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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25화 (25/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25화>

    이 땅 마음에 드는데, 어쩔 수 없지

    ***

    엊그제가 하지였는데 벌써 소서(小暑)였다.

    그래도 며칠 전까지는 그럭저럭 부채질로 참을 수 있었는데 본격적인 여름에 접어들자 부채질 가지고는 택도 없었다.

    새삼 선풍기가 얼마나 위대한 발명품인지 깨닫게 된 것도 잠시.

    “···엄청 많네.”

    사랑방.

    나는 누가 볼 새라 바닥에 흩어진 문서들을 황급히 정리했다.

    하루에 한 번 씩 확인하고 있지만 볼 때 마다 절로 마음에서 우러나는 감탄이 새어나온다.

    이건 마치 수요일 퇴근길 혹은 하교길에 복권방에 들러서 아무 생각 없이 자동으로 5천원어치를 구매하고, 지갑에 넣어둔 걸 깜빡하고 있다가 한 몇 주뒤에 확인을 했더니 당첨된 기분이다.

    아, 무슨 문서인데 로또에 비교를 하냐고?

    어의동(於義洞) 38칸 와가(瓦家, 기와집)

    답(畓, 논) 63결

    전(田, 밭) 117결

    저전(楮田, 닥나무 밭) 7결

    과원(菓園, 과수원) 7결

    채포(菜圃, 채소밭) 8총(總) 20부(負)

    산(山) 9결

    노비 861구(口), 80읍(邑)에 산재

    내 재산 목록이었다.

    얼핏 봐도 입이 쩍- 벌어질 만큼 어마무시한 재산 목록이다.

    저번에 진펄리 땅이 엄청 넓길래 덕산이한테 이건 도대체 몇 평이냐고 물었던 적이 있었다.

    저기부터 저어어어어기! 까지라고 답했던 덕산이는 그게 전부 2결이라고 말했었다.

    결이 평수로 환산할 경우 정확히 몇 평이 될 진 모르지만, 그 큰 진펄리 땅이 겨우 2결에 불과한데 내 재산 목록에 나오는 결이란 글자만 무려 203개다.

    진펄리 같은 땅이 최소 100개는 있단 소리.

    이마저도 현물 화폐는 제외한 수치였다.

    곳간에 있는 오곡들과 면포, 이 시대에선 자동차처럼 자산의 하나로 취급되는 소와 말, 마찬가지로 우마처럼 아니, 어쩌면 우마보다 더 값비싸싼 재산으로 평가되기도 하는 수백권의 책, 그리고 장신구와 그림들.

    이걸 다 합하면 진짜 재벌이란 결론이 도출된다.

    아닌 게 아니라 재산 목록을 정리하면서 확인한 소가 예순마리였다. 말은 여덟 마리.

    어떻게 보면 차를 세단, SUV, 해치백, 스포츠카, 슈퍼카, 트럭··· 종류별로 갖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그리고 책.

    집에 책방이 아예 따로 있을 정도다. TV보면 서재라는 게 나오는데, 그런 서재와는 차원이 다르다. 준도서관 급에 가까운 책방에 수백권의 책들이 비치돼 있다.

    아니, 솔직히 수천권이 넘을지도 모른다.

    이 시대 책들은 1질이 수십권씩 되는 경우가 허다하니까.

    평생 놀고 먹어도 되는 재산.

    입이 헤벌쭉 벌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래도 재테크는 꼭 해야지.”

    재테크!

    돈이 돈을 낳는다는 말이 있다.

    이현호로 살 때는 끽해야 사설 토토에서 1~2만원씩 재미 보는 게 재테크의 전부라고 해도 무리는 아니었지만, 여기선 억소리 나는 돈을 굴릴 수 있는 셈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미 생각해둔 것도 있었다.

    땅이다.

    솔직히 아직도 조선에 완전히 적응하지 못 한 내가 거창한 재테크를 할 순 없었다.

    하지만 땅은 다르다.

    오히려 16세기의 사람들 보다 부동산 가치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는 훨씬 탁월한 감각을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

    뭐, 수백년 뒤의 이야기긴 해도 여기엔 뭐가 들어서고, 저기엔 뭐가 들어서고 다 알잖나.

