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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21화 (21/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21화>

    백수의 비누 만들기

    ***

    “오늘은 참 할 게 없어.”

    대청마루에 앉은 나는 흘러가는 구름만 바라보았다.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구름들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붕 뜨는 기분이다.

    심심하지만 지루하진 않았다.

    내가 바라던 삶이었다.

    돈 많은 백수의 삶.

    “궐에나 갈까.”

    여기서 엎드리면 코닿을 거리에 궐이 있다.

    가서 연산군 형님과 수다나 좀 떨까 싶었는데 관뒀다.

    형님도 여러모로 마음이 싱숭생숭하시겠지.

    “덕산아 지필묵좀.”

    “네.”

    내가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내가 무슨 행랑 식구들처럼 힘이 세서··· 아, 행랑 식구들은 우리 집 노비들을 이르는 말이다. 좌우지간 행랑 식구들처럼 힘이 세서 집안일을 거들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부엌에 들어가서 밥을 할 수도 없······.

    “밥?”

    “대감마님, 여기 지필묵 대령했습니다요.”

    “덕산아.”

    “예?”

    “오늘 점심은 뭐래?”

    “대감마님께서 특별히 분부 내리신 게 없으니 제철 나물들하고 생선 구이가 올라오지 않을까 싶습니다요.”

    “치킨 먹고 싶은데······.”

    “치, 치킨이요?”

    “튀긴 닭.”

    “닭을 튀겨요?”

    “응. 너, 그거 한 번 먹어보면 백숙 생각 안 날걸. 안 되겠다.”

    나는 휘적휘적 부엌으로 향했다.

    남자가 부엌 들어가면 고추 떨어진다는 말이 거의 진담처럼 받아들여지던 시대에 부엌으로 가자 덕산이 화들짝 놀란 건 물론이고 점심 준비에 여념이 없는 아줌마들까지 화들짝 놀란다.

    “갑련이 아줌마, 오늘 점심은 내가 해도 되요?”

    “대, 대감마님께서 직접 말입니까요?”

    “먹고 싶은 게 좀 있어서요.”

    갑련이 아줌마가 다른 아줌마들과 눈치를 살핀다.

    “말씀해주시면 쇤네들이 만들겠습니다요. 어찌 귀한 몸으로 부엌엘······.”

    “그럼 돼지 기름 있죠?”

    “돼, 돼지 기름은 없습니다요.”

    “돼지기름 있어야 되는데.”

    “얻어 올 순 있을 것 같습니다요.”

    “그래요? 잘 됐네. 그럼 돼지 기름을 가마솥에 한껏 넣구요. 팔팔 끓인 뒤에 손질한 닭에 소금이랑 후추 같은 걸로 밑간하고 그 다음에 밀가루 좀 입혀서 튀기면 되거든요? 근데 후추가 있나? 아, 없으면······.”

    속사포 같은 내 말을 갑련 아줌마가 쩔쩔 거리며 받더니 마침내 고개를 끄덕거린다.

    “아, 예예.”

    “그럼 부탁좀 할게요.”

    “다, 닭은 몇 마리나?”

    “스무 마리 정도?”

    “그렇게나 많이 말씀이십니까요?”

    “나만 입은 아니잖아요. 그럼 부탁좀 할게요?”

    “알겠습니다요.”

    바빠진 부엌을 뒤로하고 사랑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아까 전 덕산이가 가져온 붓을 들었다.

    점심 먹기 까지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으니 시나 좀 쓰고 있어야 할 것 같았다.

    훌훌 털어낸 당신의 한 잔 술에

    훌훌 털어낼 수 없었던 인생의 무게가

    녹아 들어있습니다

    당신의 인생의 무게가 얼만지

    당신이 짊어지고 있는 짐이 무언지

    나는 알 수 없습니다

    당신이여

    때로는 누군가의 아들이었고

    때로는 누군가의 아버지였던 당신

    오늘 나는 당신을 위해 마지막 건배를 합니다

    “어떠냐?”

