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군으로 살어리랏다-34화 (34/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34화>

    피를 부르는 전주곡

    ***

    결전의 날이 바로 내일이었다.

    떨리는 마음을 주체 할 수 없었다.

    그 떨리는 마음을 주체 할 수 없었던 융은 마음을 다잡기 위해 궐을 나섰다.

    미복 차림으로 궐을 나선 그는 남촌에 김감의 집을 서성였다.

    김 상선에 의하면 낮밤 가릴 것 없이 이틀 내내 허연 연기가 치솟고 있었다고 했는데, 사흘 째 되는 날인 오늘도 허연 연기가 보인다.

    가슴이 미어진다.

    김감의 집 문턱 앞에 선 융은 한참을 우두커니 서있었다.

    당장이라도 대문을 박차고 들어가 창녕을 끌어안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애써 다잡은 마음이 해이해질 것 같았다.

    어렵사리 발길을 돌린 융은 임의 저택으로 걸음을 옮겼다.

    때아닌 방문에 임이 허둥거리며 그를 사랑으로 안내했다.

    “드디어 내일이구나.”

    “떨리시옵니까?”

    “방금 김감의 집에 들렀다 오는 길이다.”

    “대군 마마를 뵙고 오시는 길이옵니까?”

    씁쓸히 웃은 융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신음하는 창녕을 보면 마음이 찢어질 것 같아 차마 문턱을 넘진 못 했다.”

    “···잘 하셨사옵니다.”

    “그러한가, 잘 한 일인가?”

    “대군 마마는 조만간 궐에서 만나 뵐 수 있을 테지만, 내일의 거사는 내일이 아니라면 어려우니 잘한 일이 아니겠사옵니까?”

    “그래. 창녕은 조만간 궐에서 볼 수 있겠지, 언제 병석에 누워있었냐는 듯 해맑게 웃으면서 달려오겠지.”

    “필시 그러실 것이옵니다. 대군의 일이 틀어진다면 하늘이 없다는 뜻이니 전하께서 왕도(王道)를 지킬 필요가 없음을 말하는 것이겠고, 하늘이 있다면 당연히 대군께선 쾌차하실 것이며, 내일의 거사도 성공할 것이옵니다.”

    어느 쪽이든 내일의 거사는 성공한다는 뜻이었다.

    잠시 뜸을 들인 융이 찻잔에 손을 뻗었다.

    임이 본 융의 손은 가늘게 떨고 있었다.

    “경은 어떠한가?”

    “어인 말씀이시온지······.”

    “부끄러운 말이지만 나는 심히 두렵다. 경은 두렵지 않은가?”

    “당연히 성공할 거사인데 두려울 게 무에 있겠나이까? 전하께서는 그 간적들을 쳐내는 데 성공하실 것이옵고, 간적들을 몰아내신 연후에는 성군으로 기록되실 것이옵니다. 다만······.”

    “···?”

    “거사가 실패하고 간적들이 더 날뛰게 될까봐, 그것이 더 두렵사옵니다. 그리된다면 전하께서는 심병을 다스리실 수 없을 것이고, 심병을 다스리실 수 없으니 정사를 돌보기 어려우실 것이옵니다. 그렇다면 조선의 백성들도 태평성대를 누리기 힘들 테니, 이것이 두렵사옵니다.”

    “오늘 진성의 일은 들었는가?”

    “들었사옵니다.”

    “내 참말로 민휘의 입을 찢어버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머지 않았나이다. 민휘가 염근리로 이름이 드높고, 신념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라 사림에서 추앙하는 바가 있다지만, 그 신념이란 참으로 보잘 것 없다는 게 조만간 드러날 것이옵니다.”

    “그렇겠지.”

    “···”

    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먼저 입을 연 건 융이었다.

    “내일 모레가 회릉(懷陵, 폐비윤씨를 이름)의 기일이다. 경은 그 날 저녁의 일을 말해보라.”

    밑도끝도 없는 질문이었지만 임은 당혹스러운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흐트러짐 하나 없이, 다만 꺼져가는 호롱을 다시 밝혔다.

    “그 날 부왕께서는 간적들의 말을 듣고 경연을 마치시자 마자······.”

    “부왕이라 칭하지 마라.”

    “···그 날 선왕께서는 경연을 파하자마자 패초를 보내셨사옵니다. 동이 트기도 전에 간적 명회를 필두로 창손, 심회, 국광, 필상이 입궐하였는데 역시 사관들이 동석한 자리였사옵니다.”

