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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28화 (28/365)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28화>

제발 두창에 대한 대책이나 논합시다!

원자 시절에는 원자라서.

세자 시절에는 세자라서.

그리고 지금은 왕이라서.

늘 꺼이꺼이 숨 죽여서 울었었다.

이렇게 목놓아 울어본 게 언제인지 기억에도 없는 걸 보면, 이번이 처음 있는 일 같았다.

한참을 아이처럼 서럽게 울고나니 명색이 형으로서 아우 앞에서 못 볼 꼴을 보인 것 같아 창피한 마음이 들었다.

무안한 마음에 진성에겐 이만 돌아가라 전하고 서둘러 편전으로 걸음을 옮겼다.

패초를 받고 입궐한 대신들이 이미 한식경이 넘도록 나타나지 않는 자신에 삼삼오오 모여 이번 일을 떠들고 있었다.

“늦었소이다.”

한참을 울었었다.

눈은 팅팅 부었고, 목은 쉬었다. 안색을 가다듬고 온다고 훨씬 더 늦고 말았다.

짧게 말한 융은 대신들을 가로질러 용상에 앉았다.

“전하. 도성에 두창이 창궐한 일은 가벼운 일이 아니옵니다.”

민휘였다.

패초를 보내놓고도 한식경 가까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을 헛짓거리를 하다 늦었다고 생각했겠지.

“경의 말대로 도성에 두창이 창궐한 일은 가히 가벼운 일이 아니오. 하물며 자식이 그 두창에 걸려 사경을 헤매는데 한가하기 시간을 죽이고 있을 아비는 더더욱 없소.”

“크흠. 송구하옵니다.”

뻘쭘해진 편전 분위기를 환기시킨 것은 좌찬성 강귀손(姜龜孫)이었다.

“근원은 김감의 집이옵니까?”

“김감이 보내온 소식에 의하면 그런 것 같더이다. 자세한 건 사람을 이제 막 보내서 알 길이 없소.”

“신이 듣기로 김감의 집에서 머물던 창녕대군께서 두창에 걸렸다고 들었는데 사실이옵니까?”

어딘가 취조하듯 물은 건 대사헌 이자건(李自健)이었다.

가볍게 이맛살을 찌푸린 융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도처에서 탄식이 새어나왔다.

“하면 창녕대군만 걸린 것이옵니까, 그집 노복들도 함께 걸린 것이옵니까?”

“지금 그게 중요하오?”

“신들이 일전에 올린 상소를 떠올려보시옵소서. 대군마마께오서는 아직 대역(大疫, 천연두나 홍역)을 치룬 적이 없사오니 궐에서 머물게 하는 게 온당하다 말씀을 올리지 않았사옵니까?”

그래.

기억이 난다.

1년 조금 덜 된 일이었다. 창녕대군을 김감의 집으로 출합(出閤, 궐 밖에서 살게 함) 시킨다고 했을 때, 사헌부에서 일제히 연명소를 올리며 반대했던 기억이다.

하지만 상소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김감은 융이 총애하는 행신(幸臣)이었다.

창녕대군을 출합시킨 건, 갑갑한 궐에서 못 볼 꼴을 보게 할 바에는 여염집으로 보내 자유로이 살라는 차원에서 내보냈던 것인데, 믿을 만한 자에게 보냈어야 했고 그게 바로 김감이었다.

당시 사헌부는 김감은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이며, 어지(御旨, 임금의 뜻)를 흩뜨리는 자이니 대군을 김감의 집에 거처 시킬 순 없겠다 극렬하게 반대를 했었다.

말했다시피 저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순 없다.

견제 차원이었다.

하지만 융은 지금 저 말이 왜 나왔는지 이해 할 수 없었다.

이건 꼭······.

“대사헌은 어째 말에 가시가 돋힌 듯 하다. 하면 대군이 두창에 걸린 것이 과인이 부덕한 때문이란 것인가?”

“그런 말씀이 아니오라······.”

“대사헌은 말을 삼가라! 과인이 편전에 나온 모습이 냉혈한이라 그런 것 같은가?”

융은 가볍게 조소했다.

“아니다. 이것이 그대들이 말하는 군왕의 도리요, 군왕의 할 일이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김감의 집으로 뛰어 들어가 창녕을 안고, 창녕과 함께 고통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나 또한 일국의 임금이기 이전에 두창을 앓게 된 아이의 아비일진대, 대사헌은 어찌 그리도 말을 잔혹하게 한단 말이냐?”

“그, 그런 말씀이 아니오라 신은 그저······.”

쾅!

“아니긴 뭐가 아니란 말이냐!”

“저, 전하······.”

“고, 고정하시옵소서, 전하. 대사헌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게 아니오라 다만 간언을 듣지 아니 하신 데 있어서 아쉬움이 있는 것을 토로 하는 것이니 실로 직언이라 할 수 있는 것이옵니다.”

융은 비릿하게 웃었다.

“직언? 그래, 직언이지. 직언이니 나는 참아야지! 그랬다간 군주가 언론을 탄압하는 일이 되니 백번천번 부당한 말인들 참아야지! 설령 임금의 가슴을 후벼파는 말이라도 참아야지!”

“···고정하시옵소서. 신이 생각이 짧았나이다.”

대사헌의 사과에 융은 신경질적으로 도로 용상에 앉았다.

