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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38화 (38/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38화>

    오지라퍼 등판 해버리기

    ***

    “어우, 진짜 쪄죽겠다. 덥다, 더워.”

    한참 볕이 뜨거울 8월.

    더운 게 당연하지만 날씨가 더워도 너무 덥다.

    마치 찜기 속에 들어왔는 기분이다.

    장인이 한 땀, 한 땀 심혈을 기울여 만든 대자리를 깔고 누웠음에도 더위는 사그러지지 않는다.

    뭐, 달궈진 아스팔트 열기나 도로 위 차들이 내뿜는 열기, 그리고 에어컨 실외기에서 방출시키는 열로 인한 도심의 그것보다는 참을만 했지만, 문제는 체질이었다.

    전생에는 여름을 이렇게 심하리만치 타진 않았던 것 같은데 뭔 놈의 이 몸뚱아리는 잠깐만 걸어도 땀이 육수처럼 후두두- 쏟아진다.

    “대감마님.”

    부채질로도 모자라 체신머리 없이(?) 배를 다 드러내고, 대자리에 누워있는 날 부른 건 덕산이었다.

    “왜.”

    퉁명스러운 대답.

    여름은 짜증의 계절이라더니 인성이 훌륭한 나도 말투에서 짜증이 묻어나오게 된다.

    “사람이 찾아왔는뎁쇼.”

    “사람? 누군데?”

    “어떤 꼬마아이인뎁쇼. 쇤네도 누군지는 잘 모르겠습니다요. 밥 빌어먹는 녀석인 것 같아서 쫓아내려고 했는데 예전에 대감마님께서 누가 찾아와도 함부로 내쫓지 말라고 분부 내리시지 않으셨습니까요.”

    “그랬지. 근데······.”

    날 찾아올 꼬마 아이가 있었나?

    암만 생각해도 없지만 내가 또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다.

    들여보내라고 하자, 먼 길을 뛰어왔는지 온 몸이 땀으로 범벅이 된 예닐곱살 짜리 꼬마 아이가 숨을 헐떡거리며 들어온다.

    원체 집돌이 생활에 익숙해진지라 아는 얼굴도 전무한 편이지만, 그래도 날 보고자 했다면 얼굴이 익을 법도 한데 아예 모르겠다.

    땀과 함께 코를 찔찔 흘리던 아이는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성큼성큼 마당으로 들어오더니 오체투지(五體投地)를 했다.

    “이웃집 행랑 아이 같진 않고··· 누구니?”

    “대군마마. 제발 제 아비좀 살려주세요. 흑흑”

    생판 처음 보는 아이길래 이웃집에서 보내온 아이거나 혹은 숭재 씨나 장곤 선생님이 보내온 아이인 줄 알았는데, 다짜고짜 아비를 살려달라니······.

    어이가 한강선 타고 안드로메다로 날아가버릴 만큼이나 없다.

    난 조선에 와서 누구와 원수 진 적은 없다.

    대사헌 같이 나랏일 하는 높은 분들한테는 감정 살 일을 본의 아니게 벌이긴 했지만, 그 뒤로는 딱히 엮인 적도 없었다.

    하물며 내가 사람을 시켜 누굴 죽이라고 하거나 피를 말리게 한 적은 더더욱 없었다.

    그런데 제 아비를 살려달라니 내가 어이가 있어, 없어?

    당연히 없는데 거기다가 이젠 흐느끼면서 울기까지 하네?

    애들이 우는 것 만큼 신경 쓰이는 게 없는데.

    나는 대청에서 후다닥 뛰어내려와 일단 애부터 달랬다.

    “덕산아 집에 서과 남은 거 좀 있나?”

    “있긴 할 겁니다요. 한데 서과는 어찌······.”

    우리 덕산이가 참 다 좋은데 눈치가 없어.

    나는 세상 잃은 것처럼 엉엉 울고 있는 아이를 눈짓했다.

    그러자 덕산이 다가와 귀엣말을 건넨다.

    “설마 서과 주고 달래시려는 건······.”

    “과자주고 달랠 순 없잖아?”

    “···”

    “나도 좀 먹게 몇 조각만 썰어서 가져와 봐, 이 자식아.”

    “···알겠습니다요.”

    잠시 후.

    덕산이가 수박을 들고오자, 나는 조각난 수박을 아이에게 건넸다.

    “혹시 너네 아버지가 내 소작이라거나, 뭐 나한테 신공 바치고 있니?”

    아이가 제 아비를 살려달라는 데서 내가 추측 할 수 있는 건 그것 밖에 없다.

