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군으로 살어리랏다 37화>
종두법을 설파(?)하다
***
궐 안 분위기가 흉흉했다.
초상이라도 났나?
싶었지만 그건 또 아니었다.
연산군 형님의 입가에 시종일관 미소가 떠나질 않고 있었다.
궐에서 초상이 난 거라면 형님께서 저럴 리 없으시지.
그렇고 말고.
아무래도 궐 안 분위기가 뒤숭숭한 건 양로연에서 있었던 일 때문이 아닌가 싶다.
나라고 듣는 귀가 없는 건 아니다.
양로연에 참여한 숭재 씨에게 양로연에서 있었던 일을 모두 들을 수 있었다.
예조판서라는 분이 연산군 형님이 하사한 술을 엎질렀다지, 아마?
이게 얼마나 큰 일인지는 사실 체감 할 순 없었는데 열변(?)을 토해내는 숭재 씨를 통해 대략적으로나마 짐작 할 수 있었다.
숭재 씨에 의하면 어사주를 엎지른 건 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그 범위를 확대시키면 최소 기군망상에 최대 역모란다.
그거 때문에 궐 안 분위기가 뒤숭숭 한 거라면 이해 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나저나 성격도 좋으셔.’
신하가 술을 엎었다는 게 나에겐 별 일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지만 조선 사람들에겐 무척 큰 일이라는 건 숭재 씨를 통해 알 수 있었다.
같은 맥락에서 형님도 숭재 씨와 마찬가지의 조선 사람이다.
그 큰 일을 당했는데도 시종일관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고 있으니 얼마나 사람이 좋은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근데 예판이란 사람은 어떻게 됐지?’
숭재 씨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종사에 관련한 일이라면서 말을 아꼈다.
뒷 얘기가 궁금해서 계속 채근하자 숭재 씨는,
“종사에 관련된 일에 연루되면 대군의 지위에 있는 마마께서 괜한 피해를 입으실 수 있사옵니다.”
라고 말했다.
그 말에 나는 호기심을 바로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호기심 하나 때문에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잖아?
“섭섭한 마음은 없었느냐?”
사색에 잠긴 나를 일깨운 건 연산군 형님의 따쓰한 음성이었다.
큰 일을 당했는데도 자상하신 게 역시 성격이 좋으신 게 확실하다.
“아주 없다면 솔직히 기군망상이겠지만, 지금은 괜찮습니다. 게다가 양로연 날에 소란도 있었다면서요. 괜히 제가 그 자리에 있었으면 일이 더 커졌을지도 모르니 다행이란 생각도 들구요.”
“기군망상? 하하. 그래. 네 말이 맞구나. 임금을 속여서는 안 되지. 그게 말이 됐든 감정이 됐든. 한데······.”
“말씀하세요.”
“내 너를 긴히 부른 것은 너에 관한 소문 때문이다.”
“소문요?”
나는 금시초문이라는 듯 반문했다.
숭재 씨도 그런 말은 해주지 않았었다.
‘혹시······.’
물론 짐작 가는 게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그리고,
“네가 노비를 학대했다는 소문이었다.”
역시.
예상 밖의 일이었던 건 아니다. 다만 소문이 이렇게 빨리 퍼질 줄은 몰랐다.
스마트폰이나 SNS도 없는데 무슨 소문이 이렇게 빠른지 모르겠다.
“물론 나는 그 소문을 믿지 않는다. 네가 어찌 집안 노복들을 학대 했겠느냐? 다만 내 너를 이리 부른 것은 곡절을 듣기 위함이다. 일을 당해도 알고서 당해야 대처를 할 수 있는 법이니 말이다.”
말로만 하는 믿음과 신뢰는 숱하게 많지만, 보이지 않아도 볼 수 있고, 들을 수 없어도 듣게 되는 맹목적인 믿음과 신뢰는 흔치 않다.
적어도 내가 아는 믿음은 그랬다.
그리고 형님이 보여주는 믿음과 신뢰는 맹목적이었다.
어떻게 알 수 있냐고?
사람의 감정은 절반 이상 얼굴 근육과 제스처를 통해 알 수 있다.
타인을 속이는 데 능숙한 사람일지라도 한순간은 근육이 경직되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형님의 얼굴엔 변화가 없었다.
여전히 따스한 음성이었고, 여전히 날 걱정하는 어투였다.
그래서 고민이 됐다.
어떻게 보면 행랑 식구들에게 한 예방 접종은 이 시대 기준으로 학대가 될 수도 있으니까.
제아무리 좋은 의도였다고 하더라도 이 시대 사람들이 보기엔 학대로 비쳐질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형님께 폐를 끼칠 수도 있으니까.
‘이실직고하는 게 좋겠다.’
맹목적인 믿음을 보여주는 사람을 속이고 싶진 않았다.
이해 시키고 싶지도 않았고, 어려운 말을 써가면서 변명하고 싶지도 않았다.
“아주 거짓 소문은 아닙니다.”
“종놈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주기 위함이었던 것이냐?”
“아뇨.”
“하면 어찌······.”
“전하.”
