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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33화 (33/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33화>

    소신, 신념 그리고 원칙

    ***

    사헌부.

    집무실에서 곧은 자세로 밀린 업무를 처리하고 있던 민휘는 눈앞의 인물에 뭔가 마음에 안 찬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인가? 진성대군이 해괴한 짓을 벌였다니?”

    민휘가 추궁하듯 묻자 눈앞의 인물 정붕(鄭鵬)이 사색에 질린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확실한 건 아니오나 진성대군께서 노복들을 학대했다는 소문이 대천(大川, 청계천)에서 돌고 있사옵니다.”

    아낙들의 입이란 실로 가볍다.

    둘 이상 모였다하면 입방아를 찧어대는 게 아낙들이었다.

    그 아낙들이 수십이 모인 대천의 빨래터는 도성 소문의 발원지가 되기도 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라 생각한 민휘가 말을 받았다.

    “학대? 진성대군이 말인가?”

    “예.”

    “흐음. 그럴 분은 아니신 듯 한데······.”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지 않사옵니까?”

    틀린 말은 아니다.

    임금께 직언하는 자들이라고 모두가 청렴결백한 건 아니다.

    그랬다면 조정대신들은 물론이고 문무백관 모두가 염근리(廉謹吏, 살아있을 때 받는 청백한 관리의 칭호)로 칭송 받았겠지.

    “어찌 학대를 했다던가?”

    “어제 대낮부터 갑자기 노복들을 불러 모으더니··· 이거, 참. 망측해서 감히 아뢰기가······.”

    “괜찮네. 말씀하게.”

    “노복들을 불러 모으더니 한 사람씩 대청에 오르도록 하였다고 하옵니다.”

    “마루에 말인가?”

    “예. 그러더니 의자에 앉히고는 왠 바늘로 쿡쿡 쑤셔댔다지 뭡니까?”

    “바늘?”

    “노복들이 통증에 신음해도 ‘다 너희를 위한 일이다’ 무시하고 계속 바늘로 찔러댔다 하니, 제아무리 노비 목숨 파리 목숨이라지만, 대명천지 이런 일이 어디 있을 수 있겠사옵니까?”

    민휘는 쯧쯧 혀를 찼다.

    정붕이 말한대로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더니 그 순진해 보이는 대군이 노복들에게 그런 학대를 가할 줄이야.

    “하면 모두에게 바늘을 찔러댔다는 말인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예. 피가 철철 흘러도 개념치 아니하시고, 어린 종놈이 발버둥치면 장부들로 하여금 못 움직이게 꽉 움켜쥐게 하고는 그 여린 살갖에도 바늘을 찔러댔다고 하옵니다.”

    “허어.”

    민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붕의 말대로 종놈 목숨 파리 목숨에 지나지 않는다지만, 학대와 교육은 다르다.

    종놈이 말을 안 듣는다면 주인의 권위가 실추 될 우려가 있으니 멍석을 말아야 한다. 통제력을 잃은 노비들은 천방지축에 다르지 않으니까.

    이건 교육에 해당한다.

    하지만 정붕이 말한 게 사실이라면, 엄연한 학대요 가해였다.

    더욱이 어린 종놈들에게도 손을 댔다고 하니 사실이라면 좌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데 어찌 그러셨을꼬.’

    다만 의문은 남았다.

    학대를 한다면 굳이 바늘로 찔러야 할 이유가 있었을까?

    멍석을 만다던가 태형을 가할 수도 있었을 텐데.

    민휘가 이유를 추측하는 그때.

    “그리고 저······.”

    “할 말이 더있는가?”

    “그게 이건 참으로 망측하고 입에 내뱉기가 껄그러운지라······.”

    “괜찮네. 이미 모두 털어놓은 마당에 더 거리낄 것이 무에 있겠는가?”

    연이은 채근에도 정붕은 입을 오물거리며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그것이··· 말씀 아뢰어도 될는지······.”

    “무릇 사헌부의 일이란 감출 것이 없어야 하는 법이네. 그래야 군왕을 올바른 길로 인도 할 수 있고, 백관의 표본이 될 수 있음을 모르는가?”

    “그건 아오나······.”

    “어허!”

