가, 외가에서 배웠는가?”

“댁은 어디서 배웠는데? 난 또 말을 놓으시길래 친구하자는 줄 알고 말 놨지.”

“허허. 부친의 함 자가 어찌 되시는가?”

“알면 다치는데.”

“쓰읍. 어린 도령이 맹랑하구만. 뭣들 하느냐. 밖으로 뫼셔라.”

“저기, 주, 주인 나리 이분께서는······.”

“밖으로 뫼시래도!”

“예!”

중년인의 노비들이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송구하오나······.”

“응, 안 나가.”

“···”

나는 사랑방 대청에 올라 아예 망부석처럼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렇게 주인 허락도 없이 대청에 앉아 있으면 나도 저 소작농처럼 패나?”

“도령. 참는 것도 한계가 있네.”

“그럼 참지 말던가.”

부르르.

“쫄리나? 쫄리면 뒈지시던지.”

“뭣들 하느냐! 당장 내쫓으라지 않느냐!”

“하나만 물읍시다.”

“휴··· 뭔가.”

“저기부터 저기까지가 댁 땅이라지?”

“그런데?”

“팔 생각 없나? 내가 저 땅이 좀 마음에 드는데.”

“도령 같으면 선대부터 내려온 땅을 함부로 팔겠는가?”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건 그렇겠네.”

“도령. 내 도령이 뉘집 자제인진 모르겠으나, 금석리에서 이리 설치고 다닌다는 걸 자네 외친들이 안다면 경을 칠 걸세. 내 촌에서 상경한 도령이라 이번 한 번만은 눈 감아주지. 나가보게.”

참을 인자를 되뇌이는 게 눈에 훤히 보이는 중년인에 나는 아예 대 자로 뻗었다.

“끌고 나가던가.”

라고 말하자마자 제 분에 못 이겼는지 중년인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러더니,

쫘악-!

“패악질도 상대를 봐가면서 해야 하는 법이거늘, 어디 감히 내 앞에서 패악을 떤단 말이냐?”

따끔한 통증에 아에이오우, 입가 근육을 풀었다.

아귀 힘이 의외로 약한지, 내가 호프집에서 손님에게 맞았던 따귀처럼 귀가 멍멍하거나 하진 않았다.

다만.

기분은 나쁘다.

“때렸어?”

“하! 아직 정신이 덜 든 모양이로다. 아니면 실성을 했던지. 말동아.”

중년인이 노복 하나를 부르자, 말동이란 노비가 몸을 사시나무 떨 듯 떨어댔다.

하기사.

말동이란 노비는 아까 덕산이가 가갈할 때 내 정체를 들은 노비니, 몸을 떨 만도 하다.

다만 땅주인 나리께선 아직 사태 파악을 못 하신 듯 하다.

“말동이, 이놈! 어찌 대꾸가 없느냐!”

“그, 그, 그, 그··· 그게······.”

말을 자꾸 흐리는 말동이 답답한 지, 씩씩거리며 말동에게 다가간 중년인이 말동을 복부를 걷어찼다.

아이쿠, 비명과 함께 말동이 바닥에 나자빠졌다.

“이 집 행랑 식구들은 주인 잘못 만나서 참 피곤도 하겠다. 폭행이 일상인 주인이라.”

“내 오늘 네놈의 버릇을 단단히 고쳐줘야겠다. 외가가 어디더냐?”

“외가는 모르겠고··· 친가는 아는데.”

“내 네놈의 조부를 한 번 찾아뵙고 이 일을 따져봐야겠다. 그래, 네놈의 친가가 어디냐?”

“경복궁.”

“···?”

“덕산아.”

“네, 대군마마.”

“종친한테 손을 대면 어떻게 되냐?”

“벼슬에 있는 자는 최소 파직에 귀양까지 갈 테고, 서인(庶人)들은··· 송구합니다요. 쇤네가 거기까진 잘······.”

나는 아직도 사태파악이 안 되는지, 눈만 끔뻑거리는 중년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다네?”

“무, 무슨··· 네놈이 종친이라도 된단 말이더냐?”

끄덕.

“그,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다. 내 네놈처럼 막돼먹은 종친은 들어 본 적이 없느니라! 이놈이 감히 종친을 사칭하고 다니는 구나. 안 되겠다. 말동이 네놈은 속히 형조에 이 사실을 알리거라!”

알려줘도 지랄이고 안 알려줘도 지랄이다.

“일 커지면 나야 좋지.”

그렇게 말한 나는 대청에 다시 대 자로 누워 뻗었다.

***

“영산(寧山)?”

편전.

“그러하옵니다.”

“영산이 내가 아는 그 영산이 맞소?”

융이 알고 있는 영산은 충청도에 있는 영산 밖엔 없었다.

“그렇사옵니다.”

영의정 성준(成俊)이 긍정하자 융의 이마에는 내 천(川)자가 그려졌다.

“불경죄를 저지른 세좌를 고작 영산에 보낸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중론이 그러하였사옵니다.”

“중론?”

“예.”

성준에게서 시선을 뗀 융은 좌의정 이극균을 직시했다.

“좌상.”

“예, 전하.”

“좌상은 일전에 세좌의 불경을 성토 한 적이 있소이다. 그런 좌상도 세좌를 고작 영산에 보내자는 데 동의를 하시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중론이··· 아무래도 세좌가 쌓은 공이 전혀 없진 않다 보니······.”

융은 실소를 내뱉었다.

이리 말을 바꾸시겠다?

바로 엊그제까지만 해도 세좌를 성토하던 자가, 세좌가 쌓은 공이 없진 않으니 고작 영산으로 보내는 일에 동의하시겠단 뜻이나 다름 없다.