마음 같아서는 대사헌 저놈을 저잣거리 한복판에서 거열해버리고 싶었지만, 지금은 성을 낸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창녕의 목숨이 달린 일이었고, 도성 백성들의 목숨이 달린 일이었다.

호흡을 고른 융이 자못 차분한 어조로 운을 뗐다.

“후··· 모두 미안하게 됐소. 내 최대한 이성적으로 굴고 싶지만 창녕이 연루된 일이니 마음먹은대로 되지 않소. 도성에 두창이 창궐한 일은 경들의 말대로 가벼운 일이 아닌데, 하물며 이번엔 창녕이 두창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으니 간절함이 얼마나 더하겠소? 방금 내 진노는 군주가 아니라 아비의 진노라 생각하고, 기탄없이 대책들을 말해보오.”

민휘가 한 발 자국 앞으로 나왔다.

썩 내키지 않는 인물이지만, 이럴 땐 그의 비범한 머리가 빛을 발 할 수도 있는 법이었다.

융은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민휘를 반겼다.

“대사간은 기탄없이 말해보시오.”

“그전에······.”

“음?”

“방금 전하께오서 아비의 진노라 하셨사옵니만, 하오나 지금 신이 아뢸 말씀에는 군주의 진노가 깃든다 한들 말씀 아뢰지 않을 수 없겠사옵니다. 신이 입궐하매 남녀궁인들이 떠드는 소리를 우연찮게 들을 수 있었사온데 전하께오서 옥루를 흘리시며, 창녕의 일에 가슴 아파했다고 들었나이다.”

창녕의 일과는 별개로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이는 책 잡을 일이 아니옵니다. 전하의 말씀대로 천하의 어느 아비가 자식이 몹쓸 병에 걸렸는데 행동거지에 일관성이 있겠사옵니까? 다만 신이 지금 말씀아뢰고자 하는 것은 진성대군의 일이옵니다.”

“진성의 일이라니? 과인은 지금 도성에 두창이 창궐한 일을 논하고 있다!”

“도성에 두창이 창궐한 일도 중하오나 이번 일도 중하옵니다. 남녀궁인들이 떠드는 소리를 듣건대 진성대군이 옥체에 손을 댔다고 들었나이다. 제아무리 왕실종친이요, 임금의 아우라 하나 임금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댈 순 없는 일이옵니다. 만일 진성이 불순한 뜻을 가졌다면 어찌 되었겠사옵니까? 이는 비약일지 모르오나 신은 만약의 일을 말씀 아뢰는 것이옵니다. 전하는 만백성의 아버지이시온데 옥체를 함부로 남의 손에 맡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오니, 대군을 불러들여 자초지종을 묻는 일을 하지 않을 수가 없겠사옵니다.”

융은 할 말을 잃었다.

어이가 없어서 실소가 새어나올 지경이었다.

민휘는 임금이 어떤 역정을 낼지 몰랐는지 황급히 말을 매듭지었다.

“더욱이 민가에서 떠도는 전설에 의하면 세조께오서는 몸에 종기가 생긴 뒤로 백약이 무효하시니 아득한 마음에 오대산에 지성으로 기도를 하시고 시냇가에서 목욕을 하시는 와중에 동자승 하나가 나타나 등을 밀어주니 몸의 종기가 모두 사라져 사례를 하였다고 하옵니다. 그러면서도 두려운 마음에 말씀하시길, ‘너는 혹 다른 이를 만나더라도 옥체에 손을 대었다고 말하면 아니 된다.’ 하였사옵니다. 이것이 정말로 있었던 일은 아니겠으나, 무얼 의미하겠사옵니까? 그만큼 대왕께서 행동거지에 각별히 주의를 하셨다는 뜻이 아니겠사옵니까. 하온데 지금 전하께오서는 타인에게 함부로 몸을 맡기셨으니 이 만큼 아찔한 일이 어디에 있겠나이까?”

민휘의 말이 끝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융은 입을 열지 않았다.

아니, 열 수가 없었다.

너무 어이가 없으면 때론 말문이 막히기도 한다는데, 바로 지금 같은 때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융은 고개를 돌렸다.

당혹스런 표정의 상선이 시야에 보였다.

“내시부가 언제부터 사간원의 관할에 있었는가?”

언행에 특히 조심해야 할 내시부 힐책하는 말에 다르지 않았다.

“···송구하옵니다.”

“지밀에서 있었던 일을 만인들이 모두 알게 됐으니 이처럼 우스운 일이 어디있단 말이냐. 상선은 속히 함부로 입을 놀린 자들을 수색하라.”

상선이 종종걸음으로 편전을 빠져나갔다.

분위기는 서리가 내린 듯 차가워졌다.

내시부에 대한 힐난이었지만, 지밀에서 있었던 일을 편전에 까지 가져온 민휘에 대한 무언의 힐책이기도 했다.

“하면 대사간은 어찌 했으면 좋겠다는 말인가? 과인이 진성을 추국하라 금부에 명을 내리면 되겠는가? 그리고 국문을 진행하면 되겠는가?”

“그런 말씀은 아니오나 임금의 옥체에 손을 댄 일이 가히 가볍지는 않으니 따끔히······.”

쾅!

“대사간은 정녕 과인이 우스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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