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군으로 살어리랏다 22화>
임금은 칠정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하옵니다
***
집으로 돌아온 나는 점심을 먹고 전금이 생일 선물을 만들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내 혜안 덕분인지 전금이 생일 선물에 없어서는 안 될 재료인 동물성 기름은 부엌에 남은 게 좀 있었다.
이제 남은 건 이걸로 비누를 만드는 일이다.
생일 선물로 비누라니··· 참 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잿물에 손담구고 빨래하는 것 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 비누를 택했다.
솔직히 전금이 한테 값비싼 노리개나 장신구를 선물해줘도 남한테 욕 먹을 수도 있고, 또 괜한 말들이 나올 수도 있다.
내가 뭐 전금이한테 찝쩍댔다는 그런 말들.
아, 비누 만드는 건 전생에 배웠다.
비누 하나에 편의점에선 2,000원씩 했다. 그것도 저렴한 비누에 한해서지, 비싼 비누들은 한 개에 3천원 이상 씩 받기도 했다.
마트에 가서 구매한다고 해도 1,200원에서 1,500원 수준.
이게, 하나 둘 사다보면 절대 저렴한 건 아니었다.
나같은 헐벗은 자취생들한텐 말이다.
방법을 고민하다가 결국 직접 만들기로 마음 먹었다.
동물성 기름으로 만든 비누가 피부에도 좋다는 종편 방송도 한몫을 했었다.
만드는 것도 딱히 어렵지도 않았다.
비누라고 하면 막연하게 산업화의 발달이 가져온 문명의 발전이라고 하지만, 원시적인 비누는 많이 있었거니와 세정 효과가 있는 비누 자체를 만드는 건, 초, 중학생들도 재료만 충분하다면 가능한 일이었다.
마당에 재료들을 늘어놨다.
늘어놓고 보니 제법 공돌이 태가 난다.
내가 제일 부러웠던 게 뭐든 뚝딱 만들어내는 공돌이였는데.
좌우지간, 가장 먼저 할 일은 돼지 지방을 정제하는 일이었다.
아궁이에 불을 때고 웍과 비슷한 냄비를 달군 뒤, 돼지 지방을 올렸다.
지글지글.
고소한 냄새가 금세 퍼져나간다.
기름이 점점 흘러나오자, 지방 덩어리는 버리고 남은 기름을 준비해둔 냄비에 넣었다.
이제 남은 건 돼지 지방을 구워서 나온 기름을 정제시키는 일이었다.
기름을 채에 걸렀다. 그러자 거무튀튀한 기름 대신 비교적 밝은 색의 기름이 채에 걸러진다.
이쯤되면 절반은 완성된 거다.
이제······.
“아이쿠, 대감마님!”
질동 할아버지였다.
마당에서 구슬땀을 흘려가면서 원맨쇼를 하고 있는 나를 보고 아찔한 마음에 한걸음에 뛰어오신 것 같았다.
“어, 질동 할아버지. 점심은 드셨어요?”
“더, 덕분에 잘 먹긴 했사온데······.”
행랑 식구들한테도 치킨을 나눠줬었다.
백숙도 좋지만 역시 닭은 튀겨야 제맛이다.
튀김 반죽이 없어서, 후라이드 치킨 특유의 바삭한 맛은 덜했지만 왜, 고무신을 기름에 튀겨도 맛있다는 말이 있잖은가.
밀가루만 좀 발라서 튀겼을 뿐인데도 맛이 기똥찼다.
“한데 뭘 하고 계시는지······.”
“아, 뭘 좀 만들고 있어요.”
“아이구, 덕산이한테 시키시지 않구 대감마님께서 어찌 이런 궂은 일을··· 덕산이 이놈아. 너는 사지멀쩡해서 뭐하고 있었느냐?”
질동 할아버지가 애꿎은 덕산이를 나무란다.
“아, 제가 만들어야 되는 거라서요. 덕산이 잘못 없어요.”