    시상이 마구마구 떠올라 휘리릭 시 하나를 갈겨 쓰고 덕산이에게 보여줬다.

    덕산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쇠, 쇤네는 원체 일자무식이라 시는 잘··· 그래도 감동적입니다요.”

    “그렇지?”

    음.

    갈겨 쓴 거 치곤 잘 쓴 것 같다.

    이건 따로 문갑에 넣어뒀다.

    나중에 연산군 형님한테 보여줄 시다.

    “흠. 시상이 안 떠오르는데.”

    시인들의 고뇌를 알 것 같다.

    이럴 땐 환경을 바꿔야 한다.

    지필묵을 가지고 집 밖을 나섰다.

    집 밖을 나섰다곤 하지만, 말그대로 그냥 딱 집 밖이었다.

    우리집 솟을대문에서 열 걸음 정도 떨어진 곳.

    커다란 은행나무 밑에 있는 편상.

    거기 앉아서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면면을 살폈다.

    ‘주제를 정해야겠는데.’

    시상이 안 떠오른다. 황급히 주변을 살폈다.

    봇짐을 이고 가는 봇짐장수?

    지게에 한가득 장작들을 이고 가는 나무장수?

    아니면, 항아리 이고 물길러 가는 아낙?

    그것도 아니면······.

    “어, 전금아. 어디가냐?”

    시의 주제를 정하기 위해 주변 환경을 살피고 있던 나는 문득 내 눈에 들어온 전금이에게 말을 걸었다.

    전금이는 이제 열 여섯 된 우리집 행랑 식구였다.

    “빨래 하러 가요.”

    그러고 보니 전금이가 빨랫감이 한껏 들어간 소쿠리를 이고 있었다.

    “빨래?”

    “네.”

    “그래, 알았······.”

    다.

    라고 답하려던 나는 문득 빨래 관련한 띵작(?)들이 떠올랐다.

    김혜숙 시인의 빨래.

    윤동주 시인의 빨래.

    이해인 수녀님의 빨래.

    빨래를 주제로 정해도 괜찮은 시상이 떠오를 것 같은, 어떤 느낌적인 느낌의··· 뭐랄까, 창작자의 필이 왔달까?

    “나도 같이 가자!”

    “네?”

    “빨래 하러 간다며 나도 따라 가게.”

    “하, 하지만 무슨 볼 게 있다구 대감마님께서 빨래 하는 걸······.”

    “빨랫터 가면 시상이 떠오를지도 모르잖아.”

    “···”

    “가자, 가! 얼른.”

    뭔가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시상이 금방 머릿속에서 도망칠까 싶어 얼떨떨한 표정의 전금을 재촉했다.

    전금이를 따라 도착한 곳은 청계천 빨래터였다.

    동네 아낙들이 한가득이었는데, 아낙들은 삼삼오오 수다를 떨다가 불청객이나 다름 없는 남정네에 수군거리기 바빴다.

    “자, 다들 저 신경쓰진 말고 일들 보세요.”

    그렇게 말한 나는 평평한 바위에 자리를 깔고 앉았다.

    종이를 가지런히 정돈하고 먹을 갈고, 붓을 들었다.

    툭! 탁! 툭! 탁!

    빨래방망이 두들기는 소리가 참 정겹다.

    ‘빨래라······.’

    주제는 이미 정했다.

    빨래다.

    어떤 의미를 시에 함축시키는 게 좋을까?

    ‘묵은 때가 벗겨진다는 의미는 너무 단순하고.’

    시는 어휘를 만드는 일의 하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게, 다른 사람들이 생각지 못 한 걸 캐치하는 게 중요한 요소였다.

    하지만 묵은 때가 벗겨진다는 의미.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갱생은 누구나 떠올릴 수 있을 법한 의미였다.

    뭔가 교묘히 트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마땅한 게 생각이 안 난다.

    ‘빨래를 주제로 더러운 내 마음을 표현하는 건······.’

    에이, 씨.

