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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32화 (32/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32화>

    진성인 나가있어 뒈지기 싫으면

    ***

    택배 상하차를 한 느낌이다.

    팔이 뻐근하다 못 해 분리 될 것 같은 느낌이다.

    장장 네시간이 넘도록 행랑 식구들을 접종 시켰더니 팔이 남아나질 않는다.

    애들은 더 문제였다.

    아직 어려서 그런지 사실상 접종 자체는 그다지 통증이 있는 것도 아닌데, 눈앞에서 제팔을 침으로 긁어내는 데 대한 거부반응 때문인지 발버둥까지 쳐댔었다.

    새삼 소아과 선생님들의 고충을 알 것 같았다니까?

    바로 쉬려고 했는데 또 연산군 형님이 찾는다니 별 수 있나.

    땀범벅이 된 몸을 씻고 입궐을 했다.

    머잖아 내시들의 안내를 받아 강녕전에 들 수 있었다.

    너무 힘이 들었기 때문일까.

    연산군 형님이 앉으란 소리도 안 했는데 자리에 철푸덕 주저 앉았다.

    반갑게 손 흔들며 인사를 하시려던 형님이 흠칫하고, 상선도 흠칫하고, 나는 피곤하고······.

    두 사람의 반응에 뒤늦게 무례를 범했다는 걸 자각했지만 아, 몰라.

    정말 체력부터 길러야 될 것 같다.

    현호로 살 때는 체력 하나는 어디가서 안 꿀렸는데 이 몸뚱아리는 체력이 저질 중의 상저질이다. 고작(?) 땡볕에 네시간 서있었다고 이렇게 몸이 축나다니.

    “마, 마마.”

    안면을 수차례 튼 상선이다.

    형님께선 흔히 김 상선이라고 불렀는데 몇 번 안면을 텄다고 이젠 제법 편하다.

    진이 다 빠진 몰골로 고개만 살짝 돌려 네? 반문했다.

    그러자 김 상선 대신 연산군 형님이 답하신다.

    “상선은 그만 됐다.”

    “하오나······.”

    “상선도 내 스승들처럼 잔소리만 할 셈인가?”

    “···송구하옵니다.”

    괜히 나 때문에 상선 아저씨께서 쿠사리 드신 것 같아서 죄송한데, 진짜 피곤해서 그렇다.

    접종이란 게, 보통 노동이 아니었다.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는 작업이었달까.

    “눈그늘(다크서클)이 짙다. 밤잠이라도 설쳤느냐?”

    “아, 그게 밤잠을 설쳤다기보다는······.”

    “창녕 때문이로구나?”

    지레짐작해버리는 연산군 형님에 선뜻 아니오라고 답 할 수가 없었다.

    뭔가 산통 깨는 기분이란 말이지.

    “···아, 네. 그렇죠. 창녕 때문이죠.”

    “제 숙부가 이리 마음 쓰고 있다는 걸 아니 창녕도 금방 일어날 것이다. 너무 마음 쓰지 마라. 괜히 너까지 병석에 누우면 나는 어찌 마음을 다스리겠느냐?”

    새삼스럽지만, 이런 형님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전생에선 날 신경 써 준 사람 같은 건 없었는데.

    “식사는?”

    “아직 안 했어요.”

    “이런. 내가 애매한 때에 불렀구나.”

    “아녜요. 어차피 입맛도 없었는데요, 뭘.”

    “밥을 굶을 참이었단 말이냐?”

    사람이 극한의 노동을 하고 오면 탄수화물이 땡기기 마련이지만, 애매한(?) 노동을 하면 오히려 밥맛이 없어지기 마련이다.

    내가 그랬다.

    “네. 별로 생각이 없어서요.”

    솔직히 답했을 뿐인데, 연산군 형님은 쯧쯧 혀를 차시더니 날 안쓰럽다는 듯 바라보신다.

    “앞으로 끼니는 거르지 말거라. 창녕의 일로 너무 마음을 쓰는 것 같아 내 마음이 아프다.”

    아.

    그런 거였구나.

    연산군 형님을 처음 봤을 때부터 느꼈던 거지만, 사람이 참 감성적이다.

    뭔가 낙천적이신 것 같기도 하고.

    말했다시피 난 정말 밥생각이 없어서 안 먹은 건데, 그걸 그렇게 해석을 해버리시다니······.

    역시나 앞전의 상황처럼 부정하기엔 애매한 상황이다.

    “그러겠습니다.”

    “내 오늘 너를 부른 것은 이걸 보여주기 위해서다.”

    “···?”

    상선이 또 다른 내시의 손에 들려온 종이 한 장을 형님께 건넸다.

    형님은 그 종이를 다시 나에게 건넸다.

    살펴보니 시다.

    그것도 한시가 아니라 한글시.

    “언문··· 이네요?”

    “하하. 민망하구나.”

    정말 멋쩍으신지 머리까지 긁적거리신다.

    “내 간밤에 창녕 때문에 잠이 안 와 쓴 시다. 한시로 쓸까 하다 너의 시조가 마음을 울리는 바가 있었기 때문에, 너의 시풍대로 써봤다. 어떠한 지 읽어주겠느냐?”

    읽어주는 게 뭐 어려운 일일까.

    고개를 끄덕거리고 시를 읽어나갔다.

