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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27화 (27/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27화>

    왕의 자리가 갖는 무거움

    ***

    “그게 무슨 소리냐?”

    지밀.

    이름 그대로 고요해야 할 왕의 침전이 들썩거렸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도승지 김감(金勘)이 사람을 보내왔사온데 대군마마께오서 아무래도 두창에 걸린 것 같······.”

    쾅!

    “그러니 그게 무슨 소리냔 말이다!”

    “···화, 황송하옵니다, 전하.”

    그래, 소식을 가져온 승전내관(承傳內官)이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융은 철푸덕 주저앉았다.

    ‘창녕이 두창에 걸렸다니······.’

    그 해맑은 아이가?

    창녕아 부를 때면 늘 쪼르르 달려와 ‘아바마마’ 품에 안기던 그 아이가?

    마른 하늘에 날벼락도 유분수지 하늘이 계신다면 이럴 순 없는 일이었다.

    정녕 하늘이 계신다면 창녕까지 데려가면 아니 되는 것이었다.

    융은 자식복이 없었다.

    신씨와의 사이에서 처음 낳았던 원자는 태어나서 그 해 첫 눈도 보지 못 한 채 눈을 감았다.

    특히 지난 3년은 더 악몽 같은 나날들이었다.

    공주 중억(中億), 대군 총수(人壽), 영수(榮壽), 인수(人壽), 인수(仁壽)··· 다섯 자녀를 연달아 잃었던 지난 3년이었다.

    자식놈 하나만 앓아도 가슴이 미어지고, 또래 아이를 보면 눈물 지어지는데, 융안 다섯 자식을 3년 사이에 잃었었다.

    창녕은 그래서 더 애틋한 아이였다.

    세자는 어린 나이임에도 의젓한 바가 있고 어른스러워서 주변에서도 국본(國本, 세자의 별칭)으로서 손색이 없다 칭찬이 자자했다.

    반면 창녕은 제 형과 다르게 딱 서너살 배기 아이 같은 성품이었다.

    의젓하긴 커녕 어디로 튈지 모르는 천방지축이고, 뭔가 제 맘에 안 들면 떼를 쓰고 어리광을 부리는 천덕꾸러기.

    ‘두창······.’

    그런 천덕꾸러기 아이가 어른도 감내하기 힘든 두창에 걸렸다니.

    물론 두신(痘神)은 설령 왕이라도 피해 갈 수 없는 질병이었다.

    고뿔처럼 금방 털고 일어 날 수 있다면 이리 아찔하지도 않겠지만 치사율이 5할이 넘는다.

    특히 어린 아이 같은 경우는 걸렸다하면 열에 일곱은 거적에 실려나오는 게 두창이란 병이었다.

    그런 두신이 창녕에 찾아왔다는 것도 원통하지만, 더 원통한 건 아비로서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점이었다.

    의원이 손을 쓴다 해도 그 한계는 명확했다.

    나머지는 하늘에 맡길 뿐이다.

    ‘어째서요? 어째서 이번엔 창녕마저 데려가려 하시오?’

    하늘이 있다면 정녕 묻고 싶었다.

    원자를 포함한 여섯 자녀를 데려가놓고도 아직 원이 안 풀리시냐고, 도대체 내가 어찌해야 되겠냐고.

    “김 도령(都令, 도승지의 별칭)은 어디에 있느냐?”

    가녀린 손으로 제 얼굴을 감싼 채 괴로워하던 융이 예의 소식을 가져온 내관에게 물었다.

    “대군마마를 보필하고 있는 줄로 아옵니다.”

    “당장 들라하라.”

    “하오나 그 집에 두창이 발생하였사온데 함부로 궐에 들였다가는······.”

    아.

    창녕에 대한 걱정 때문에 그걸 잊고 있었다.

    김 도령이 두신을 달고 온다면 궐에도 두창이 퍼져나갈 터였다.

    한 번 두창을 앓은 사람들이야 큰 상관이 없겠지만, 일평생 두창 한 번 안 앓아본 남녀궁인들도 제법 많다. 특히 신씨도 살면서 두창을 앓아본 일이 없었다.

    자칫 김 도령이 두신을 끌고 들어온다면 신씨에게 전이 될 수도 있다.

    “후··· 김 도령에게 두창이 전이된 전말을 알아보게 하라. 또, 정원(政院, 승정원)에 명해 각 재상들에겐 패초를 보내도록 하라.”

    승전내관이 빠져나갔다.

    속사포처럼 명을 쏟아내긴 했지만 아찔한 마음은 여전했다.

    머릿속에서 창녕의 해맑게 웃는 얼굴이 떠나질 않는 것 같았다.

    “편전으로 뫼시오리까?”

    상선이었다.

    “상선.”

    “예, 전하.”

    “내 도대체 무슨 죄를 그리 저지른 것 같은가?”

    “···”

    “내 제왕의 공부를 소홀히 해서 하늘이 노하신 겐가, 간관들의 말처럼 정사를 팽개치고 사냥과 놀이에 전념해서 하늘이 경고를 내리신 겐가? 내 도대체 무슨 죄를 그리 크게 저질렀기에 이번엔 창녕까지 데려가려 하신단 말이냐?”