    입지를 대충 분석 할 수 있단 소리다.

    게다가 땅은 어디 도망 안 간다.

    “어디 땅을 살까. 흐흐.”

    “대감마님.”

    행복한 상상의 나래를 펴던 중 들려온 덕산이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나는 누가 훔쳐갈 것도 아닌 문서들을 서랍에 집어 넣었다.

    그리고 방문을 열고 태연하게 말했다.

    “어어, 왜?”

    “출타 준비 끝났습니다요.”

    “벌써? 그럼 나 옷 좀 갈아입고 오마.”

    “네.”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사실 목적지는 없다.

    드라이브란 게 때로는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무작정 차에 오르고 길따라, 물따라 가는 경우도 있잖는가.

    그런 의미에서 내가 조선에 온 지(?) 벌써 4개월이 됐지만 가본 곳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땅을 사려면 대충 지리 정돈 알아야 하는데 그걸 전혀 모른다.

    하다못해 지도라도 있다면 이런 수고를 덜겠지만, 지도는 군사기밀 중 하나라나 뭐라나.

    지도 없냐고 물었을 때 덕산이가 깜짝 놀라며 내 입을 틀어막았던 기억이 선명하다.

    이런 곡절로, 오늘은 산책겸 도성을 한바퀴 둘러볼 참이다.

    겸사겸사 좋은 땅도 보이면 투자도 하려고.

    덕산이의 등을 밞고 말에 올랐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 등을 밞고 말에 오르는 게 영 께름칙했는데, 뭘 밞지 올라가지 않으면 미끄러질 우려도 있고 더군다나 남들 시선 때문에라도 밞아야 한다.

    종이 멀쩡히 있는데 종놈 등 안 밞고 가면 남들이 손가락질 한단다.

    “어디로 뫼실깝쇼?”

    말고삐를 손에 쥔 덕산이 날 돌아보며 물었다.

    음, 어디로 갈까.

    “어디가 좋을 것 같냐?”

    “그걸 쇤네한테 여쭤보시면······.”

    “그냥 눈에 익은대로 갈까? 동대문?”

    “그럼 동대문으로 뫼시겠습니다요.”

    우리집에서 동대문까진 엎드리면 코닿을 거리다.

    도보로 15분이나 걸릴까?

    거리의 가가호호.

    그리고 저마다 각자읭 영역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군상들을 보는 재미를 느끼고 있자니, 금세 동대문이었다.

    딱 동대문 앞에서서 감상을 곱씹었다.

    수문군들이 야리꾸리한 시선으로 쳐다봤지만 뭐 어때.

    ‘캬.’

    딱 500년 뒤엔 여기가 얼마나 변화하는데 지금은 그냥 시골 면 만도 못 하다.

    격세지감이 따로 없다.

    잠시 동안 감상을 곱씹고 동대문을 나섰다. 동대문을 나서면 드문드문 가옥들이 서있고 들판과 논밭도 보였다.

    전형적인 시골 풍경이다.

    오솔길을 따라 계속 움직였다. 확실히 농번기는 농번기인지, 눈에 보이는 건 대부분 농부들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더 갔을까.

    ‘여기 꽤 괜찮은데?’

    동대문에서 빠져나오고 한 10~15분쯤 왔을 테니 현대의 서울로치면 동묘공원 부근이 아닐까 싶다.

    근데 입지가 딱이다.

    농알못이긴 하지만 토지는 비옥해보이고 더군다나 우리집에서도 가까운 거리다.

    부동산 투자는 자고로 수익률이 중요한데, 이만큼 비옥한 토지라면 연간 최소 10%의 수익은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땅도 삐뚤빼둘하지 않고 딱 정방형이다.

    ‘게다가 지금은 밭이지만 청계천 물 끌어다 논으로 만들 수도 있겠고.’

    생각을 정리한 나는 밭에서 한참 구슬땀 흘려가며 경작 중인 농부들에게 다가갔다.

    허리 굽혀가며 열심히 밭일하던 농부들이 도포에 갓 쓴 내 모습에 90도로 인사를 올린다.

    “말씀좀 물읍시다.”