    “···선왕은 그런 분이셨지.”

    “선왕께선 대사를 홀로 결단 내릴 순 없으시다면서 대신들과 폐출 문제를 논의하셨사옵니다. 몇몇 대신들이 반대하였사오나 오히려 다음 날, 중궁 폐출을 반대한 자들을 종사에 누를 끼친 죄목으로 추국하셨사옵니다.”

    “계속하라.”

    “추국이 시작되니 모두 몸을 사렸사옵니다.”

    “경은 아니 그랬다.”

    “···모두 몸을 사리니 여론이 급격히 쏠렸사옵고 필상과 창손 등 다른 간적들의 기세가 더욱 등등해져 중도를 지키고 있던 이들까지도 모두 폐출을 지지하게 되었사옵니다. 특히 이때에 민휘의 상소가 큰 영향을 끼쳤사온데······.”

    “내용이 어떠하였는가?”

    “참으로 망측하여······.”

    “괜찮다.”

    “회릉의 덕이 부족하니 폐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논리를 펴면서 나라의 국모로서 족친을 궐에 자주 불러들이고, 그로 말미암아 그 족친들이 일으키는 폐단을 지적하였사옵니다. 동시에 국모로서의 체통을 전연 지키지 않고 제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궐의 남녀궁인 모두가 다 알게 할 정도라 비하 하였사옵고, 성품이 옹졸하고 사치가 심하여 종국에는 주공(周公)이 관숙(管叔)과 곽숙(霍叔)을 벌한 일을 빗대어 폐출이 정당함을 읍소하였사옵니다.”

    “소싯적에도 그 혀는 사람 죽이는 혀였도다.”

    “예. 그로부터 며칠이 되지 않아서 회릉을 폐출한다는 교서가 내려졌사옵니다. 폐출이 부당하다는 여론은 있었사오나 이미 간적들이 여론을 쥐고 있으니 바뀔 것이 있었겠사옵니까?”

    임은 잠시 융의 안색을 살폈다.

    눈시울이 붉었다.

    그만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고개를 조아리자,

    “멈추지 마라.”

    “하오나······.”

    “내 어미의 복수를 드디어 내일 하게 되었는데, 그 내막을 상세히 되새김질 하지 않으면 원수를 어찌 갚겠느냐?”

    잠시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던 임은 그 이후의 일을 상세히 털어놓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임인년(壬寅年, 1483년)에 세좌가 드린 사약을 잡수고 중궁께오서는 숨이 끊어지신 것이옵니다. 그때 세좌와 함께간 자들에게 들었사온데······.”

    “남김없이 말하라.”

    “민휘와 폐출을 찬성한 이들이 망설이는 세좌의 길을 재촉했다 하옵고······.”

    이미 알고 있었던 내용들이다.

    수차례.

    아니, 수십차례 들었던 내용들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진정되질 않았다.

    “또······.”

    “모두 털어놓으라지 않았느냐.”

    “···세좌를 따라간 이들에 의하면 사약을 받기 전 세좌에게 말하길 ‘원자··· 우리 원자를 한 번만 볼 수 있게 해다오.’말씀하셨사온데 세좌는 ‘어명이니 어쩔 수 없소.’하고 곧바로 사약을 들이키게 했다고 하옵니다.”

    우리 원자를 한 번만 볼 수 있게 해다오.

    당시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훤히 그려지는 것 같았다.

    ‘이제 너희의 차례다.’

    궐로 돌아간 융은 윤씨의 일을 새삼 가슴에 아로새기면서,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드디어 내일.

    이제 그 간적들이 죄를 받을 차례였다.

    ***

    양로연(養老宴)은 그 귀천을 가리지 않고 오래 산 노인을 공경한다는 취지에서 벌이는 일종의 연회였다.

    다만 양로연 마다 다소 그 차이는 있었는데, 이번에 개최된 양로연은 기신(耆臣, 노신)과 양민 노인들을 대상으로 한 연회였다.

    근정전 뜰에는 연회상과 천막이 준비돼 있었다.

    그 근정전을 들어서는 입구에는 어좌가 놓여져있었는데, 융은 노인들이 근정문을 들어설 때 까지 섬돌 아래서 선 채로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노인들이 예관들의 안내를 받고, 차례, 차례 등장하자 계단을 올랐다.

