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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35화 (35/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35화>

    예상한 일들

    ***

    “경들도 보았겠지만 내 오늘 참으로 참담한 심정이다. 임금이 내린 술을 엎지른 자가 고금 어디에 있단 말인가? 승정원의 견해는 어떤가?”

    창녕대군의 일로 사정상 입궐 할 수 없었던 도승지 김감을 대신해 좌승지 허집(許輯)이 찜찜한 표정과 함께 답했다.

    그 역시 상황을 모두 목격한 시연관중 한 사람이었다.

    “전하께서 말씀하신대로 고금을 상고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옵고 과연 술을 엎지른 게 사실이라면 공손하지 못 한 일이옵니다. 신하로서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사옵니까. 다만······.”

    “그만하면 됐다.”

    “···예.”

    “대사헌.”

    민휘가 읍(揖)을 하며 말했다.

    “···예, 전하.”

    “나는 본시 배움이 얕고 언관들에게 지적 받는 바가 많은 군왕이라 잘 모르겠다. 대사헌은 언로를 책임지는 장관중 한 사람인데, 경이 생각하기에 술을 엎지른 데 모자라 옥체에 까지 손을 댄 자는 고금에 있었는가?”

    “···”

    “어찌 말이 없는가? 경에게 하문한 것이다.”

    “···좌승지의 말대로 공손하지 못 한 일이옵고 신하로서 해서는 안 될 짓임은 확실하옵니다.”

    비릿하게 웃은 융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옳다. 참으로 대사헌의 말이 옳아. 안 그래도 바로 얼 마 전, 경들은 임금의 옥체는 개인의 것이 아니니 중히 보존해야 한다 일렀다. 내 그 말을 듣고 깨우친 바가 있었는데 이같은 일이 다른 사람도 아닌 일국의 대신으로 하여금 일어났으니 한심스럽고 통탄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경들은 아니 그런가?”

    편전에 수십이 넘는 대신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지만 그 누구도 동조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서로의 눈치를 살필 뿐이었다.

    어차피 동조 따위는 기대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융은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세좌는 어찌 벌하는 게 좋을 것 같은가?”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대사간 이자건이었다.

    그는 다른 대신들의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한 발내딛으며 읍을 했다.

    “말해보라.”

    “전하께서 진노하심에 신 또한 나라의 녹을 받아 먹는 한 사람의 신하로서 부끄럽기 짝이 없었사옵고, 두렵기 짝이 없었사옵니다. 하오나 군왕은 무릇 관용으로서 나라를 다스린다 하였으니 지금의 일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겠사옵니까. 비록 세좌의 일로 큰 상심을 얻으셨겠지만, 세좌가 고의로 술을 엎지른 것은 아닐뿐더러 더욱이······.”

    “관용으로 나라를 다스린다?”

    “···예.”

    “대관절 어느 관용이 임금의 권위 보다 위에 있는 것인가?”

    “···”

    “대사간은 지금 세좌가 술김에 우발적으로 벌인 일이니 용서하라 말하는 것이겠지?”

    “송구하오나 그렇사옵니다. 예컨대 선왕의 일화를 말씀 아뢰본다면······.”

    쾅!

    “경들은 어찌 선왕처럼만 하라고 하는가?! 세자 때부터 그랬다. 경연에 들면 늘 선왕 같은 군왕이 되라 하였고, 늘 선왕처럼 몸가짐을 조심하라 하였다. 도대체 선왕은 경들에게 어떤 군왕이었길래 선왕을 쏙 빼닮으라고만 하는 것인가, 그래서 심지어는 임금에게 무례를 범한 신하를 벌할 때도 선왕의 일을 언급하는가?”

    “···”

    “대사간은 말해보라. 선왕은 어떤 분이셨는가?”

    딱히 대답 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신하가 임금의 옥체에 손을 대는 것은 우발적인 사고이니 가당한 일이지만 종친이 임금의 옥체에 손을 대는 것은 부당한 일인가? 대사헌이 말해보라.”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종친이 옥체에 손을 댄 일과 신하가 실수로 손을 댄 일은 비교 할 수가 없······.”

    쾅!

    “좋다! 경들이 이리 말하니 나는 왕으로서의 도리와 체통을 지켜야겠다.”

    “···?”