영산이면 충청도다.

도성과 지척인 곳.

그런 중죄인을 충청도로 보낸다니··· 고금의 일을 상고해봐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영산은 도성과 지척에 있는 곳이오. 무안에 부처(付處)함이 좋겠소.”

“하오나 세좌는 노구이온데 늙은 몸으로 먼 길을 가다가 탈이 날 수도 있사옵니다. 그리된다면 그 죄를 어찌 물을 수 있겠나이까?”

“늙은 신하는 불경을 저질러도 된단 뜻이오?”

“그것이 아니오라······.”

“무안이 너무 멀다면 온성에 부처함이 좋겠소.”

“저, 전하!”

경악을 금치 못 하는 신하들.

융은 그들을 조소했다.

“내 경들에게 의논토록 함은 일의 정당함을 알리기 위함이 컸소. 한데 경들이 나의 정성을 이리 무시하니, 내 어찌 군왕으로서 일을 상세히 살피지 않을 수 있겠소. 세좌는 온성에 부처하겠소.”

어버버거리는 중신들에 중신들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융은 화제를 돌렸다.

“그리고 대사헌의 일 말인데.”

모두의 시선이 빈 자리 하나로 쏠렸다.

늘 대사헌 민휘가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서있던 자리였다.

“내 경들에게 민휘의 일도 논해보라 하였는데 어째 소식이 없소이다?”

“···”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민휘는 사헌부의 장관 직에 있는 자이옵니다.”

“그렇지.”

“세좌 또한 예조의 장관으로 있사온데, 두 기관의 장관이 한 번에 죄를 받게 된다면 민심이 동요 할 수도 있사오니 민휘는 체임(遞任)에 그치는 것이 어떻겠나이까?”

“체임?”

“예.”

“그럴 순 없소. 영상은 일국의 중신 두 명이 한 번에 벌을 받으면 민심이 동요 할 수도 있다고 했으나, 죄 지은 사람이 고관대작이라 하여 벌 받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 때문에 민심이 동요할 것이오.”

“하오나 대사헌은 모든 언로의 총책에 있는 자리이옵니다. 자칫 언관을 핍박한다는 인상을 줄 수가 있사오니 체임으로 그 죄에 대한 벌을 받게 한 연후에······.”

자신을 걱정하는 말투지만, 자고로 편전에서 오가는 말들은 진실성이 없다.

그 뒤의 배경을 살펴야 한다.

민휘까지 이세좌처럼 벌주게 된다면 저들의 입장에선 왕을 겁박하고,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유능한 감관이 없어지는 셈이다.

대사헌이란 자리는 영상이 말한대로 모든 언로의 총책에 있는 자리다.

그런 대사헌을 처벌한다면 당연히 다른 언관과 간관들도 움츠러들 수 밖에 없었고, 그 여파는 저들에게 당연히 이롭지 못 하다.

본인들을 위한 계산이 깔린 발언이었다.

“하지만······.”

융이 말을 이어나가려는 그때였다.

여닫이 문이 열리더니 상선이 들어왔다.

아득한 표정의 상선이 어좌로 다가오더니 조심스레 귀엣말을 건넸다.

“동대문 밖에서 일이 생겼사온데······.”

“무슨 일 말인가?”

“망측하오나 대군께오서 폭행 사건의 가해자로 형조에 끌려갔다고 하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폭행 사건이라니?”

“그, 그것까진··· 형조에서 사람을 보내올 때, 급박한 일인지라 자세한 내막은 신도 듣지 못 하였사옵니다. 그저, 가해자로 연루됐다는 말만······.”

융은 골을 지끈 눌러 감쌌다.

“이 자리에선 함구하라. 이로울 게 없다.”

“···그리하겠나이다.”

상선이 다시 종종걸음으로 빠져나갔다.

“전하, 무슨 일이옵니까?”

자못 궁금해하는 중신들에 융은 화제를 돌리려 애썼다.

“별 일 아니오. 다만 아까 말했다시피 민휘의 일은 묵과 할 수 없는 일이오. 경들이 다시금 논해보고 영상이 윤대를 청하여 알리시오. 하면 이만 조회는 파하겠소이다.”

“나라의 일은 모든 중신들이 알아야 하는 법이옵니다. 군왕 혼자 정사를 돌본다면 어찌 신하가 존재 하겠사옵니까? 상선이 조회를 어찌 방해한 것이옵니까?”

연이어 물고 늘어지는 이극균이었다.

계속해서 화제를 돌리려했지만 헛수고였다.

어차피 이 편전에서 나가면 중신들도 모두 알게 될 터였고, 진성이 폭행 사건에 가해자로 연루된 게 사실이라면 멍석부터 갖고와 진성의 일을 성토 할 터였다.

그때 일을 당하나 지금 일을 당하나.

그에게 불리한 건 매한가지였다.

물론 최선은 일단 편전을 빠져나간 뒤에 일을 알아보는 것이겠지만,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이극균 때문에 그럴 수가 없음이니 차선을 찾아야 했다.

차선은 지금 이 자리에서 털어놓는 것이었다.

편전에서 나간 뒤에 저희들끼리 모여 일을 알아본다면 무슨 흉흉한 계책을 세울지 모르니까.

융은 어렵사리 운을 뗐다.

“···아직 확인은 되지 않았지만 진성이 폭행 사건의 가해자로 연루가··· 후, 연루가 됐다고 하오.”

잠시 정적이 휘몰아친 편전.

뒤늦게 문맥을 이해한 중신들의 기세가 등등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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