    조선에서 4개월쯤 생활해보니 가장 서럽고 살기 팍팍하게 만드는 게 소작료나 신공이란 걸 알 수 있었다.

    만약 내 짐작대로 이 아이의 아버지가 나 땅 소작 부쳐먹고 사는 소작농이거나 신공 바치는 외거노비라면, 개인 사정 때문에 못 바치게 됐을 수도 있다.

    병이 도졌거나 농사가 망쳤거나.

    그런데 소작료를 낼 가을은 코앞으로 다가왔으니 아이 입장에선 아비가 관군들한테 끌려간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아뇨.”

    훌쩍거리면서도 수박을 탐스럽게(?) 먹던 아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뭔데?”

    “저희 아버지는 금석리(金石里) 사는 팔석이라고 하는데요······.”

    금석리?

    들어본 적이 있는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덕산아. 금석리가 어디냐?”

    “왜, 전번에 동대문 밖에서 대감마님께서 마음에 들어 하셨던 땅 있잖습니까요.”

    “땅?”

    아아.

    기억이 난다.

    나도 이 세상에선 돈이 돈을 부른다는 말처럼 돈 좀 굴려보려고 땅을 알아보러 갔을 때, 마침 내 눈에 들어왔던 밭이었다.

    참 마음에 들었는데 땅주인이 안 팔 거라고 해서 입맛만 다셨던 땅이기도 했다.

    근데 그거 빼면 나는 금석리랑 연이라고는 쥐뿔 만큼도 없는데.

    내 기억이 맞다면 금석리에는 내 소작이나 외거노비도 없는 걸로 안다.

    “근데 왜 나한테 와서 살려달란 건데?”

    “제가 아는 높으신 분은 대군마마 밖에 없어서··· 대군마마라면 도와주실 것 같아서요······.”

    “아니, 무슨 그런 뜬금없는 발상을······.”

    아, 물론 내가 착하고 인성이 조인성 급인 건 안다.

    아마 이 아이도 알고 있을 거다.

    어린 애들은 거짓말 같은 건 못 하니까.

    “석평 형이 대군마마라면 분명히 도와줄 거라고 하셨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당연히 대군마마라면 도움을 줄 거라고 다짜고짜 찾아오는 건··· 하, 역시 애라서 순진한 건가?

    그 동심을 파괴하고 싶진 않다만······.

    “석평이는 또 누군데?”

    “동네 형이예요. 엄청 똑똑한데 자기는 못 도와줘도 대군마마라면 분명 도움 줄 거라고 했어요!”

    퍽이나 똑똑해서 순진한 애를 홀렸겠네.

    아니면 귀찮은(?) 꼬마 애를 나한테 치워버렸다던가.

    그렇다면 괘씸한데.

    석평인지 돌평인지··· 이렇게 순진한 어린 애를 꼬드겨도 이상하게 꼬드겼다고 내심 씹고 있는 와중에도, 아이는 그 돌평이 자랑이 한참이었다.

    마치 제 친 형이라도 되는 양.

    “그 형이 이번에 소과 공부하고 있거든요. 올해 열리는 식년시에도 참가 할 거라고 했는데, 그만큼 엄청 똑똑해요. 동네 아저씨들도 무조건 백패 받을 거라고, 우리 마을에서 조만간 생원진사 나올 거라면서······.”

    “···꼬마야.”

    “아, 석평이 형은 지금 천석꾼댁에 양자로 들어가있는데······.”

    “꼬마야 너네 아버지 살려달라고 안 했어?”

    “아. 맞다! 대군마마. 저희 아버지좀 살려주세요.”

    “자초지종이나 들어보자.”

    “그러니까요······.”

    꼬마, 개똥이의 입에서 전말이 흘러나왔다.

    애는 애라서 말을 두서 있게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대략적으로는 알아먹을 수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개차반도 그런 개차반이 없네. 어디냐? 앞장서라.”

    나는 씩씩거리며 집을 나섰다.

    오지라퍼 등판이었다.

    ***

    금석리 사는 민택(閔澤)은 동대문 일대에서는 이미 악명이 자자한 한량이었다.

    물론 그라고 해서 처음부터 악명을 떨쳤던 건 아니었다.

    이제 불혹의 나이인 그는 지학을 갓 넘긴 뒤부터 소과에 응시했었다.

    지금껏 몇차례나 시험에 녹명(錄名, 응시표)했는지 모른다.

    그만큼 까먹은 돈도 많았고, 어릴 적에는 글선생을 뫼신답시고 나간 돈만 해도 기와집 2~3채는 너끈히 사고도 남을 정도였다.

    하지만 결과는 번번이 낙방.

