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군으로 살어리랏다 23화>
누가 왔다고?!
***
“예컨대 이틀 전, 전하께서는 장 숙용과 함께 경회루에 납시었는데 이때에 전하께서는 남녀궁인들을 모두 물린 연후에······.”
넌 짖어라.
“하옵고 신이 오늘 편폐는 군왕의 도리가 아니라 말씀 아뢨습니다마는, 듣자니 오늘 아침 조회에서 진성대군에게 노비를 하사하셔야겠다 말씀하신 줄 아옵고 또한 저번에는 그 비싼 서과(西瓜)를 친히 하사하셨으니 이는 군왕의 도리가 아닌 것이옵니다. 제 아무리 종친이라 한들 지금의 진성은 신하의 본분이니······.”
계속 짖어라.
“또한 일전에 대신들이 앞다투어 사냥을 줄이라 말씀 아뢰었는데 조금 지켜지는 듯 하나 미복을 나가는 일이 많다 하옵고, 거기에 악공을 불러 풍악을 울린다 하니 과연 사체(事體)를 살펴본다면 사냥과 풍악, 어느 것이 더 나쁘고 더 좋다 우위를 가릴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놀이와 사냥 모두를 줄이시옵고······.”
···제발 그만 좀 짖어라.
“···이리하면 전하께오서도 필시 성군이라 불리실 수가 있을 것이옵니다.”
후······.
일다경에 가까운 잔소리가 드디어 끝이 났다.
“다 끝났소?”
“시간이 남는 듯 하니 《대학연의》를 강하겠사옵니다. 마침 적절한 것이 떠올랐사옵니다.”
“다 끝나지 않았소. 한데 무슨 대학연의요.”
“하지만 시간이 남지 않사옵니까?”
한 번 더 반항을 해볼까 싶었지만 관뒀다.
경연관들은 제놈들이 하는 잔소리가 한 번 씩 늘어날 때 마다 무용담 하나가 늘어나는 줄 안다.
임금에게 하는 잔소리가 무용담이 될 수 있다니··· 듣도 보도 못 했지만 그게 정직이고 직언이라 말하는 자들이니 도리가 있겠나.
융이 시무룩해진 표정으로 “알겠소.”답하는 그때였다.
“전하.”
상선이었다.
“상선께선 강연 중임을 모르시오?”
예의 경연관이 소리치자, 상선이 가볍게 목례를 한다.
“송구합니다. 전하께 아뢸 말씀이 있는지라······.”
“커흠.”
“그래, 그래. 상선은 어쩐 일인가?”
“진성대군께서 입궐하셨사옵니다.”
벌떡!
“진성이가?!”
“예.”
융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나갔다.
“어찌, 어찌 왔다고 하는가?”
“물건을 하나 만들었사온데 그걸 전하께 헌상하고자 한다 하옵니다.”
“물건을?”
“예.”
“기특한 일이로다. 지금 어디에 있는가?”
“대비마마께 문안을 여쭙고 계실 듯 하옵니다.”
“그래?”
융은 슬그머니 경연관들의 눈치를 살폈다.
탐탁지 않아하는 표정들이었다.
하지만.
“크흠. 경들도 들었겠지만 진성대군이 찾아왔다 하니 아무래도 경연은 이만 물림이 좋겠소이다.”
“하오나 강연은 아직 끝나지 않았사옵니다.”
“진성대군이 왔다 하지 않소?”
“대군이 임금의 경연보다 위에 있는 것은 아니옵니다.”
“꼬장좀 그만 부리시오.”
“꼬, 꼬장이라니요. 어찌 그런 격없는 말씀을······.”
“하면 경은 독서하다가 이웃한 동생이 찾아오면 정없이 동생을 만나보지도 않고 책을 마저 읽으시오?”
“군왕과 선비가 어찌 같다 할 수 있겠사옵니까? 부디 통촉하······.”
“됐소이다, 됐어!”
버럭 소리 지른 융은 휘적휘적 경연장을 빠져 나갔다.
그런 융의 뒷모습을 어찌할 바를 모르며 바라보던 경연관들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
강녕전에서 조금 기다리고 있자 연산군 형님이 헐레벌떡 들어오신다.
헐떡거리는 숨을 보건대 숨을 채 고르지도 않고 들어오신 듯 하다.
“오래 기다렸느냐?”
“아뇨. 저도 금방 왔습니다.”
“연통이라도 하지 않고.”
“아, 연락을 드리고 오려고 했는데, 뭐랄까요. 서프라이즈랄까요?”
“서, 서프···?”
아차차!
나도 모르게 또 실수했다.
이상하게 장곤 선생님과 숭재 씨, 그리고 연산군 형님 앞이면 마음이 풀어진다. 덩달아 조심성도 없어지는 것 같고.
“깜짝 놀래켜드리고 싶어서 연락없이 왔단 말이예요. 하하.”
