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군으로 살어리랏다 36화>
태세전환, 세좌를 벌주소서!
***
“국문이 잘못 됐다.”
용상에서 흘러나온 단 한 마디에 편전에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누군가에겐 불편한, 또 다른 누군가에겐 불쾌한 침묵이었다.
한참이 지나도록 편전은 고요했다.
너무 고요해서 밖에 시립한 문차비들의 스사삭- 옷깃 스치는 소리까지 들려올 지경이었다.
그 불편하고 불쾌한 침묵을 즐기고 있는 건 용상의 주인 밖에 없었다.
그는 한참이 지나도록 고요한 편전에 피식 소리 내서 웃었다.
“국문이 잘못 돼도 한참 잘못되지 않았는가?”
“어인 말씀이시온지······.”
위관으로 죄인을 신문한 이극균이었다.
“좌상은 지금 이걸 국문 결과랍시고 올린 것인가?”
융은 신경질적으로 보고서를 꾸깃거렸다.
빳빳했던 보고서가 볼품없이 쪼그라져 편전 바닥을 나뒹굴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국문은 제대로 이루어졌사옵니다. 신등이 보고서에 아뢴대로 세좌는 오직 성상의 위엄에 질려 실수를 한 것이옵고 거기에 어떤 의도는 없어 보였사옵니다. 국문을 맡은 신들이 어찌 거짓으로 군왕을 기만하오리까?”
“내 할 말이 없다.”
“···”
“이세좌가 한 짓이 어딜봐서 실수란 말인가? 내가 볼 땐 임금이 나이가 어리다 하여 불경을 저지른 것 같은데?”
극균에게서 대답은 없었다.
그는 그저 황망하다는 듯 고개를 조아렸다.
“국문은 그렇다 치고.”
그의 시선이 이번에는 대사간 이자건에게 닿았다.
“언관들은 어찌 이번 일에 한 마디도 없단 말인가? 언관의 소임이 바로 그것 아닌가? 그릇된 일을 바로 잡는 것. 그래서, 과인이 무슨 일만 하면 번거롭게 상소를 올리고 고사를 들먹이면서 왕을 가르치지 않았던가? 한데 어찌 이번엔 한 마디 말도 없단 말이냐?”
자건이 식은 땀을 뻘뻘 흘리며 말했다.
“그것은 전하께오서 이미 추국을 명하신 바가 있었기에 신들이 국문 결과를 보고서 따로······.”
“언관들은 과인을 능멸하려는 셈이냐!”
털썩!
“느, 능멸이라니 당치도 않사옵니다.”
“사간원은 양로연이 있기 이전 날에는 종친이 옥체에 손을 댔다고 하여 탄핵을 했고, 사헌부는 진성의 소문만 듣고서 일국의 대군을 탄핵하지 않았더냐? 나는 그래서 언관들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그릇된 일은 바로 잡고자 하는 줄 알았는데 아직까지 말이 없음을 내 어찌 해석해야 한단 말이냐? 대사간은 들어라.”
“···”
“세좌는 감히 임금이 하사하는 술을 엎질렀다. 이건 전날에 대간들이 탄핵한 진성의 일보다도 공손스럽지 못한 일이다. 아닌가?”
“저, 전하······.”
“경은 세좌가 두려운가?”
“두렵다니··· 함께 나라의 녹을 받고 사는 건 매한가지의 처지인데 신이 어찌 세좌를 두려워하겠나이까.”
“하면 어찌 이번에 한 사람의 언관도 나서지 않는단 말이냐? 말했다시피 진성의 일에는 앞다투어 탄핵소를 올리던 자들이, 감히 임금의 옥체에 손을 댄 세좌의 일에는 술에 취했다고 관용을 베풀라 하니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이냐? 힘이 없는 자는 윽박지르고, 힘 있는 자는 조용히 타이르는 것이 여태 그대들이 말한 군왕의 치국이요, 군자의 도리인가?”
“···”
“내 지금 볼 때 대간들이 세좌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세자의 아들 이수의(李守義)가 예문관에 한림(翰林, 봉교~검열의 별칭)으로 붓을 들고 있고, 마찬가지로 이수정(李守貞)이는 언관의 한 사람으로 홍문관에 수찬으로서 붓을 들고 있으니, 수의와 수정의 아비되는 세좌를 탄핵했다가는 그 두 사람에게 도리어 트집 잡힐 수가 있으니 그것이 두려워 아무도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저, 전하. 어찌 그런 말씀을······.”
