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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39화 (39/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39화>

    나도 갑질 한 번 해보자!

    ***

    “지금 뭘 하고 있는 것이냐?”

    “아이쿠! 나, 나리. 나오셨습니까요.”

    나무 그늘 아래 앞섬을 풀어헤치고 선선한 바람을 만끽하고 있던 팔석이 발등에 불똥 떨어진 것처럼 벌떡 일어나 인사를 올렸다.

    “지금 뭘 하고 있는 것이냐고 물었을 텐데?”

    “해가··· 다른 게 아니옵고 해가 너무 뜨거워서 잠시 쉬고 있었습니다요. 이제 다시 일 하겠습니다요.”

    팔석이 빠릿하게 그의 눈치를 살피며 밭으로 나갔지만 트집거리 잡는 일에 혈안이 된 택에겐 쓸모없는 행동에 지나지 않았다.

    “해가 뜨겁다?”

    “···예?”

    “그럼 저기 저 놈들은 해가 차가워서 저리 뙤약볕에서 일 하고 있는 것이냐!”

    택이 버럭 호통치며 다른 밭에서 열심히 일하는 노비들을 가리켰다.

    “그것이 아니오라······.”

    “천것들도 주제를 알고서 뙤약볕에서 일을 하는데 내 은혜로 입에 풀칠이나마 하는 네놈이 감히 게으름을 피워?”

    “송구합니다요, 나리!”

    “이 땅 소작 부쳐 먹고 살겠다는 것들이 어디 네놈 뿐인 줄 아느냐? 지대를 7할 갖다 바치래도 하겠다는 놈들이 널리고 널렸거늘 고작 6할 갖다 바치면서 은혜에 보답하진 못 할망정 감히··· 아니지? 말이 나온 김에 내년엔 지대를 올려 받아야겠다. 역시 7할이 좋겠어.”

    7할이란 소리에 팔석은 깜짝 놀랐다.

    7할이라니··· 지금 6할 갖다 바치면서도 간신히 입에 풀칠을 하고 있는 그였다.

    그런데 7할?

    이 땅에서만 15년 넘게 경작을 했다. 그 밑으로 딸린 식구가 줄줄이라 늘 형편이 곤궁하다는 건 땅주인도 잘 알 터였다.

    한데 7할을 언급한 건 굶어 죽거나, 나가 죽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하란 소리나 진배 없었다.

    팔석은 안간힘을 다해 택의 바짓가랑이를 붙들었다.

    “나, 나리. 송구합니다요··· 하오나 지대를 7할로 올리시면 쇤네는 정말 다 죽습니다요! 그, 그래도 쇤네가 나리댁 땅 15년 소작 부쳐먹고 살지 않았습니까요. 제발 그 정을 생각해서라도······.”

    퍽!

    “이놈이 미쳤나. 어디 감히 더러운 흙투성이 손을 올려!”

    “어이쿠!”

    팔석이 바닥을 나뒹굴자 비릿하게 웃은 택이 발길질을 계속했다.

    “그러니까! 누가! 누가 일을 게을리 하라고 했느냐!”

    퍽! 퍽!

    무자비한 구타가 지속됐지만 팔석은 가족들을 떠올렸다.

    지대가 올라가면 정말 가족들은 전부 거리에 나앉아 죽거나 혀깨물고 죽거나, 양자택일 할 수 밖에 없었다.

    택의 솥뚜껑만한 주먹이 턱뼈를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고통에 뼈마디가 욱씬거렸지만, 이깟 고통 쯤은 지대를 7할로 올렸을 때 가족들이 겪을 배곯는 고통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무자비한 구타에도 팔석은 연신 사정했다.

    “나리··· 부디 온정을 베풀어······.”

    퍽!

    “온정?”

    “···”

    “내 지금껏 네놈에게 베푼 게 온정이었느니라!”

    퍽! 퍽!

    한참 동안 발길질을 해대던 택은, 그럼에도 화가 다 안 풀렸는지 씩씩거리며 인접한 밭에서 일하던 노비들을 불러 모았다.

    “천동아!”

    “예?! 예, 주인나리······.”

    “놈을 당장 들쳐메라!”

    “기, 기절한 것 같은뎁···쇼······.”

    찌릿.

    “하면 네놈이 대신 멍석에 말리겠느냐?”

    “아, 아닙니다요.”

    천동이라 불린 노비가 팔석을 들쳐매자, 택은 만족한 듯 휘적휘적 집으로 향했다.

    놈이 깨어나면 제대로 멍석을 말아버릴 참이었다.

    ***

    “···치(治)와 도(道)를 더불어 하면 흥하지 아니 할 수 없고, 난(亂)과 더불어 도를 행하면 망하지 아니함이 없다······.”

    금석리.

    마을 사람들에게는 소위 천석꾼 댁이라고 불리는 기와집 별채에는 정겨운 강론(講論) 소리가 들려왔다.

    곧 있을 식년시를 앞두고 서경을 외우고 있던 청년의 강론 소리였다.