    차라리 그게 더 낫겠다. 나는 역시나 떠오른 시상이 걸음아 나살려라 도망이라도 칠까 황급히 붓을 놀려댔다.

    잿물에 몸 담근 너희의 검게 물든 살들이

    툭! 탁! 툭! 탁!

    방망이질에 울며 사라진다

    거친 손에 이끌려 물속에 첨벙거리면서

    살려달라, 살려달라 아우성 치는 모습에

    그녀의 손은 너희를 거묵거묵,

    검벙검벙한 잿물에 털어내고

    다시 목살을 움켜잡고

    흐르는 냇물에 집어넣는다

    너희는 조금의 비명도 없이

    그래서 어떤 외침도 없이

    깊고 긴 수렁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빨려 들어간다. 빨려 들어간다······.”

    그 뒤가 생각이 안 난다.

    뒤죽박죽한 머릿속을 환기도 시킬 겸 빨래터 아낙들을 눈에 담았다.

    “비누도 없이 빨래 하네.”

    왜 아낙들 손이 하나 같이 거친가 했는데, 잿물에 담은 빨래를 장갑 하나 없이 만진다.

    잿물의 독성 때문에 손들이 하나 같이 거친 모양이었다.

    그러다 문득 전금에 시선이 닿았다.

    열 여섯 전금이.

    한창 나이인 전금이도 다른 아낙들처럼 장갑 하나 없이 잿물에 담가둔 빨랫감들을 만지고 있었다.

    “저러면 피부에 안 좋은데.”

    뭐, 먹고 살기도 빠듯한 시대에 피부 가꾸는 건 사치겠지만 그래도 열 여섯이면 한참 외모에 관심이 많을 나이다.

    이건 동서고금을 막론한 진리나 다름이 없다.

    배부른 시대든.

    배고픈 시대든.

    열 여섯이면 한참 이성에 관심을 가질 나이이고, 한참 외모에 신경을 쓸 나이다.

    “덕산아.”

    “네.”

    “원래 다들 저렇게 잿물에 빨래하냐?”

    “···”

    또, 또.

    이 녀석 또 당연한 걸 뭘 묻냐는 한심한 표정이다.

    “이 자식아! 그 표정은 뭔데? 모르니까 물어 볼 수도 있지!”

    민망한 마음에 버럭 소리쳤다.

    “예. 다들 저렇게 잿물에 빨래합죠. 안 그러면 묵은 때가 잘 안 벗겨집니다요.”

    “흠.”

    다시 전금이한테 고개를 돌렸다.

    뙤약볕 날씨에도 구슬땀을 이리저리 훔쳐가면서 잿물에 손을 담구고 빨래하는 전금이가 보인다.

    뭔가 씁쓸하다.

    ‘21세기에 태어났으면 평범하게 학창 생활 즐겼을 텐데.’

    엑소에 환호하고 방탄소년단에 환호하는, 그런 소녀들처럼.

    유튜브에서 메이크업 동영상을 찾아보고, 또래 친구들과 이 틴트가 좋다, 저 틴트가 좋다 정보도 공유하는 그런 소녀들처럼.

    “덕산아.”

    “네.”

    “너 비누 모르지?”

    “비···누요?”

    반응을 봐선 모르는 것 같다.

    뭐, 기대하고 한 질문은 아니었다.

    “전금이 생일 언제냐?”

    “노비 년놈이 생일이 어딨겠습니까요.”

    “그래도 태어난 때는 있을 거 아냐.”

    “음. 하지(夏至, 24절기중 하나) 쯤에 태어났을 겁니다요.”

    “하지에? 곧 하지잖아?”

    “그렇습죠. 한데 그건 어찌 물으십니까요?”

    “생일 선물이나 해주게.”

    “새, 생일 선물이요? 그, 그냥 짚신 한 켤레나 해주면 감지덕지 할 겁니다요.”

    “그래도 그게 아니지.”

    생일 선물로 뭐가 좋을까 고민하진 않았다.

    이미 정해둔 게 있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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