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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24화 (24/365)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24화>

빨래를 해야겠어요

***

때가 한가득 낀 빨래감들은 조정의 위군자들을 말하는 것 같았고, 툭탁툭탁 방망이질은 왕권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

거친 손에 이끌려 물속에 첨벙거리면서 살려달라 아우성치는 모습은 표현 그대로 거사가 벌어진 직후 자신의 눈치만 살필 위군자들을 나타내는 것일 테며, 또한 검방검벙한 잿물에 다시 목삼을 움켜잡고 흐르는 냇물에 집어넣는다는 부분은 깨끗한 신하의 모습으로 재탄생하는 위군자들을 일컫는 것일 터였다.

물론 진성이 의도한 건 그게 아닐 것이었다..

바뀐 진성은 여린 면이 있었고 천방지축인 면이 있었으니 그걸 의도했다고 보긴 어려웠다.

하지만 시란 화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시 액면을 놓고 청자가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도 중요했다.

융에겐 그가 조만간 벌일 거사로 해석이 됐다.

‘진성의 시처럼만 되면 조정도 깨끗해지겠지.’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구절이 이것이다.

너희도 이제 조금은 깨끗해지겠지.

깨끗해져야지.

군주에게만 바른 길을 가라 말하는 신하들이었다.

하다못해 방금 있었던 경연에서도 그렇다.

이틀 전, 경회루에서 녹수와 노닐면서 시를 읊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은?

제놈들도 지방으로 부임하면 기생을 애인으로 삼고, 천한 관노로 오입질하고, 부임지의 명승지라 불리는 곳에 가서 풍악을 울리지 않던가?

편애는 군왕의 도리가 아니라 말했지만 제놈들은 밤마다 기방에 가서 사모하는 기생에게 어떻게든 잘 보이려 아첨하고 수십년 배운 시를 한낱 기생에 낭비하고 있지 않던가.

서과?

제 스승놈들의 생일에는 백성들이 굶주리건 말건 공고상(公故床, 음식나를 때 쓰는 상) 몇 상을 종놈들 머리에 이고 가게 해서 바치지 않던가.

진성이 일전에 말한대로 그들은 위군자에 지나지 않았다.

말로는 성현을 울부짖지만 그들의 생활을 면밀히 살펴본다면, 그리고 조금만 들춘다면 추악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도 정직을 운운한다.

그런데도 직언하고 읍소하는 자들은 숭배한다.

직언하는 자들이 과연 소신과 신념 때문에 직언을 했을까?

‘후세에 이름을 남기기 위해서였겠지.’

융은 그들의 직언을 냉소했다.

경연관은 칠정을 절제 할 줄 아는 인물은 이미 대현의 경지에 오른 이들이니 곧 노자, 목자, 공자 같은 사람들만 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그런데 일개 선비들이 소신과 신념을 지킬 수 있다?

불가한 일이다.

그들이 하는 말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소신과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군왕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이 신하된 자의 의무기 때문에 직언을 올렸다지만 과연 칼이 목에 들이밀어져도 직언을 할 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아마, 백에 구십구는 제 목을 보전코자 할 터였다.

그러니 진성의 말대로 그들이 위군자였다.

천한 노비들 보다 천박했고, 칼질하는 거골장(去骨匠, 백정)들보다 하찮았다. 머리에 든 건, 가무하는 기생들과 견준다면 꼬리를 말 자들이 태반이었다.

흉년이 들고 재해가 잇따른다면 하늘이 왕에게 내리는 경고라지만, 그래서 구휼미를 베풀어 인정을 도모하라지만 막상 제놈들 곳간은 쌀이 넘쳐나서 썩어 문드러져 간다.

이런 위군자들을 데리고 정치를 할 바에는······.

융은 고개를 돌렸다.

시감(詩感)을 듣기 위함인지 한껏 고무된 표정의 진성이 보였다.

그래.

백관의 표본은 차라리 진성이다.

무릇 시를 잘 짓고 잘 아는 사람이 사(士)의 으뜸인 법이다.

그런 사람은 응당 정치도 잘 하기 마련.

진성 아우 같은 신하 열 사람만 있다면 정사를 돌보는 일도 그리 어렵지 않을 터였다.

‘내 기필코······.’

생각해보니 진성 아우가 궐을 찾은 것도 며칠이 지났다.

저번에 올라온 탄핵 때문이었을 것이다.

속으로 속앓이를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왕의 입장에서 비난을 받는 건 어쩌면 감수해야 하는 일이지만, 진성은 그게 아니니까.