“말하거라. 내 너에게 무슨 곡절이 있다 한들 모두 들을 것이다. 그래서, 세상 사람 전부가 손가락질 한 대도 이해 할 것이다.”
“에이, 그렇게까진 안 하셔도 되는데······.”
“네가 가족이란 그런 것이라 하지 않았느냐? 비록 동복 형제는 아닐지라도 피를 나눈 것은 매한가지니 내 어찌 너의 허물을 남이 손가락질 한다 하여 함께 손가락질 하겠느냐. 그래, 말해보거라. 어떤 곡절이 있었던 게냐?”
“그걸 말씀드리기 전에 두창을 좀 말씀드리고 싶은데요.”
“두창?”
순간 형님의 인상이 구겨졌다.
창녕대군의 일이 떠올랐던 모양이다.
실수한 것 같아 황급히 말을 이어나갔다.
“두창은 정말 무서운 병입니다. 그렇지요?”
“그렇지. 두창 만큼 무서운 병이 또 없지··· 멀쩡한 유학(幼學, 유생)도 한순간에 백치로 만들어버리고, 수십년 성현의 말씀을 공부한 멀쩡한 유종(儒宗, 유학에 권위있는 학자)도 한순간에 괴력난신(怪力亂神)으로 만들어버리지.”
머리에 먹물 깨나 넣었다는 사람들은 무속 신앙을 전혀 믿지 않았다.
형님께서 말씀하신대로 괴력난신이라 하면서 성을 내거나 천대하기 일쑤였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도 괴력난신이 되게 하는 병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형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두창이다.
덕산이에게 듣자니 두창에 걸리면 손이 귀한 가문일수록 유명한 무당을 들여서 치성을 들인단다.
아이러니하게도 평소에는 괴력난신이니 백성을 혹세무민하는 자들이라 손가락질하면서도 말이다.
어쨌든.
중요한 건 이거다.
“그 두창을 예방 할 수 있다면 어떨 것 같으십니까?”
“예, 예방? 병이 퍼지기 전에 막을 수 있다면 어떨 것 같냐는 말이더냐?”
“네.”
“그 기쁨을 말로 형용 할 수나 있겠느냐. 두신을 막을 수만 있다면 억만금을 줘서라도 막으려 들 테지.”
“제가 노비를 학대했다고 소문난 게 그거 때문입니다.”
“···?”
선뜻 이해가 안 되시는지 형님께선 고개를 갸웃거리신다.
나는 이해가 쉽게 좀 더 노골적으로 말했다.
“두창이 퍼지면 삽시간에 퍼집니다. 특히 한집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중에 하나가 두창에 걸리면, 그 집은 반절이 두창을 앓는다 해도 과언이 아니죠. 전 저희 집에서 두창 환자가 나오는 게 싫었습니다. 거적에 실려나가는 건 더더욱 싫었죠.”
“아니··· 내 당최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된다. 두창을 막을 수 있다는 것까지는 이해가 되는데, 노비를 학대했다는 것이 어찌 그것과 연관이 있다는······.”
더 쉽게 설명해야겠네.
“저희 행랑식구들에게 두신이 오지 못 하도록 막았단 말씀입니다.”
“···진성아.”
“네.”
“혹 민휘나 다른 작자들의 탄핵 때문에 상심이 컸느냐?”
고개를 가로저었다.
상심이 아주 없진 않았지만 그걸로 상처받고 속앓이 할 정도까진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탄핵이란 게 악플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악플에 신경 쓸 필요가 없잖아?
그냥 몸조심하자 정도의 느낌만 있었다.
“그러면··· 그러면 말이다. 혹 창녕의 일로 상심이 컸던 것이냐? 창녕의 일로 상심이 너무 커서, 그래서 박수처럼 행동한 것이냐? 두신을 막으려고?”
“박수? 박수무당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래.”
팔자에도 없는 무당이라니.
갑자기 비행기 태워주는 것도 아니시고 작두를 태워주시네.
“하하. 아뇨.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시면 되요.”
“하지만 두창을 어찌 예방 할 수 있단 말이냐? 고금의 명의들도 손을 쓰지 못 한 게 두창 아니더냐?”
“모르니까 손을 못 쓴 겁니다.”
“몰랐다?”
“전하께서는 목장의 천예들이 두창에 걸렸다는 말을 들어보신 적 있으십니까?”
곰곰이 생각하시던 형님이 고개를 살살 가로 젓는다.
“없구나.”
“하면 두창에 한 번 걸린 사람이 다시 두창에 걸렸다는 말을 들어보신 적 있으십니까?”
“그 또한 없다. 보통 두창을 한 번 앓고 나면 두신이 몸주에 질리거나 혹은 두려워해서 다시 찾지 않는다는 세간의 말을 들어 본 적은 있다.”
“그걸 면역이라고 합니다.”
“면역?”
“네. 두창이 앓기 전에 접종하면 전하의 말씀대로 두신이 몸주를 두려워해서 찾아오지 않겠지요?”
“네 말이 사실이라면 그렇겠다.”
“사실입니다.”
“허어. 내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아니, 이해가 안 된다기 보다는 그저 뜬구름 잡는 소리 같구나.”