    그가 어좌에 앉은 것은 노인들이 모두 자리를 잡았을 때였다.

    종친과 문무백관, 그리고 노인들이 임금께 공경을 나타내는 절을 올리는, 어찌보면 노인들에겐 힘에 부칠 수도 있는 거추장스러운 의식과 함께 마침내 나인들이 연회상에 음식들을 올리기 시작했다.

    “휴안지악(休安之樂, 조선의 아악곡 중 하나)을 울리라.”

    “휴안지악 울리랍신다!”

    외침과 함께 헌가(軒架, 음악 연주시에 섬돌 아래에 위치한 악대들의 자리)에서 휴안지악의 연주가 시작됐다.

    그리고 한참 후.

    “어짐을 좇으시고 늙은 자를 잘 보필하니 우리 전하께선 참으로 덕이 있으신 분이로다! 만년 백록을 누리소서!”

    예관의 외침과 함께 연회에 참여한 문무백관과 노인들이 다시 한 번 절을 올렸고, 찬안(饌案, 잔치때 임금의 독상에 올라오는 음식상)이 올라감으로써 본격적인 잔치가 시작됐다.

    “내 예관이 말한대로 어짐을 좇는지 모르겠으나 만년 백록을 누릴 사람들은 과연 자리한 노인들이다. 그대들이 만수무강하여 하늘에 부끄러움이 없게하면 과인으로선 족할 바가 없겠도다. 연회에 참여한 노인들은 취하여 죄를 범해도 내 이를 책잡지 않을 것이니, 흥에 겨우면 흥에 겨운 대로, 술맛에 빠지면 술맛에 빠진대로 연회를 즐기라.”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임금과 함께 술잔을 나눈다는 뜻에서 술이 몇 순배 돌았다.

    그 의식마저 끝나자 노인들은 노인들대로 잔치를 즐겼고 신하들은 신하들대로 잔치를 즐겼다.

    웃고 떠들고 마시고.

    분위기가 점점 무르익자, 찬안의 진미는 건들지도 않은 융이 어좌에서 내려왔다.

    그는 양로연에 참여한 120명의 노인들에게 일일이 어사주를 내려주며 만수무강을 바란다, 덕담을 했다.

    노인들에게 술을 하사한 그는 곧 시연관(侍宴官, 잔치에 참여한 관리)들에게 다가갔다.

    시연관들이 쭈뼛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됐소들. 오늘은 노인들의 만수무강을 바라는 기쁜 날인데 예를 갖춰서 무얼 하겠소? 모두 앉아서 즐기시오.”

    그는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영의정 성준(成俊)에게 술을 내렸다.

    성준이 고개를 돌려 예를 갖춘 채 어사주를 들이키자, 흡족한 표정으로 이를 지켜보던 융은 좌의정 이극균(李克均)과 우의정 유순(柳洵)에게 다가가 이전처럼 술을 내렸다.

    역시나 앞전처럼 예를 갖추며 술잔을 들이켰다.

    이후에도 각 대신들에게 술을 내린 융은, 머잖아 대사헌 민휘의 앞에 도달했다.

    융이 손을 뻗자 내관이 빈 술병을 받아들고, 새 술이 담긴 병을 건네주었다.

    어사주를 내리면서 대작(對酌)을 조금 했더니 취기가 올라있는 상태의 융은 비틀거리면서 민휘에게 술을 내렸다.

    “대사헌.”

    “예, 전하.”

    “어사주요. 한 번에 쭉 들이키시오.”

    “여부가 있겠나이까.”

    술잔이 넘실거리도록 술을 따라주자, 민휘가 역시나 예를 갖추며 술을 들이켰다.

    민휘에게 한 잔 더 어사주를 내린 그는, 비틀 걸음과 함께 예조판서 이세좌에게로 향했다.

    동료 대신들과 웃고 떠들던 세좌가 고개를 조아렸다.

    “내 우리 예판께는 참으로 고마움이 많소이다.”

    “서, 성은이 망극하여 몸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피식.

    “많아. 고마운 게 너무 많아. 너무 많아서 내 술을 한가득 내려주고 싶소이다.”

    쪼로록-.

    “쭉 들이키시오, 쭉.”

    세좌가 술을 들이켰다.

    그 모습을 흡족히 지켜보던 융은 찬안상으로 향했다.

    어좌에 앉은 그는 착 가라앉은 눈으로 여전히 웃고 떠드는 세좌와 민휘를 응시했다.