“마, 만든다굽쇼?”
“네.”
“그래도 덕산이한테 대신 시키시지 아이구, 이 땀 좀 보십쇼.”
“하하. 괜찮아요. 가서 쉬고 계세요.”
질동 할아버지가 불안한 표정과 함께 자리를 뜨자 나는 일을 마저 시작했다.
‘여기까진 다 됐으니까, 이제.’
잿물과 섞고 푹 끓인 뒤에 식혀서 건조시키기만 하면 된다.
***
사흘 뒤.
하지였다.
행랑 식구들 다 보는 앞에서 건네주면 괜히 오해를 살까 싶어서 비누를 싸들고 집 앞 평상에서 전금이를 기다렸다.
한없이 기다리고 있노라니 아니나 다를까.
전금이가 빨랫감을 머리에 이고 나온다.
“전금아!”
“대감마님?”
“어디 가?”
“빨래 하러요.”
“오늘도 잿물에 빨래 하게?”
“네.”
수줍게 고개를 끄덕거리는 전금이에 품안에 넣어둔 비누를 꺼내들었다.
지난 3일간 액체 상태의 비누를 건조시켜서 만든 빨래비누였다.
물론 세안 할 때 써도 된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만들 수 있었다.
“이거.”
“···?”
“비누라고, 이거 잿물 대신 쓰면 돼.”
“잿물 대신이요?”
“응. 이거 물 살짝 묻혀가지고 빨랫감에 문대잖아? 그럼 잿물처럼 때는 잘 빠지는데, 잿물처럼 손이 푸석푸석해지거나, 거칠어지지도 않고 딱 좋다?”
“하, 한데 이걸 왜 쇤네한테······.”
“너랑 아줌마들 빨래할 때 쓰라고.”
“그러니, 그걸 왜 쇤네한테······.”
“너 곧 생일이라며?”
“새, 생일이요?”
“설마 너 생일도 까먹고 있었냐?”
전금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보통 제 생일도 까먹고 있었다면 민망해하거나 아차 싶거나, 두 가지 반응을 보이기 마련인데.
“아무튼 이거 생일 선물.”
“저번에 마당에서 만드시던 게 이거였어요?”
“응.”
“괜히 쇤네 때문에 고생하신 것 같아요······.”
“고생은 무슨. 아무튼 빨래 할 때 꼭 이거 써라? 아, 맞다. 그리고 이거.”
깜빡할 뻔 했다.
품에서 꽃반지를 꺼냈다. 이건 내가 주는 게 아니다.
“이건 덕산이가 주라더라.”
“더, 덕산이 오라버니가요?”
“응.”
제 생일도 까먹고 있었다는 데에서는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던 전금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둘 다 이성에 관심이 많을 나이지.’
난 다 이해한다.
그런 의미에서,
“덕산이 어때?”
“덕산 오라버니··· 착하고 성실하고, 그렇죠?”
“남편 감으론?”
“···”
“홍당무가 따로 없네.”
여전히 새빨간 얼굴을 보니 전금이도 마음이 아주 없지는 않은 것 같았다.
이 정도면 덕산이도 만족할 만한 답변을 들려 줄 수 있을 것 같다.
“됐어. 가 봐.”
“···네.”
종종걸음으로 사라지는 전금의 뒷모습에 나는 흡족한 표정을 짓고,
“덕산아! 전금이도 너 좋아한대!”
평상 뒤 은행나무에 숨어있는 덕산이를 불렀다.
소리를 들었는지 전금의 걸음 걸이가 빨라진다.
***
“···그러니 《맹자》에서 말하는 사단(四端)과 중용(中庸)에서 말하는 칠정(七情)은 곧 성(性)이라 볼 수가 있는 것이옵니다.”
주강(晝講, 낮에 하는 경연)이었다.
융은 턱을 괸 채 경연관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전하. 전하?”