    “세좌는 예조의 장관으로서 이럴 순 없는 법이었다. 세좌가 날 얼마나 가벼이 여겼으면 이런 무례를 취중에라도 저질렀겠는가? 이는 은연중에 과인을 임금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가벼운 사고라면 사고요 우발적 사고라면 사고에 가까운 일에 설마했던 대신들은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 했다.

    “좌승지.”

    “에··· 예, 전하!”

    “추국(推鞫, 임금의 특명으로 죄인을 신문하는 일)에 대한 전지(傳旨, 임금의 뜻을 관청이나 관리에게 보냄)를 금부에 보낼 때 이렇게 받아쓰라.”

    “마, 말씀하소서.”

    “세좌가 술이 취해 임금에게 무례를 저질렀는데 마침내 술잔 깨지는 소리가 나도록 술을 엎질러 감히 곤룡포를 적셨다. 거기에 임금의 옥체에 손을 대는 무례를 범하였고 여전히 술에 취해 횡설수설하며 왕을 능멸했다. 이렇게 사건을 가감없이 금부에 전지하라.”

    “아, 알겠사옵니다.”

    명을 받든 허집을 제외하곤 아직도 어안이 벙벙한 대신들이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들이 받을 충격이 더 남아 있었다.

    “참판.”

    육조참판이 있었지만 융이 부른 참판은 예조참판 김봉(金崶)이었다.

    “예, 전하.”

    “내 예법에 어두워 그러는데······.”

    “하문하소서.”

    찌릿.

    융이 민휘를 흘겼다.

    “생각해보니 무례를 범한 것이 세좌만이 아닌 듯 하다.”

    “···!”

    “어, 어인 말씀이시온지······.”

    “세좌가 찬안상으로 올라올 때 대사헌과 함께였는데, 세좌와 마찬가지로 대신의 반열에 있는 자가 동료 대신을 제지하지 못 하였으니 설령 세좌처럼 옥체에 손을 대고 곤룡포에 어사주를 쏟진 않았지만 똑같이 무례를 범한 셈이 아니겠는가?

    꿀꺽.

    “그, 그것이······.”

    “전례를 상고해보면 어떠한가?”

    “하, 함께 무례를 범하였다면 죄가 없다고 할 순 없겠사오나 그래도 대사헌은 세좌를 제지하려 하였고······.”

    “격렬히 제지하지 않았는데 누군가 광화문 담장을 넘었음에도 수문장이 대충 제지하면 그것도 제지한 것이 되는 것인가?”

    “···”

    “참판도 전례를 참고할 수 없는 모양이다.”

    “···송구하옵니다.”

    “대사헌의 일은 세좌의 국문이 끝난 직후 논하도록 하겠다. 모두 나가보라.”

    ***

    국문(鞫問).

    사전적인 의미는 국청에서 죄인을 신문하는 일을 말하지만 대부분 국문하면 임금이 친히 죄인을 신문하는 친국을 떠올린다.

    하지만 국문과 친국은 엄연히 별개였다.

    국청(鞫廳)이 임시적으로 설치돼서 죄인을 신문하는 건 같았지만 그 주체는 지금처럼 달랐다.

    “이거, 정말로 신문을 해야 하는 것이옵니까, 대감.”

    위관(委官)으로 제수 된 좌의정 이극균(李克均)은 고개를 돌렸다.

    떫은 감을 씹은 것처럼 떨떠름해 하는 의금부지사(義禁府知事) 노공필(盧公弼)이 보였다.

    떠름한 건 극균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보기에 이번 일은 국문 씩이나 개최 할 정도는 아니었다.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말로 점잖게 타이를 수도 있는 문제였고, 세좌가 술이 깬 뒤에 그 날의 무례를 거론해도 됐었던 일이었다.

    ‘한데 속전속결이셨으니······.’

    전하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국문을 명하셨다.

    세좌가 하급 관리라면 모른다. 하지만 세좌는 예조의 장관으로 중신의 반열에 있는 인물이었다.

    선대왕 대부터 조정에 있었고 선왕의 경연관, 즉 어떻게 보면 선왕의 스승이기도 했던 인물이 바로, 이세좌였다.

    그런데 국문이라니······.

    직접 위관 직을 제수 받았지만 아직도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이 안 갔다.

    “어명이지 않았는가.”

    떫은 건 매한가지였지만 도리가 없었다.

    “그래도 고신은 아니 해도 되겠지요?”

    “내키지 않는가?”