    둘은 뭐가 그리도 즐거운지 입가에 함박웃음이 가득이었다.

    ‘일국의 왕후를 그리 모질게 폐출시켰음에도 느끼는 바가 하나 없는 짐승 같은 것들.’

    한동안 둘을 바라보며 주먹을 꽉 말아쥐던 융은 두 사람이 불콰하게 취기가 오른 것 같자, 상선을 시켜 두 사람을 찬안상으로 올라오도록 했다.

    “부르셨나이까.”

    비틀거리는 이세좌를 부축하며 섬돌을 오른 민휘가 고개를 빳빳이 든 채 말했다.

    당장이라도 금군의 칼을 빼들고 저 목을 쳐버리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거사는 실패다.

    융은 환히 웃으며 자리를 권했다.

    “앉으시오. 내 두 분께는 이리 자리를 마련하여 어사주를 내리고 싶었소.”

    “망극하나이다.”

    곧이어 내관들이 의자를 내어오자, 세좌와 민휘가 착석했다.

    “우리 예판께서는 술이 약하시다고 했던가?”

    트림이 나오는지 황급히 입을 틀어막은 세좌가 힘겹게 답했다.

    “예··· 신은 수, 수를 잘 모타나이다.”

    “그런 것 같소이다. 좌우로 비틀거리면서 춤을 추고 계시지 않소?”

    “소, 손구하나이다.”

    “자, 한 잔 받으시오.”

    “흐읍··· 예.”

    세좌가 힘겹게 술을 들이키자, 이번엔 민휘였다.

    “자, 대사헌도 한 잔 받으시고.”

    “감읍에 마지 않는 일이나이다.”

    민휘는 세좌와 다르게 반듯한 모습이었다.

    못 해도 술을 댓병은 들이켰을 텐데도 불구하고, 편전에서 늘 임금에게 호통치고 훈계하던 그 모습 그대로 꼿꼿했다.

    “우리 대사헌께서는 술이 센 가 보오?”

    “아, 아니옵니다. 전하의 앞이니 어찌 흐트러짐을 보일 수 있겠나이까?”

    피식 웃은 융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맞소이다. 임금의 앞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면 아니 되지.”

    “하옵고 전하.”

    “말씀하시오.”

    “전날의 일은 신이 과한 바가 있었나이다.”

    “진성대군의 일 말이오?”

    “예.”

    융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분노에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바드득.

    “이미··· 이미 지나간 일인데 내 연연할 까닭이 있겠소. 이리 좋은 스승들을 뫼시고 술잔을 들고 있으니, 지금은 그것만 생각하려 하오.”

    “천만 다행한 일이옵니다.

    “천만 다행한 일이지. 한데 내 하나만 물어도 되겠소?”

    “하문하소서.”

    융은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술병을 들어서 빈 민휘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술잔에 술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융은 기울인 술병을 세우진 않았다.

    넘실거리던 술잔이 마침내 휘의 손을 타고 흘러넘쳤다.

    “왜······.”

    “전하, 술이······.”

    “왜 진성의 일은 사과하면서 회릉의 일은 사과치 않는가?”

    “···!”

    민휘가 반응을 보이자마자, 융은 세좌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예판.”

    “꺼어억-! 옛!”

    임금의 면전에 트림을 해댔음에도 융은 그다지 기분 나빠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한 잔 더 받으시오.”

    쪼로로록.

    “가암사··· 서엉은이 망극··· 딸꾹! 하나이다.”

    “들이키시오. 쭉.”

    연신 비틀거리던 세좌가 술잔을 입으로 옮겼다.

    불상사는 그때 발생했다.

    무게 중심을 잃은 세좌가 그만 허공에 발길질을 하다가 술잔을 떨어뜨리고 만 것이었다. 그 술잔에서 비상한 술들이 융의 곤룡포를 적셨다.

    그것 뿐이라면 다행이련만, 문제는 상에 올라와있던 술병이었다.

    무게 중심을 위해 손을 뻗은 세좌의 손이 하필이면 찬안상의 보에 닿았다.

    그리고 그 보와 함께 찬안상에 올라간 수라가 허공에 떠올랐다.

    아찔한 마음에 휘는 임금을 바라보았다.

    본인처럼 아찔한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임금은 당혹스러움 하나 내비치지 않았다.

    다만.

    입꼬리가 올라가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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