    동문들은 만날 때 마다 ‘이번 시험은 어찌 되었는가?’ 물어댔고, 하필 또 종가라 해마다 찾아오는 친척들은 ‘이번 시험에선 백패를 받아 볼 수 있겠지?’ 말하곤 했었다.

    한 두 번은 참을 수 있었지만, 그게 계속 되다 보니 마음 속엔 점점 울화가 생겼고 그 울화를 아랫것들한테 풀다보니 본의 아니게 악명을 떨치게(?) 되었다.

    불혹이 세상일에 미혹되지 않는 나이는 개뿔.

    안 그래도 개차반이라 명성이 자자했던 민택은 2년 전 시험에 떨어지면서 더욱더 행패를 부리게 되었다.

    아닌 게 아니라, 2년 전 식년시에선 꼭 붙을 것만 같은 느낌이 있었다.

    그래서 만날 때마다 ‘이번 시험은 어찌 되었는가?’ 알면서도 쳐묻는 동문들과 ‘이번 시험에선 백패를 받아 볼 수 있겠지?’ 하는 친척들에게도 이번엔 붙을 것 같다는 말을 했었다.

    붙기는 개뿔.

    보기 좋게 낙방했는데 낙방만 하면 다행이련만, 오히려 약관의 나이에 불과한 조카놈은 생원시에 떡하니 급제를 하고 말았다.

    앞에서는 잘 됐다 덕담해줬지만 솔직히 말해서 배 아파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게다가 최근에는 반 진사댁에 양자로 들어간 석평이란 노비 놈이 천재 소리를 들으면서 마을 사람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다 하니, 더 배알이 꼴렸다.

    그렇게 하루, 이틀··· 2년이 지났다.

    가뜩이나 그를 피해 다녔던 사람들은 이제 그 냄새만 맡아도 걸음아 나살려라 도망을 칠 정도였다.

    이전에는 화병이 도져도 풀 데라도 있어서 망정이었지, 이젠 노비들도 그를 피하니 화병을 풀 데가 없었다.

    울화는 쌓이고 또 쌓여만 갔고, 그렇게 시간이 흐르자 사람이 아주 폐인이 되는 기분이었다.

    가만히 있으면 스무살 조카놈도 붙은 시험에도 떨어진 놈이 가만 있는답시고 자책하면서 화가 나고, 조금 출타할라 치면 스무살 조카놈도 붙은 시험도 떨어진 놈이 어기적어기적 잘도 돌아다닌다 자조(自嘲)하며 화가 치밀고, 종놈들이 마당을 쓸고 있으면 이웃한 반 진사댁에 양자로 들어간 그 노비 놈이 천재 소리를 들으면서 내년에 있을 식년시에 마을 사람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다는 게 떠올라 화가 치밀었다.

    그냥, 그냥 손에 잡히는 건 죄 때려 부숴버리고 싶었고 신경을 건드는 것들은 모조리 매질해버리고 싶었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은 그 냄새만 맡았다 하면 동리 밖에서도 걸음아 나살려라 도망부터 쳐대고, 석 달 전에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도저히 주체 할 수가 없어서 제 주인 들어오시는데도 느릿느릿 움직인답시고 트집 잡아 멍석만 노비 할아범이 켁, 뒈져버린 뒤로 눈치만 설설 살피면서 그를 피해다니는 집안 노비들 통에 이 울화라는 놈이 점점 쌓이고 또 쌓여도 풀 데가 마땅치가 않았다.

    입은 마르고 속은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이 화를 어떻게든 풀어야 했다.

    이대로 있으면 제 명에 못 살지도 몰랐다.

    오늘도 여지없이 괜히 화가 치민 택은 건수(?)를 찾아 주위를 어슬렁거렸다.

    집안 노비들은 당연히 그를 피했고, 금석리 주민들은 미리 냄새부터 맡고 길을 크게 돌았다.

    ‘오늘도 허탕인가.’

    허탕이란 사실에 또 분노가 치밀던 그때.

    씨익-.

    택의 입꼬리가 치켜올라갔다.

    트집잡을 거리가 드디어 하나 보였기 때문이다.

    집에서 2~3리(里) 쯤 떨어진 그의 밭.

    한참 일해야 할 소작 하나가 뙤약볕 때문인지 나무 그늘 아래서 쉬고 있는 모습이 들어온 것이다.

    팔석이란 소작 놈으로 평소라면 무슨 트집을 잡힐지 모르니 감히 엄두도 못 냈겠지만, 날이 너무 더워 쉬고 있는 듯 했다.

    택은 예의 소작이 있는 나무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지금 뭘 하고 있는 것이냐?”

    “아이쿠, 나, 나리. 나오셨습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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