    공필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판께서 나라에 쌓은 공이 작지 않은데 어찌 고신 하는 일이 내킬 수 있겠습니까?”

    “흐음··· 일단 신문이나 시작하세.”

    “예.”

    곧이어 위관 극균을 필두로 여러 중신들이 참석한 자리에서 신문이 시작됐다.

    “죄인은 전날의 일을 기억하시오?”

    “기억합니다. 하구 말구요.”

    “술이 꽤 취했었소. 그것도 기억하오?”

    “예, 대감. 그 또한 기억합니다.”

    “이미 잘 알겠지만 전하께서 추국을 명하셨소이다.”

    이미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들이닥친 금부 나졸들에 의해 의금부에서 밤이슬을 맞았던 세좌였다.

    모를 리가 없었다.

    “알고 있습니다.”

    “전지에 의하면 감히 어사주를 쏟아버린 데 모자라 임금의 옥체에 손을 대기까지 했다고 나와있소이다.”

    세좌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극균은 찝찝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죄인은 의도한 것이오 아니면 실수였던 것이오?”

    “물론 실수였사옵니다!”

    물론 그랬겠지.

    극균은 십분 이해한다는 마음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자 세좌가 변명을 이어나갔다.

    “좌상께서도··· 아니, 자리에 있는 제공(諸公)들께선 모두 아시지 않습니까? 전하께서 친히 불러 어사주를 하사 하시는데 어찌 긴장된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이미 찬안상으로 부르셨을 때부터 숨이 헐떡여 도통 마음이 진정이 안 됐는데 가뜩이나 술에 까지 취해 있었으니 정신이 온전치 못 했었습니다. 내 어찌 신하된 자로 그런 무례를 의도 하고 저질렀겠습니까? 억울합니다, 대감!”

    “크흠. 죄인의 억울함을 내 어찌 모르겠소이까.”

    “확실히 극도로 몸을 사리다 보면 오히려 실수를 하기도 하는 법이지요.”

    공필의 첨언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사람이 극도로 긴장하면 저도 모르게 실수를 하기 마련이다.

    하물며 술에 취한 상태에서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하긴. 금부지사의 말이 실로 타당하오. 어제 예판을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전하께서 친히 어사주를 내려주셨다고 어찌나 좋아 했었소이까? 그런 분이 의도적으로 실수를 했을 리가 없지.”

    “영감의 말이 맞소이다.”

    중신들이 떠드는 소리에 신문장이 소란스러워졌다.

    극균은 등채를 내리치며 소란을 잠재웠다.

    그러고는 충심을 의심 받는 상황에서 눈물까지 흘려대며 억울함을 호소하는 세좌에게 말했다.

    “그··· 일단은 죄인의 신분이니 자중하고 계시오. 국문이 벌어졌다곤 하나 설마 전하께서 일국의 대신을 실수 한 번으로 파직 시키시겠소?”

    “대감··· 하면 이 사람은 대감과 다른 분들만 믿고 있겠습니다.”

    “걱정마시오.”

    ***

    다음 날.

    「신들이 세좌를 국문한 바, 의도적인 것으로 보이진 않았었고 평소 술을 잘 마시지 못 하는 상황에서 성상의 위엄에 절로 경외가 들어서 내리는 어사주를 족족 들이키다 보니 저도 모르게 실수를 한 것 같았습니다. 게다가 세좌는 전하께서 어사주를 내려주시고 찬안상으로 돌아가실 적에 좌중을 돌아보며, ‘전하께서 친히 내게 어사주를 내려주셨소이다. 내 어찌 흥이 돋지 않을 수 있겠소? 우리 전하께선 실로 만세가 백록 하실 분이오.’하므로, 신들도 그 말을 듣고 이구동성으로 ‘맞다’외치면서 웃은 일이 있었는데 만약 세좌가 일부러 술잔을 엎지르고 옥체에 손을 댄 것이라면 어찌 전하께서 내리신 술에 기뻐하며 모든 사람에게 떠들었겠습니까? 이러한 정황과 신문 결과로 보건대 세좌는 술에 취해 실수를 깨닫지 못 한 듯 합니다. 」

    국문 결과를 받아본 융의 입가가 비틀렸다.

    이럴 줄 알았다.

    어째 예상은 한 번을 빗나가질 않는다.

    ‘단순한 자들 같으니.’

    차라리 지금의 상황이 더 낫다.

    아직 제대로 사태 파악을 못 한 것 같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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