자건이 탄식을 내뱉었다.
“그럼 아니란 말이냐?”
“신들이 어찌 수찬과 봉교가 두려워 입을 열지 않고 있는 것이겠나이까?”
“합리적인 의심이지 않은가? 하면 말해보라.”
“하문하소서.”
“일전에는 진성이 옥체에 손을 댄 일로 그리 모질게 대군을 탄핵하더니, 이번에는 어찌 가만 있는가?”
“···”
대답 없는 자건을 냉소한 융이 말을 이어나갔다.
“보라. 붓을 든 자들이 다른 붓을 두려워하고 있지 않은가? 이는 대간의 소임이 아닐뿐더러, 수의와 수정이 청요직의 한 자리에 있다곤 해도 일개 낭관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일국의 재신들이 보일 풍모가 더더욱 아니다. 하니, 이수의와 이수정이는 체임(遞任, 일종의 해임)하여 세좌의 일에 막힘이 없도록 하겠다. 또한 세좌의 일을 듣고서도 대간들이 벙어리라도 된 양 일언반구 말도 없으니 붓을 들지 않은 대간은 대간으로서의 소임을 저버렸다고 할 수 있겠다. 마찬가지로 죄주어 체임하겠다.”
속사포 같은 명에 편전의 대신들은 둔기에 얻어 맞은 듯 한 착각이 들었다.
그건 이극균도 마찬가지였다.
‘이럴 거면 국문은 어찌······.’
국문은 애당초 필요가 없었다.
이미 전하께선 세좌를 벌 줄 걸 마음에 두고 계셨다.
국문은 형식적인 절차에 지나지 않는다는 인상을 극균은 지울 수가 없었다.
이건 아니다.
뭐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기분이었다.
툭툭.
그때.
바로 옆에 시립해있던 이가 얼이 나가 있는 그를 팔꿈치로 툭툭 쳐댔다.
고개를 돌리니 파평부원군 윤필상이었다.
“···?”
“전하의 의중을 아시겠소?”
극균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원래 변덕이 죽 끓듯 하시는 분인 건 잘 알고 있었다.
경회루에 행차하겠다고 하셔놓고 강녕전에서 코빼기도 안 비추기도 했고, 창덕궁으로 이어하겠다고 했다가 말을 번복한 일도 한 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한데 이번 일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모르겠습니다.”
“일단은 전하께서 예판에 대한 진노가 극에 달하신 듯 하니 장단을 맞추는 게 좋을 듯 하오.”
“하지만 그랬다간 정말 전하께서 예판을 대역죄인으로 지목 할 수도 있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번 일에서 볼 수 있듯이 법이란 건 코에 걸면 코걸이고 귀에 걸면 귀걸이었다.
대역죄도 마찬가지였다.
사소한 죄목이 대역죄로 변질되는 일은 고금의 숱한 왕조들이 보여주었다.
이번 일도 어찌보면 별 일 아니라고 치부 할 수도 있지만, 주상의 진노는 대역죄를 접한 것과 흡사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역죄인도 아닌 세좌를 벌주라 외칠 순 없었다.
“전하의 의중을 전혀 모르지 않소이까?”
“어인 말씀이십니까?”
“임인년(壬寅年)의 일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거요.”
임인년 세 글자에 극균은 체신머리 없게 히익- 헛바람을 들이켰다.
“이, 입조심 하십시오, 대감. 케케묵은 과거의 일 아닙니까?”
“하지만 생각해보시오. 예판이 누구요. 선대왕 대부터 조신의 반열에 오른 중신이라지만, 그 이전에 폐출된 윤씨에게 사약을 갖다 준 장본인 아니오?”
“그, 그럴 리가요. 그랬다면 지난 무오년에 그 일을 들췄겠지요.”
“뭐, 내 짐작이 틀린 거면 차라리 다행한 일이오만 일단은 사립시다.”
“아, 알겠습니다.”
극균이 동조하겠다는 뜻을 내비치자 필상이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과연 전하의 분부가 지당하시옵니다. 세좌는 어사주를 엎지르는 대죄를 저질렀으니 이는 죽어 마땅한 대죄이옵니다. 신이 가만히 생각해보건대 세좌가 본래 술을 마시지 못 하기 때문에 전하께서 내리시는 어사주를 족족 받아 마시다가 이런 실수를 범한 것이라 여겼사오나, 전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세좌의 일이 진성대군의 일보다 가벼울 순 없다 사료되옵니다. 그런데도 신들이 미처 죄주기를 청하지 못 하였으니, 신들에게 또한 역시 죄가 있나이다.”