    “어진 이에게 맡기면 중간에 바꾸지 말지어며, 간사한 자를 버리는 데 있어서는 의심치 말라. 그러나······.”

    한참 동안 서경을 외우던 별채의 청년은 어느 순간 책을 덮었다.

    강(講)을 할 때면 늘 마음이 즐거웠는데, 오늘처럼 집중이 되지 않는 날은 또 없었다.

    “괜찮으려나.”

    근심 어린 얼굴의 청년, 아니. 석평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고 담장 밖을 흘겼다.

    반시진 전.

    민 처사댁의 땅을 소작 부치는 팔석의 아들인 개똥이가 찾아왔었다.

    개똥이는 숨까지 헐떡거리면서 제 아비를 살려달라고 했었고, 화들짝 놀라 자초지종을 묻자 하필 민 처사에 연루 됐음을 알 수 있었다.

    민 처사.

    일부러 처사라 높여 불러주고 있지만 하는 짓은 개차반이 따로 없었다.

    마을 사람들에겐 호색한에 살인귀라고도 불릴 만큼 악명이 자자했었다.

    일전에는 제 집안에서 60년 동안 묶여있던 늙은 노비를 매질로 비명에 가버리게 만들었고, 14살 계집종은 노리개로 삼아 반폐인으로 만들어 버릴 정도였다.

    그런 민 처사에게 아비가 끌려갔다니, 이미 민 처사의 악명을 듣고 자랐던 개똥으로선 식겁한 마음에 평소 친분이 있던 자신에게 찾아와 아뢴 것일 테지만, 민 처사와 관계 된 일은 석평도 어찌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천출(賤出)이었다.

    어머니는 김 첨지 댁의 종이었고, 그녀의 자식이었던 석평도 당연히 노비의 굴레를 벗어 날 순 없었다.

    다행히 김 첨지는 인성이 훌륭하신 분이었다.

    우연찮게 주인 나리께 문풍지 너머 도둑 청강을 한 걸 들키고 말았을 때.

    매타작을 당해도 할 말이 없었음에도 조용히 사랑으로 부르시더니, 그의 학문적 소양을 시험하셨다. 그리고 나서 며칠 간 말씀이 없으시더니 대뜸 글선생을 남몰래 붙여주시며 공부를 시키셨다.

    그때 주인 나리께서 하셨던 말씀이 아직도 기억에 남았다.

    “네 지금은 종놈의 굴레를 쓰고 있으나 운명이란 것은 불씨도 알 수 없는 법이니라. 종놈이라고 어찌 선비가 될 수 없겠느냐.”

    주인 나리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열심히 공부하던 어느 날.

    주인 나리는 그를 불렀다. 그러고는 또 그의 학문을 시험하셨고 물으셨다.

    “모든 선비의 꿈은 출사에 있다. 너는 어떠하냐?”

    맹랑하다면 맹랑하고 발칙하다면 발칙한 일이지만 석평은 벼슬을 하고 싶다고 솔직히 아뢰었다.

    주인 나리께서 알겠다고 답하고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나리께서 그를 부르더니, 노비 문서를 그가 보는 앞에서 갈기갈기 찢어버리셨다. 그러고는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집에 양자로 들어갈 수 있게 됐다고 말씀해주셨다.

    양자라니··· 면천이 됐다곤 해도 출신은 어디가지 않는다.

    천출이 어느 집에 양자로 들어갈 수 있을까 하여 여쭈니 주인 나리께서는 본인께서 잘 아는 벗 중에 손이 없어 부부끼리 적적하게 지내는 이가 있는데 반씨(潘氏)로써 대를 이어줄 양자를 구하고 있다고 하셨다.

    마침 그를 낳아준 아버지도 반씨셨다.

    양자로 들어가게 된 집안의 부모님(?)들도 그가 노비 출신이었다는 걸 알면서도 받겠다고 하셨으니 석평으로선 나쁜 제안이 아니었다.

    그는 곧 그러겠노라고 답했고, 곧바로 금석리에선 천석군땍이라고 불리는 이 집안에 양자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다.

    양부모님은 그를 친아들처럼 대해주셨다.

    오히려 석평이 서먹서먹 할 정도로.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양부모님을 믿고 오만방자하게 굴 수 없었다.

    그는 매사에 신중해야 했고, 매사 몸가짐이 발라야 했다.

    그랬으니 개똥이도 도와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비록 그의 양부모가 천석꾼 집안이라지만 문벌이 대단한 건 아니었다. 반면 민 처사 댁은 달랐다.

    당장 민 처사의 아버지가 홍문관 교리를 지냈고, 그의 할아버지가 예조참판을 지냈었다.

    그뿐인가.

    그의 친척뻘 되는 이는 사헌부에 장관으로 언로를 책임지고 있다 하니, 그 후광 때문에라도 민 처사에 책잡힐 일을 만들면 아니 됐다.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했다가는 양자로 들어온 이 집안이, 그리고 양부모님이 피해를 입을 게 뻔하니까.