“어. 아, 예.”
“듣고 계시옵니까?”
“물론 듣고 있소.”
“방금 신이 뭐라 아뢰었사옵니까?”
딴 생각을 하고 있느라 듣지 못 했다.
“···”
“잘 들으셔야 하옵니다.”
“알겠소이다.”
“계속하자면··· 희노애락애악욕(喜怒哀樂愛惡欲). 즉 기뻐하고, 성내고, 슬퍼하고, 즐거워하며, 사랑하고, 미워하고, 탐욕을 부리는 것은 사람마다 없을 수 없는 것이나 그것을 절제 할 줄 아는 사람은 이미 범재의 그릇이 아닌 것이옵니다. 이게 가능한 사람은 맹자나 안자(顔子), 증자(曾子), 순자, 노자, 목자 같은 대현(大賢, 어질고 지혜로운 사람)만 가능한 것이옵니다. 이 칠정중에 하나라도 발할 때에는 범부라도 삼가야 하는 것인데, 임금에게 있어서는 더욱 삼가지 않아서는 아니 되는 것이옵니다.”
“하지만 의원들은 화(怒)를 참으면 울화가 도지니 때로는 참지 말라 이르는데 이는 어인 영문인 것이오?”
“모름지기 의원이란 사(士)가 아니옵니다. 그들이 어찌 대현의 말씀과 대현의 풍모를 따라 할 수나 있겠사옵니까?”
“화타도 그러오?”
“···이는 이치에 어긋나는 말씀이시옵니다. 신은 지금 군왕의 도리를 말씀 아뢰고 있는 것이옵니다.”
융은 작게 웃었다.
“계속하오.”
“임금에겐 뇌정벽력(雷霆霹靂)과 같은 위엄이 있으니 성내지 않을 일에 성내어 함부로 벌하면 이 역시 칠정의 절도에 맞지 않게 되는 것이온데 더욱이 편폐(偏嬖, 편애)한 자만 항상 사랑하고, 정직하고 직언하는 사람을 미워한다면 이는··· 말하자면 곧 한무제(漢武帝)가 급암(汲黯)을 신하로 여기면서도 그 직언을 미워하여 마침내 회양(淮陽)으로 내쳐 충신을 제 손으로 떨쳐버린 일을 말할 수가 있는 것이옵니다. 또한 환제(桓帝)는 내시를 어여삐 여겨 후작에 봉하였는데 그 다음 한(漢)나라가 어찌 되었사옵니까?”
“망했지.”
“그러하옵니다. 사람에 대한 칠정이 이럴진대 하물며 임금의 마음을 흔드는 것은 천지사방에 도처해 있사옵니다. 그러니 만큼 전하께서는 더욱 각별히 주의하시고, 스스로 채찍질하여 성색(聲色, 말소리와 얼굴빛)을 조심하시고 누군가 진귀한 재물을 진상할 시에는 화리(貨利, 재물로 생기는 이득)를 멀리 하시옵고, 누군가 스스로를 구마(狗馬, 개와 말로 신하가 스스로를 낮추는 말)라 자처하고 아첨을 떨 때에는 그걸 구분하고 분별 하실 수 있으셔야 하는 것이옵니다.”
융은 내심 조소했다.
저것들은 전부 구분 할 수 있다면 임금이 아니라 하늘일 터였다.
하늘이 할 수 있는 일을 임금더러 하라니 절로 조소가 나온다.
하지만 그걸 내색 할 순 없는 노릇.
“알겠소.”
“혹 오늘 드린 말씀 중에서 스스로 채찍질 할 것이 보이시었사옵니까?”
“너무 많아서 딱히 선별 할 수가 없겠소이다.”
“신이 한 가지 말씀 올리겠나이다.”
‘시작이겠군.’
융은 눈을 감았다.
이제 곧 귀에 따박따박 박히는 잔소리들이 들려올 시간이었다.
아니나 다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