    “하문하십시오, 선비님.”

    “선비? 선비 아닌데.”

    코를 긁적거렸다.

    무슨 심술을 부리는 건 아니고, 진짜 선비가 아니라서 하는 말이었다.

    선비는 딱 장곤 선생님 같은 분이 선비지.

    “소, 송구합니다요.”

    농부들의 태도만 봐도 여기가 신분 사회임을 알 수 있었다.

    아마, 농부들은 내가 트집 잡는 걸로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대군마마시니 예를 갖추시오.”

    그런 오해를 불식시키는 건 역시 덕산이 밖에 없다.

    ···가 아닌가?

    “아, 아이쿠! 몰라뵀습니다요, 송구합니다요!”

    농부들이 넙쭉 엎드렸다.

    무릎이 까지건 말건, 바지가 흙투성이가 되건 말건.

    “왜들 이럽니까. 일어들 나십쇼.”

    농부들이 저희들끼리 눈치를 살피면서 쭈뼛거리며 일어난다.

    “여기 밭 크기가 어떻게 됩니까?”

    “마, 말씀 편히 하십시오.”

    그럼 하오체지.

    “흠흠. 이 밭 크기가 어떻게 되오?”

    “모두 4결 정도 됩지요.”

    “땅주인은 당신이고?”

    예의 농부가 손사래를 쳤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요. 저희도 소작 부쳐먹는 소작농입니다요.”

    음.

    하긴 이 큰 땅을 이 꾀죄죄한(?) 농부가 갖고 있다고 보긴 어렵지.

    “땅주인은 누군지 알 수 있겠소?”

    “그, 그건 어찌······.”

    “어허! 대군마마시라니까.”

    “덕산아. 대군이 무슨 벼슬이냐? 고만좀 해, 임마.”

    “···예.”

    “그래서, 땅주인이 누구라고?”

    “저, 저기 기와집 하나 보이십니까요?”

    농부가 동북쪽을 가리킨다.

    멀리 작은 마을이 하나 있었다. 초가집이 듬성듬성 있는 모양새였는데, 그 와중에 기와집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다.

    뭔가 언밸런스한 조합이다.

    “보이오.”

    “저 집 주인댁이 이 땅 주인입지요.”

    “그럼 당신들은 전부 소작들이고?”

    “저기 저치들은 주인댁 노비들인데 잠깐 일손 거들러 온 거고, 저 두 사람 빼곤 모두 소작들입지요.”

    “음.”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노비랑 소작까지 부리고 있는 걸 보니 이 근방에선 유지쯤 되는 모양이다.

    어쩌면 벼슬아치일지도 모르고.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말이오.”

    “뭐, 뭐든 편히 하문하십쇼.”

    “이 땅들은 전부 얼마나 하는지 알고 있소?”

    “이, 이 땅··· 저, 전부 말입니까요?”

    고개를 끄덕거리자 농부들이 저희들끼리 얘기를 주고 받는다.

    면포가 몇 필이니 쌀과 보리로 몇 섬이니 이런 얘기들을 하는지라 정확히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다.

    그렇게 한참 후.

    결론을 내렸는지 예의 농부가 말했다.

    “어림잡아 면포로 300필 정도 합지요?”

    300필?

    우리 집에 있는 면포가 얼마나 되더라.

    “덕산아 우리 집에 면포 얼마나 있냐?”

    “쇤네도 잘··· 그래도 300필이 없겠습니까요?”

    “음. 저기.”

    “예.”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여기 땅 주인한테 이 땅 안 팔겠냐고 좀 말해줄 수 있소?”

    “그, 그게··· 송구한 말씀이오나 어렵지 않을까 싶습니다요.”

    “엥? 이유는?”

    “대대로 물려 받은 땅인데 별 이유도 없이 팔려고 하겠습니까요.”

    아, 생각해보니 그렇겠다.

    나같아도 안 팔지.

    먹고 살 만한데 애꿎은 땅을 팔 이유가 없다.

    하지만 혹시 모르니까.

    “그래도 물어나 봐주시오. 내가 이 땅 사면 후한 조건으로 소작 줄 테니까.”

    “아, 알겠습니다요.”

    “그럼 수고들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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