    그래서 꾹 참고 울며불며 매달리는 개똥이를 돌려 보냈다.

    다만 첨언은 덧붙였다.

    나보다는 진성대군 댁에 가보는 것이 좋을 거라는 첨언이었다.

    진성대군께서는 요즘 대천(大川, 청계천) 아낙들의 입방아에 자주 오르락내리락 하시는 분이셨다.

    소문이 부풀려져 노비를 학대했다고 무성하지만, 석평이 보기엔 내막이 잘못 알려진 게 분명했다.

    그전 대천 아낙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린 진성대군에 관한 소문은 복날에 더위에 지친 노복들에게 닭까지 잡아줬다는 것이었고, 거기에 더해 나랏님도 비싸서 함부로 먹지 못 한다는 그 귀한 서과를 종놈들에게 까지 나눠줬다는 것이었으니까.

    같은 맥락에서 노비를 학대한 일도 내막을 알고 보면 오히려 온정을 베푼 것일지도 몰랐고, 소돼지만도 못 한 노비들에게 온정을 베푼 분이라면 개똥 아버지의 일도 무시하지는 않을 거라는 계산이 있었다.

    그래서 진성대군 댁에 개똥이를 보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걱정이 커져만 갔다.

    혹시 진성대군께서 개똥이를 내쳤다면 어떡하지?

    혹시 진성대군께서 개똥이의 말을 무시했다면 어떡하지?

    최악의 상황이지만, 그 최악의 상황이 벌어진다면 자괴감에 평생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을지도 몰랐다.

    “후.”

    생각을 정리한 석평은 책을 덮고 집을 나섰다.

    “출타하십니까요, 도련님? 쇤네가 뫼실까요?”

    마당 쓸던 돌쇠였다.

    “산보좀 하고 오마.”

    짧게 말한 석평은 떨리는 마음을 가까스로 다잡고 걸음을 바삐 놀렸다.

    목적지는 민 처사 댁이었다.

    ***

    휘적휘적 집을 나선 나는 개똥이가 말한 땅주인 집으로 향했다.

    개똥이가 어려서 말을 함에 두서가 없었지만, 그 두서 없는 말에도 절로 열이 뻗칠 정도의 갑질이었다.

    갑질 중의 갑질이랄까.

    ‘사람이 돈 좀 있다고 뻗대는 것도 정도가 있지, 사람을 기절할도록 패?’

    땅주인 집으로 가는 내내 개똥이게 들은 내용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갑질도 이런 갑질이 없었다.

    어쩌면 을(乙)의 입장만 살았던 현호로서 비록 시대는 다를지언정, 같은 을의 입장인 개똥과 그의 아비 팔석에게 몰입을 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살면서 상식을 뛰어 넘는 사람들이 우리 눈엔 참으로 많다는 걸 20살 이후에 알았다.

    사회엔 미친놈도 많았고 진상도 참 많았었다.

    그중에 가장 힘들고 그를 비참하게 만들었던 게 갑(甲)들의 횡포였다.

    따지고 보면 그 갑이란 사람들도 또 다른 갑에겐 을이 될 텐데 무슨 갑질을 그렇게 해댔는지······.

    아, 물론 개똥이를 돕는 게 동병상련의 아픔을 겪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한 번 쯤 꼭 해보고 싶었던 게 있었다.

    갑질하는 진상 혹은 사장들에게 그 이상의 갑이 돼서 갑질을 해보는 것.

    현호의 삶에선 못 해봤지만 여기선 가능할 것 같았다.

    동대문 일대에선 내로라하는 지주라지만, 그래봤자 신분 사회인 조선이다.

    내가 왕자인데 제깟놈이 때리기라도 할 거야, 뭐야.

    일전에 날 탄핵하셨던 대사헌 아저씨나 대사간 아저씨를 무서워했던 건 듣기 싫은 말을 적나라하게 해서였지만, 솔직히 이번 일은 탄핵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잖아?

    정의의 사도처럼 짠! 나타나서 핍박받는 백성 한 사람을 도와주는 일인데 그런 일로 쪼잔하게 탄핵하진 않겠지.

    ‘어떻게 갑질할까.’

    여러 생각들이 떠올랐지만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왕자잖아?

    잡념과 함께 도착한 땅주인의 집.

    “덕산아 열어라.”

    굳게 닫힌 문에 굳이 ‘이리오너라’하며 사람을 부르지도 않았다.

    덕산이가 들고온 도끼로 커다란 대문을 내리찍기 시작하자, 땅주인 집 노비들이 소란을 듣고 웅성거리며 대문으로 모여들었다.

    “덕산이 너 잘 하는 거 한 번 해봐.”

    “예! 큼큼.”

    목청을 가듬던 덕산.

    “진성대군 마마 행차시다! 길을 비켜라!”

    덕산의 가갈 한 방에 대문으로 모여든 땅주인집 노비들이 움찔거리다 홍해 갈라지듯 갈라졌다.

    그리고 그 갈라진 틈사이로 피떡(?)이 돼서 널부러진 사람 하나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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