    밖은 비 개고 구름 가득해 달 밝은데

    문풍에 비친 달은 내 마음처럼 휘어졌구나

    울적해져 창문 여니 문풍 사이로 바람 깃든다

    머리 훑고 지나가는 바람이 꼭 춘풍 같아

    나도 모르게 옥루를 뱉었다

    언제라도 뛰어올까

    언제라도 재잘재잘 떠들까

    고대하는 마음에 남산만 하염없이 바라보매

    내 마음 알 길 없는 간관들은 경연에만 나오라 하니

    구중궁궐 새장에 갇힌 꼴이 어옹(漁翁)만도 못 하도다

    아아!

    내 가슴 소장 읽고 쿵쿵 방아찧고

    삼경(三更) 북소리는 꼭 우리 성(誠)이 기침소리 같아

    쿵쿵 방아 찧는구나

    시만큼 화자의 마음을 잘 드러낼 수 있는 도구는 없다.

    반대로 시만큼 화자의 마음을 잘 알 수 있는 도구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난 연산군 형님의 마음을 이 ‘삼경 북소리’란 시로 짐작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특히 ‘내 가슴 소장 읽고 쿵쿵 방아찧고 삼경 북소리는 꼭 우리 성이 기침소리 같아 다시 쿵쿵 방아 찧는구나.’라는 부분에선 나도 모르게 울컥하고 말았다.

    연산군 형님의 처지를 잘 나타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비로서 당장이라도 김감의 집으로 달려가고 싶지만, 밤늦게 까지 상소를 읽으면서 임금의 도리를 다해야 하는 형님에게선 저 멀리 삼경을 알리는 북소리가 창녕의 기침소리처럼 들리는 것이다.

    간밤에 궐에선 보이지도 않을 김감의 집 쪽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한숨만 내쉬었을 형님을 생각하니 괜스레 눈시울이 붉어진다.

    아버지가 되어 본 적이 없어서 부정이란 걸 실감 할 순 없지만, 자식을 그리는 그 마음은 충분히 공감이 간다.

    “우는 것이냐?”

    걱정스레 되묻는 형님에 나는 부랴부랴 소매로 눈가를 훔쳤다.

    “우, 울긴요. 아닙니다.”

    “네가 이리 마음을 써주니 나 또한 힘이 나는구나. 창녕도 숙부의 정성에 금방 쾌차 할 것이다.”

    “그럼요. 그럴 겁니다.”

    연산군 형님은 씁쓸히 시를 내려다보았다.

    “이 시는······.”

    “···”

    “이 시는 네가 사람을 시켜 창녕에게 좀 전해주겠느냐?”

    “제가 말입니까?”

    끄덕.

    “네 편에 딸려보내고 싶구나.”

    어려운 부탁도 아니었다.

    나는 흔쾌히 수락했다.

    병석에 누워있을 창녕을 떠올려서인지 우리 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먼저 말문을 연 건 형님이었다.

    “내 너를 부른 것은 그 때문이 아닌데, 괜히 분위기를 망친 것 같아 민망하다. 모레 있을 양로연 기억하느냐?”

    기억한다.

    종친들까지 참여해야 하는 자리라고 들었으니까.

    “예. 기억합니다.”

    “···”

    “전하?”

    “도저히 입이 안 떨어지는구나.”

    “우리 사이에 뭘. 괜찮아요. 편히 말씀하세요.”

    뭐 어려운 이야길 하시려고 형님이 심호흡까지 하며 숨을 가다듬으신다.

    그리고 어렵사리 꺼내신 얘기.

    “혹 그날 병이 나줄 수 있겠느냐?”

    “에? 갑자기요?”

    “그래.”

    “하지만 제 마음대로 병이 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내가 답답한 듯 상선이 말을 덧붙였다.

    “그 날 대군께서 아니 나오셨으면 하시는 것이옵니다.”

    “아니, 왜···?”

    “연유는 묻지 않았으면 좋겠다.”

    심장이 덜컹 내려 앉는 기분이었다.

    내가 뭐 실수라도 했나?

    다른 사람들 다 가는 잔치에 나만 오지 말라니··· 약간 서운해지려는 그때.

    “서운해할 필요 없다. 네가 양로연을 보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하는 부탁이다.”

    “아니, 안 나가도 되기는 한데··· 혹시 제가 형님 전하께 무슨 실수라도···?”

    연산군 형님이 손사래까지 치시며 격하게 부정을 하신다.

    “그럴 리가 있겠느냐. 다만 말했다시피 양로연이란 것이 볼 것이 못 된다. 눈에 담을 것이 못 되는데 내 어찌 네게 권하겠느냐? 정히 나온다면 말리진 않을 것이다.”

    청첩장도 없이 결혼식장을 가는 것만큼 뻘줌한 일이 없다.

    같은 맥락에서 초대장은 안 주지만, 와도 상관은 없다니······.

    ‘살짝 빈정 상하는 걸.’

    되도록 좋게 해석을 하고 싶었지만 그것과 별개로 빈정이 상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전하께서 그리 말씀하시는데, 뭐··· 굳이 볼 필요도 없을 것 같고··· 그 날은 두창 났다고 하고 아니 가겠습니다.”

    “재차 말하지만 내 너를 부르지 않고 싶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에 담아두지 말거라.”

    “네.”

    형님께서 재차 서운해하지말라시니 정말 무슨 사정이라도 있으시던지, 아니면 정말로 양로연이란 게 볼 것이 못 되나 보지?

    약간 서운하긴 한데 형님께서 그러시다니 믿어야지, 뭐.

    ‘한 번 가보고 싶긴했는데,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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