    “전하······.”

    “올초에는 우박이 내렸다. 간관들이 이는 하늘이 경고 하는 것이라 해서 반찬 가지수를 줄이고, 사냥도 자제했다. 한데 대체 왜··· 대체 과인이 무슨 큰 잘못을 저질렀기에 이런 벌을 준단 말이냐!”

    “···”

    융은 한참동안 창녕의 웃는 모습을 떠올렸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김 도령의 집으로 달려가 창녕의 뺨에 얼굴을 부비고 괜찮다, 이깟 병쯤은 이겨낼 수 있다 타이르고 싶지만 이 빌어먹을 곤룡포의 무게는 부자의 정마저 가로막는다.

    일단은 편전으로 가야했다.

    한 아이의 아비이기 전에 왕이니까.

    왕이란 자리는 한 아이의 아비인 자리가 아니라 만백성의 아비인 자리니까.

    그렇게 빌어먹게도 무거운 자리니까.

    “편전으로 가자.”

    융이 무거운 발걸음을 떼던 그때였다.

    “전하. 진성대군께서 드셨사옵니다.”

    “진성이?”

    “그러하옵니다.”

    융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상선.”

    “예, 전하.”

    “지금 내 몰골이 어떠한가?”

    “···큰 일을 당하셔서 그런지 수심이 가득하시옵니다.”

    “그렇겠지.”

    “송구하옵니다.”

    “밖의 내관은 들어라.”

    “하문하소서.”

    “지금은 나랏일이 긴급하여 편전에 거둥해야 하니 다음에 찾으라 전하라.”

    진성 아우에겐 늘 웃는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다.

    슬픈 일은 화두로 삼고 싶지 않았고, 함께 웃으며 떠들 수 있는 일만 화두로 삼고 싶었다.

    축 쳐져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진성을 내친다는 건 마음이 불편한 일이었지만, 명색이 형으로서 쳐진 모습을 보여 줄 순 없었다.

    “그리 전하겠사옵니다.”

    문차비(門差備)가 진성 아우에게 말을 전하는 참인지, 밖은 조용했다.

    융은 씁쓸히 웃었다.

    “가지.”

    이만하면 진성 아우도 발길을 돌렸겠지 싶어 걸음을 떼던 그 순간.

    “대, 대군마마! 대군마마!”

    드르륵.

    문 밖이 잠시 소란스러워지는가 싶더니, 미닫이 문이 열렸다.

    아연실색한 표정의 문차비와 함께 진성 아우가 서있었다.

    “대, 대군마마. 이러시면 아니 되시옵니다.”

    문차비가 쩔쩔 매며 진성을 잡아끌었다.

    하지만.

    “이거 놓으세요.”

    “하오나······.”

    “괜찮다. 문차비는 나가 있으라.”

    “···예.”

    문차비가 종종걸음으로 물러났다.

    융은 애써 미소지었다.

    “진성아, 어인 일로 찾았는지 모르겠다만 지금은 내 나랏일이 급해 편전엘 좀······.”

    “괜찮으십니까?”

    괜찮으냐.

    따지고 보면 아무 말도 아니었지만 이대로 있으면 왠지 왈칵 울음이 터져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군주는 울어서는 안 된다.

    여염집 사내대장부도 함부로 눈물을 보이면 아니 되는 법인데, 하물며 자신은 일국의 왕이었다. 내관과 궁녀들이 다 보는 앞에서 옥루를 흘릴 순 없었다.

    입술을 씹었다.

    비릿한 피냄새가 전해진다.

    “뭐가 말이냐.”

    눈물를 참는다고 참았지만, 눈물을 삼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자, 진성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차 한 잔 음미할 정도로 짧은 시간이 흘렀다.

    “창녕의 얘기를 오다가 들었습니다.”

    융의 눈시울이 기어코 붉어졌다.

    “알고 있었구나.”

    문득 진성이 한 말이 떠오른다.

    -네. 가족이 뭐겠습니까. 힘들 때 같이 울어주고, 슬플 때 위로해주고, 기쁠 땐 같이 기뻐하고, 그런 게 가족이죠.

    “창녕은 괜찮을 겁니다.”

    말 한 마디가 때론 도화선이 될 수도 있는 법이었다.

    “크흐흑. 진성아.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내 도대체 무슨 큰 죄를 저질렀기에 이런 벌을 받는단 말이냐? 내 여섯 자식을 모두 창졸간에 떠나 보냈다. 하늘이 이젠 창녕마저 데려가려 하지 않느냐? 내 어찌하면 좋겠느냐, 어찌하면?”

    등 뒤로 보드랍고 따뜻한 촉감이 전해졌다.

    진성의 손이었다.

    그 토닥거림에 융은 지난 세월 동안 한 인간이 아니라 일국의 왕으로서 감내해야만 했던 울분을, 눈물을, 설움을, 슬픔을 토해냈다.

    서럽게.

    아주 서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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