“그게 아니라면 제가 왜 저희집 식구들을 바늘로 쑤셔댔겠습니까. 제가 뭐, 실성한 놈도 아니구요.”
“그렇긴 하지. 아! 하면 부부인을 바늘로 찔렀다는 것도······.”
“들어보니 제 부인께서도 두창을 앓아 본 적이 없다고 하시더라구요.”
“허. 네 말을 믿을 수 없지만 믿을 수 밖에 없겠구나. 아, 하나 궁금한 게 있다.”
“뭐든 말씀하세요.”
“그러면 너는 그 사실을 어찌 알았느냐?”
뜨끔.
“채, 책에서 봤어요.”
“책? 어느 책 말이냐?”
“그, 저자는 알 수 없는데 언제였더라··· 송나라 때였나 당나라 때였나··· 어떤 의원이 지은 책이었는데 거기서 봤습니다.”
“그런 책을 네가 발견한 것이라면 어의들은 죄다 직무에 태만했구나.”
“아뇨. 저도 우연찮게 발견한 거라서요.”
“하긴. 귀한 글귀가 적힌 의서이니······.”
“그래서 말인데요, 전하.”
“응?”
“이걸 조선팔도에 퍼뜨리면 더 이상 두창 환자를 좀 줄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긴 할 테지. 하지만 제아무리 예방이 가능하다 한들 그 비용이 막대하다면 무리 아니겠느냐?”
“아뇨. 그렇게 많이 들지도 않아요.”
“참말이냐?”
띠용!
눈을 동그랗게 치켜 뜨는 형님에 나는 종두법을 설파(?)했다.
지루한 설명이 끝난 후.
형님은 허탈한 표정을 지으셨다.
“방법이 그리 쉽고 간편한 줄 알고 있었다면 내 진즉에 그 종두법이라는 것을 전국에 알려서 두창을 막았을 텐데··· 아쉽구나. 명색이 만백성의 어버이라는 자가 두창을 쫓아낼 생각보다도 두창이 오지 않기만을 바랐으니······.”
“지금부터라도 막으면 되죠.”
“지금부터?”
“네.”
“맞다. 내 창녕이 두창을 앓은 뒤로 한 사람의 아비로서 가슴이 미어지고 아파하였으니, 나같은 아비가 세상에 또 있으면 되겠느냐. 네가 말한 종두법이란 것이 너희집 노복들로 하여금 확실한 예방법이란 것이 증명이 된다면, 조정에서 논하도록 해서 두창을 팔도에서 쫓아내야겠다.”
성군의 자질이 보이시는(?) 것 같아 보는 내가 다 아빠 미소가 지어진다.
***
“과연 열성조들이 전하를 가호하고 있음이 분명하옵니다.”
진성을 접견한 뒤.
융은 미복차림으로 임의 저택을 찾았다.
임은 흐뭇하게 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에 융은 들뜬 표정으로 떠들었다.
“경도 편전에서 부원군과 조신들의 표정을 봤어야 했다. 내 십년 묵은 체증이 싹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그러셨사옵니까?”
“세좌가 누구더냐. 내 생모를 비명에 가게 만든 장본인 아니더냐? 그러면서도 제 죄를 뉘우치지 않고 있었던 인사였다. 그런 인사를 드디어 형틀에 앉히게 되었으니 내 어찌 기쁘지 않단 말이냐?”
“다른 자들은 어찌하였사옵니까?”
“다른 자들? 하하하! 정말 경도 편전에 있었어야 했다. 늘 세치 혀를 나불거리던 민휘는 한 마디 말도 못 하였고, 불구대천 윤필상이와 이극균이는 세좌가 실수를 한 것이라 주장하더니 그새 말을 바꿔, 벌을 주는 것이 온당하다 외쳐댔다. 이것이 여태 그들이 말했던 신념이요 원칙이니 이 얼마나 하찮기 짝이 없는 신념이란 말이냐? 기쁘다. 내 오늘은 너무 기뻐서 경을 찾아왔다.”
임은 역시나 미소지었다.
마치 본인의 일인 것처럼.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그래도 경계를 늦추진 마시옵소서. 저들은 간악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옵니다. 전하께서 언제라도 방심을 하신다면 되려 당할 수도 있사옵니다.”
“물론이다. 윤필상이와 이극균이가 말을 바꾼 것도 그 때문 아니겠느냐. 내 의중을 떠보고 싶었겠지. 특히 윤필상이는 수백년은 묵은 구렁이 같았다.”
“그 구렁이들을 상대로 앞으론 어쩌시겠사옵니까?”
임을 바라보던 융은 피식 웃었다.
“제깟놈들이 구렁이라 한들 오소리의 한끼 식사 밖에 더 되겠느냐.”
“하면······.”
“세좌의 일로 임인년의 일을 경계하게 됐으니 방심하게 만들어야지.”
이 날만을 손꼽아 기다려왔다.
10년이 넘도록.
그 10년의 세월 동안 쌓은 공든 탑은 너무 보잘 것 없어서 손짓 한 번에 와르르 무너질 수가 있었다.
그 10년의 세월을 헛되게 할 순 없었다.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결국 피가 마르는 건 저들이 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