    답답할 만큼이나 머뭇거리던 정붕이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실로 망측하고 소인도 입밖으로 꺼내기 조차 두려운 말씀이오나 부부인(府夫人, 중궁의 어머니나 대군의 아내에게 주던 외명부의 정일품 작호)께도 학대를 가했다고······.”

    “뭐, 뭐라? 부부인께도 말인가?”

    “사, 사실인진 모르옵니다. 영감께오서도 아시다시피 대천의 소문이란 것이, 작은 것도 크게 부풀려지기 마련인지라······.”

    “자네 말도래 대천의 소문이란 것이 크게 부풀려지긴 하지만 어느 아낙이 감히 대군과 부부인을 입에 담아 능욕하려 하겠는가?”

    정붕은 말없이 고개만 조아렸다. 그에 민휘는 허어, 탄식을 내뱉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리고 믿을 수 없었기에 확인이 필요했다.

    “확실히 신 제조(신수근)의 따님인 부부인께도 바늘을 찔러대면서 학대를 했다는 게지?”

    “소, 소문이 그렇사옵니다, 소문이.”

    “그러니 소문 말일세.”

    “···예.”

    “허어.”

    “하, 하오나 설마 그럴 리가 있겠사옵니까? 짓궂은 아낙들이 대군과 부부인의 사이를 시샘한 것이겠지요.”

    “방금도 말했지만 감히 일국의 왕자대군과 부부인을 능욕할 간 큰 아낙은 없네.”

    “···”

    잠시간 생각을 이어나가던 민휘는, 어느 순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어디 가시옵니까?”

    “소문이 사실인지 확인을 해야겠네.”

    “소인이 뫼시겠사옵니다.”

    민휘는 정붕과 함께 사헌부를 나섰다.

    목적지는 진성대군의 저택이었다.

    재차 확인을 하러 간 것이었지만, 따로 수소문을 할 필요도 없었다.

    이미 대군의 저택 근방에는 그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있었다.

    그는 빠르게 다리를 놀렸다.

    이번 목적지는 편전이었다.

    ***

    민휘의 방문은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더 달갑지 않은 건 당장이라도 뽑아버리고 싶은 그 세치 혀였다.

    “···하므로 사내종이든 계집종이든 가리지 않고 바늘로 찌르고 또 찔러서 학대 했다고 하니 대군저 5리(里)안에는 일이 있은지 하루 밖에 안 됐음에도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있사옵니다.”

    아마 저자는 지금 본인이 직소를 하고 있다고 생각할 터였다.

    하지만 맥락을 잘 헤아려 보면 참소(讒訴)였다.

    제놈들은 형제끼린 우애가 두터워야 무릇 집안이 밝은 법이라 설파하고 다니면서, 임금의 우애는 짚신만도 못 하게 생각한다.

    어찌 그리도 진성 아우를 고깝게 생각하는지 알 수 없었다.

    진성 아우가 노비를 학대했다?

    차라리 민휘의 본이 알고보니 김 성(姓)이란 걸 믿겠다.

    그만큼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여린 아이가 무슨 영문으로 노비를 학대한단 말인가?

    설령 학대했다손 치더라도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이치에 부합하지 않는 말이었다.

    “사헌부에선 소문만 듣고 움직이는가 보오. 임금이 게으르고 놀이만 일삼는다는 소문은 없더이까?”

    “듣기 망측하옵니다.”

    “사실이 그렇잖소? 하나만 물읍시다.”

    “하문하소서.”

    “경은 어찌 진성을 못 잡아 먹어 안달이오? 장쾌하게 답해보시오.”

    “모, 못 잡아 먹어 안달이라니 당치도 않은 말씀이시옵니다.”

    “못 잡아 먹어 안달이 아니면? 그게 아닌데 소문만 듣고 윤대를 청했단 말이오?”

    “제아무리 발없는 말이 천리길을 간다지만, 대군저 5리(里)안에는 일이 있은지 하루 밖에 안 됐음에도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있사옵니다.”

    “모름지기 백성이란 화두 하나에 울고 웃는 자들이요. 그리고, 대군저 5리 안에 소문이 파다하다 하였소? 경복궁 300리 안으로는 요즘 사헌부가 제 구실을 못 한다는 소문이 파다하던데 그건 아니 들었소?”