“전하?”

시를 너무 곱씹었던 모양이다.

진성 아우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다.

“시의 감흥을 곱씹느라 감상이 늦었다. 좋다. 너무 좋다. 상선.”

“예, 전하.”

“이 빨래라는 시를 경각사의 모든 관리들이 볼 수 있게끔 필사하여 보내도록 하라.”

각사에 어제시(御製詩, 임금이 지은 시)를 내린 적은 무수히 많았다. 이따금 좋은 시를 각사의 관리들이 읽어 보게끔 한 일도 셀 수 없이 많았다.

이번 일도 마찬가지라 생각했는지 상선은 읍하며 물러갔다.

“제 시를 모든 관리들에게 보여주시려고 하십니까?”

“그래. 이런 좋은 시는 나 혼자 감상 할 수 없다.”

“쑥쓰러운데··· 하하. 아, 그건 그렇고 전하······.”

융은 재잘재잘 떠드는 진성을 빤히 바라보았다.

누가 그의 앞에서 이렇게 재잘재잘 떠들 수 있을까?

누가 그를 이리 어렵지 않게 대할 수 있을까?

녹수도 그의 눈치를 살핀다는 걸 융은 모르지 않았다.

이렇게 마음 놓고 웃고 떠들어 본 것이 언제인지 모르겠다.

이렇게 주제 없는 대화에 웃고 떠들어 본 적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융은 진성과 웃고 떠들었다.

한참을 웃고 떠들었다.

이 마음의 평온이 금방이라도 달아날까.

한참을 웃고 떠들었다.

'거사를 앞당기는 것이 좋겠도다.'

이 푸근한 마음을 상시 느끼고 싶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힘을 가져야 한다.

진성이, 그리고 내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기 위해서는 더더욱.

***

임의 저택.

여지없이 상석을 꿰차고 앉은 융의 눈은 가라앉아 있었다.

“진성의 시를 보았는가?”

“경각사에 내려 보시게 한 그 시 말이옵니까?”

“그래.”

“보았사옵니다.”

융은 잠시 뜸을 들였다.

임은 묵묵히 융이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거사를 앞당겨야겠다.”

흠칫.

“하오나 이미 정해진 기일이 있사온데 거사를 앞당긴다면 일이 틀어질 우려가······.”

“내 엊그제 녹수와 경회루에 노닐면서 시를 읊은 일이 있었다. 오늘 주강에서 경연관으로 배석한 윤순(尹珣)과 정수강(鄭壽崗)이가 그걸 책잡더구나.”

“윤순과 정수강이 말이옵니까?”

융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또 군왕은 편애를 삼가야 한다면서 진성을 우대하지 말길 청했었다. 이것이 가당한 일이더냐? 제놈들은 가문에서 문집을 발행할 때,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면서 찬조를 하면서 임금이 종친을 우대하는 건 참지 못 하는 모양새지 않더냐. 우스웠다. 너무 우스워서 이대로 두면 내 화병이 나서 먼저 몸져 누울 것 같았다.”

임이 입을 우물거렸다.

거사를 앞당기자는 말에 예정대로 하자는 말을 아뢰려고 했는데 지금 보니 그 말을 아뢴다 한들 임금께선 들어주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아.”

“하문하소서.”

“안침(安琛)이는 명단에 올렸느냐?”

“안침은 진즉에 올렸나이다.”

“윤순, 정수강, 안침. 이것들은 명단에 없다면 필히 올려야 한다. 특히 윤순 그자는 가만 놔뒀다가는 일을 그르칠 자이니 꼭 올려야 해. 내 처용무(處容舞)추면서 칼 휘두르는 날, 꼭 그놈을 육시낼 것이다.”

“···”

“그건 그렇고, 거사는 이번에 있을 양로연(養老宴)때가 어떤가?”

임은 임금의 말을 곱씹어봤다.

‘양로연 때라······.’

감정적인 마음 때문에 거사를 앞당기자고 하신 것 같아 불안한 마음이 있던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양로연때라니.

불안해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임금은 여전히 총명한 바가 있었다.

양로연.

노신과 백관들이 참석하는 자리다.

이때는 임금이 어사주를 하사하고, 또 먹고 마시는 잔칫날이다.

이런 날엔 당연히 흐트러지는 신하들이 나오기 마련.

그걸 명분 삼을 수도 있을 터였다.

확실히 나쁜 계책은 아니다.

“나쁘지 않은 듯 하옵니다.”

“하면 그리 진행 할 터이니 준비하라.”

“예,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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