“의도가 그거였다면 적중했다. 내 얼마나 놀랬는지 모른다. 경연을 하고 있다가 상선이 들어와서는 진성이 네가 찾아왔다고 하질 않느냐. 경연관들이 어찌나 난리를 치던지··· 아, 그리고 저번에 그 탄핵은 신경 쓰지 말거라. 원래 언관이란 종자들이 속이 좁다. 아, 대비전을 다녀 왔다지? 어마마마께 문안은 여쭈었느냐?”
속사포도 아니고······.
하나씩 물어도 답해줄 수 있을 텐데 한 번에 여러 개를 답하니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 동안 적잖이 외로웠던 모양이다.
“어마마마께는 문안 잘 여쭸습니다.”
어머니는 처음 보는 거였다.
들킬까봐 일부러 입도 뻥긋 안 했다. 그냥 묻는 말에만 답하고 나왔다.
다행히 들키진 않은 것 같았다.
“아, 그리고 이거.”
나는 준비한 비누를 꺼냈다.
전금이 생일 선물로 만들 때 여분으로 몇 개를 좀 더 만들어뒀었다.
나도 쓰고, 형님도 드리고, 장곤 선생님과 숭재 씨도 나눠드릴 겸 말이다.
이건 연산군 형님 거다.
특별히 내가 만든 비누 중에서도 가장 잘 만들어진 녀석들로 골랐고 한가운데에는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음각도 새겨 넣었다.
장곤 선생님한테 들은 불립문자라는 말이 퍽 좋아보였거든.
“이게 무어냐?”
“선물입니다. 형님 전하께 드리는 선물.”
“선물? 하하하. 어찌 이런 걸 다 가져 오느냐? 한데 생전 처음 보는 물건이로다.”
킁킁.
비누를 요리조리 돌려보시던 연산군 형님이 체신머리 없이 코를 박고 킁킁 거리신다.
“먹는 것 같진 않고··· 어디에 쓰는 물건인고?”
“비누라고 합니다. 손 좀. 아니, 옥수(玉手, 임금의 손)좀요.”
형님의 손을 잡고 비누를 쥐어드렸다.
그리고 미리 준비해둔 세숫대야에 비누를 흠뻑 적셔드렸다.
내가하는 양을 약간은 당혹스럽게, 그리고 조금은 황당하게 지켜보시던 연산군 형님.
“자, 문대보세요.”
“무, 문대?”
“네. 박박 문질러보세요.”
떨떠름한 표정으로 비누를 문질러보던 연산군 형님.
“거, 거품이 이는구나?”
“네. 이게 살뜰물처럼 세정 작용을 하는 거거든요?”
“살뜰물처럼 말이냐?”
“네. 근데 아침마다, 그리고 저녁마다 쌀뜰물을 받아다 쓸 순 없잖습니까? 그때 이 비누 거품으로 세수하면 쌀뜰물처럼 쉽게 세수 할 수 있는 거예요. 아, 머리도 감을 수 있어요.”
“머리도?”
“네. 근데 형님 전하는 머리가 좀 기시니까, 이걸론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제가 나중에 좀 더 큰 걸로 만들어드리겠습니다.”
“하하. 그래. 아무튼 요긴하게 쓰마. 고맙다.”
우린 그간 못 다 나눈 대화를 나눴다.
뭐, 별 대화는 아니었다.
그간 잘 지냈느냐.
뭐하고 지냈느냐.
공부는 할 만 하냐 등등.
어떻게 보면 시답잖은 대화들이었다.
하지만 사람대 사람 관계에 있어선 어떤 주제가 있는 대화보단 시답잖은 대화가 더 필요하기도 한 법이었다.
연산군 형님은 그간 정말 외로웠던 모양인지 쉬지도 않고 말을 토해냈다.
역시, 별 건 아니었다.
아침 조반에 올라온 수라상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둥, 경연은 따분하고 지루하다는 둥, 요새 말벗이 없어 퍽 적적했다는 둥.
그리고,
“요새 쓰는 시는 없느냐? 네 시가 참 마음에 들었는데 말이다.”
시!
당연히 준비해왔다.
“제목은 빨래라고 합니다.”
“빨래?”
“청계천 빨래터에서 시상이 떠올랐거든요.”
“그래, 어디 보자.”
***
···잿물에 털어내고
다시 목살을 움켜잡고
흐르는 냇물에 집어넣는다
너희는 조금의 비명도 없이
그래서 어떤 외침도 없이
깊고 긴 수렁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너희도 이제 조금은 깨끗해지겠지
깨끗해져야지
진성의 시는 굉장히 함축적이었다.
의도한 것인지는 몰라도 융이 받아들이는 시는 그랬다.
천박했지만 기품이 있었고, 투박하지만 섬세했으며, 직설적이지만 모호했다.
‘지금의 조정을 보는 것 같구나.’
조금은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융이 받아들이는 이 빨래라는 시는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