윤필상이 선창하자, 극균은 찝찝한 표정과 함께 입을 열었다.
“파평부원군의 말씀을 듣고 보니 그렇사옵니다. 신 또한 내심 세좌가 술에 취해 실수를 범한 것인 줄 알았는데, 다시 생각을 해보니 감히 어전에서 술에 취해 칼을 빼든다면 그것이 실수에 그치는 일이겠사옵니까? 어사주를 엎지른 일도 같사옵니다. 세좌는 전하께서 말씀하신대로 내심 거만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술잔을 엎지르고 곤룡포까지 젖게 한 것이니 그 죄가 죽어 마땅하옵니다. 물론 평소 술을 잘 마시지 못 한다는 점을 참작 할 순 있겠사오나, 그럼에도 이런 큰 무례를 범하였으니 그 아들들처럼 체임 시키는 것은 죄는 중하다 할 수 있으나, 벌은 가볍다고 사료되옵니다. 또한 대간들이 일이 벌어지고 논할 것을 논하진 않고 논하지 않을 것을 논한 것 역시 각 대간들의 소견이 같지 않기 때문일 것이라 여겨지나, 꼭 그게 아니더라도 지금 대간들이 전하의 말씀대로 세좌의 일을 논하지 않고 있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니 진실로 죄가 있다 할 수 있겠사옵니다. 그러나 이러한 연유로 죄를 준다면 훗날에는 대간들이 오늘 날의 일을 거울 삼아 과도한 탄핵을 일삼을 듯 하니 그게 곧 폐단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사료되옵니다.”
그 다음으로는 노공필이었다.
“그렇사옵니다. 세좌의 불경함을 따진다면 진성대군의 일보다 훨씬 지나친데, 지금 대간들은 대신이라고 우대하여 탄핵하기를 꺼려하고 있는 것이니 역시 죄가 없을 수 없사옵니다. 그러나 좌상께서 말씀하신대로 지금 대간들을 벌준다면 훗날 탄핵이 악용될 수 있사옵고, 폐단으로 몸살을 앓을 수 있으니 경험 많은 노신들을 불러 의논케 함이 온당하다 사료되옵니다.”
윤필상.
이극균.
노공필.
세 명의 답변에 절로 냉소가 나왔다.
‘차라리 대사헌처럼 입이라도 다물고 있으면.’
그랬다면 평가가 조금은 후해지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도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
특히 의정대신(議政大臣,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이름)중 하나인 극균에게서 세좌를 벌하라는 말을 들었으니 이걸로 다음 일을 수행 할 수 있게 됐다.
“경들의 말이 참으로 혜안이 아닐 수 없소. 세좌의 일이 무례가 아니라 실수라 하기에 나는 경들이 사사로운 감정을 갖고 있는 줄로만 알았는데 같은 신하의 반열에 있더라도 이처럼 무작정 두둔하기 보다 객관적으로 판단하니 조정의 앞날이 참으로 밝소이다. 다만 아까 말했다시피 대간들이 사사건건 임금은 책망하면서도 대신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은 세좌의 자제들이 아비의 일로 독기를 품을까 말하지 않는 것이라 생각되나, 금부지사의 말처럼 지금 대간들을 벌준들 무슨 의미가 있겠소이까?”
“실로 옳으신 말씀이옵니다. 신들이 처음에 잘못 판단하여 죄주기를 청하지 못 하다가 전하의 전교를 받고서야 세좌의 무례를 깨달았으니 참으로 민망하옵고, 세좌의 죄는 역시 중하게 다스림이 옳은 듯 하옵니다.”
필상의 답변에 융은 흐뭇하게 미소지었다.
“과연 그렇소. 게다가 성왕(成王, 주나라의 임금)과 주공(周公, 주나라때 왕자겸 정치가)의 일화를 생각한다면 세좌의 일은 더욱더 괘씸한 일이오. 하물며 경들의 견해가 이러한데 내 벌주기를 어찌 망설이겠소. 세좌의 일국의 대신이라 하나 지은 죄가 가히 가볍지 않으니 체임으로 끝내지 않고 그 직을 파(罷)하도록 하겠소. 경들은 세좌를 어느 고을로 유배보내면 좋을지 의논해보고, 의견이 좁혀지는대로 영상은 윤대를 청하시오.”
“서,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신하들이 조심스럽게 편전을 빠져나가자 빈 편전에는 융의 웃음소리만이 울려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