    융의 비아냥에 민휘의 인상이 굳어졌다.

    “전하.”

    “훈계조로 부르지 마시오.”

    “후··· 신이 어찌 사실 확인도 해보지 않고 전하께 윤대를 청했겠사옵니까. 참말이었사옵니다.”

    흠칫.

    융은 몸을 흠칫 떨었다.

    민휘 저자가 영 마음에 안 들긴 해도 없는 일을 사실처럼 꾸며 말하는 재담꾼은 아니었다.

    더욱이 굳이 그럴 이유가 없었다.

    만약 없는 일을 사실처럼 꾸며 말했다가 그게 아님이 드러나면 종친을 능멸한 셈이 된다.

    민휘는 그 정도로 서툰 자가 아니었다.

    ‘한데 어찌······.’

    민휘의 말이 참이라는 가정을 한다면, 진성 아우가 마흔에 달하는 노복들을 죄 학대했다고 한다.

    종놈들에게 손을 쓴 것도 모자라 제 부인에게 까지 손을 댔고.

    하지만 상식적으로 이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여린 아이가?

    도대체 왜?

    융이 난감한 듯 표정을 일그러뜨리자, 반대로 민휘의 기세가 올랐다.

    “거듭 말씀 아뢰옵니다마는, 노비라 한들 주인이 제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옵니다. 한데 잔인하고 추악한 짓이 이보다 더 심할 수 있겠사옵니까? 더욱이 전하께서진성대군을 ‘어질고 여리다’ 표현하셨사온데, 어진 마음이 있는 사람이 차마 할 짓 이겠사옵니까? 하물며 마음이 여린 사람이 이처럼 잔혹한 짓을 벌일 수 있겠사옵니까?”

    “타당한 이유가 있었겠지.”

    “어느 타당한 이유가 있었길래 노복의 몸에서 피가 철철 흘러 내(川)를 이룰 정도로 학대를 할 수 있겠사옵니까? 신은 미처 듣지 못 하였나이다.”

    “···”

    “노복의 일만으로 아뢰는 것이 아니옵니다. 부부인마저 함부로 대하였으니 신 제조가 어찌 허망하고 황망한 마음이 아니 들겠사옵니까?”

    “···다 끝났으면 나가보시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전하께선 일찍부터 종친을 아끼는 마음을 갖고 계셨사옵니다. 그 아름다운 마음을 신이 어찌 폄하하려 들겠사옵니까? 때문에 차마 진성에게 합당한 벌을 내리라 아뢸 수는 없겠지만, 타이르지 않을 순 없겠사옵니다.”

    쾅!

    “나가보라지 않는가!”

    “황송한 일이오나 아직 어지를 듣지 못 하였사옵니다.”

    융은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손톱이 살갖에 파고 들어 따끔한 통증과 함께 비릿한 냄새가 올라왔다.

    “그대는 끝까지······.”

    “···”

    “끝까지 날 능멸하는구나.”

    “어지를 내려주시옵소서.”

    융은 민휘를 직시했다.

    일다경, 일식경이 흐를 동안.

    그리고.

    “경의 뜻은 잘 알았다. 다만 지금 진성을 불러 자초지종을 묻기엔, 내일 양로연이 있으니 잔치에 찬물을 끼얹는 격 아니겠는가. 진성에겐 내일 양로연에 참석하지 말라 이르고, 양로연이 끝난 직후 궐로 불러들여 내막을 들어보겠다. 그리고 경의 말대로 진성이 노복을 학대한 사실이 밝혀진다면··· 그때 일을 공론화하겠다.”

    이 정도라면 만족할 만한 답변이었다.

    더 몰아붙인다면 저번처럼 역효과가 날 우려가 있었다.

    이쯤에서 만족한 민휘는 고개를 조아렸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망극까지 할 게 있겠는가? 다 원칙을 따르자는 말인데.”

    “그렇사옵니다. 원칙이옵니다.”

    “오늘 내게 큰 가르침을 줬으니 내일도 원칙을 지켜 내게 깨닫는 바가 있게 해주시오.”

    “여부가 있겠나이까.”

    융은 종종걸음으로 물러나는 민휘를 눈에서 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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