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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20화 (20/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20화>

    돈 많은 백수의 삶

    ***

    이 감동을 집에서 확인한다면 또 다르겠지?

    “···지리군요.”

    덕산이의 손짓에 나와 함께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대던 장곤 선생님이 한차례 침음과 함께 말했다. 역시나, 무의식 중에 튀어나온 현대말에 아차 싶으셨는지 도로 입을 닫으신다.

    “부러우세요?”

    “서, 설마요. 공자께서는 말씀하시기를······.”

    “괜찮아요. 돈이란 게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건데요, 뭘.”

    “···명언이십니다.”

    “근데 밭에서 수업하잔 건 무슨 뜻으로?”

    제자 앞에서 잠시 흐트러진 모습이 민망하셨는지, 선생님은 옷매무새를 바로 하고 한참 밭일에 열중인 농부들을 가리켰다.

    “성인의 말씀은 골방에서 백번 외운다고 해서 몸에 익는 것이 아니옵니다. 이처럼 눈으로 보기도 해야지요.”

    뭔가 심오한 말씀이다.

    “뭘 보라는 말씀이신지······.”

    선생님은 덕산이에게 가져온 돗자리를 나무 밑에 펴게 하시곤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다.

    선생님 옆에 살포시 앉자, 선생님이 예의 농부를 가리키신다.

    “저 허리 굽은 농부를 보시옵소서. 또, 새참 이고 오는 저 아낙을 보시옵소서. 무슨 생각이 드시옵니까?”

    솔직히 아무 생각도 안 든다.

    굳이 꼽자면······.

    “히, 힘들겠다?”

    자신 없이 대답했는데 선생님이 과한 리액션과 함께 손가락을 튕긴다.

    “바로 그것이옵니다. 옛말에 독서위귀인불학작농부(讀書爲貴人不學作農夫)라 하였사옵니다.”

    최근 들어 머릿속에 먹물 깨나 주입 시켰다고 냉큼 뜻이 떠오른다.

    “글을 읽으면 귀한 사람이 되고 배우지 않으면 농부가 된다?”

    “하지만 그 말이 참이겠사옵니까? 무릇 글만 읽는다고 하여 귀인이 될 순 없고, 농부라고 하여 귀인이 되지 말란 법도 없는 것이옵니다. 옛날에 이름을 남긴 간신들이 모두 글을 못 읽어 간신이 되었겠사옵니까?”

    “아뇨. 오히려 글을 잘 알아서 간신이 됐을 것 같은데요.”

    “그렇사옵니다. 지금 대감께오서 공부 하실 수 있는 것은 또 다른 누군가가 바라마지 않는 일이옵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시옵니까?”

    아리송하지만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장곤 선생님의 말이 맞다.

    저 농부들이 농사를 짓고 싶어서 농사만 짓는 건 아닐 테니까.

    “저들도 글을 알면 귀인이 될 수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하지만 그럴 기회가 없는 것 뿐이고.”

    “그렇지요. 불씨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

    “불립문자(不立文字). 결국 성현의 말씀도 같지 않겠사옵니까? 결국 학문이란 깨달음을 취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과 수단에 불과 하옵니다. 그 학문을 토대로 깊이 있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야말로 귀인인 것이지요.”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틀린 말씀이 아니셨다.

    “그럼 덕산이가 글을 배우면 어떨까요?”

    고개를 주억거리며 선생님의 말을 음미하던 나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선생님이 돌연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덕산이를 바라본다.

    덕산이 역시 화들짝 놀란 표정이 역력하다.

    “더, 덕산이가 글을요?”

    “네. 이 녀석은 어디가서 이런 말 하면 경을 친다고 하는데, 선생님도 그리 생각하세요?”

    “으음······.”

    잠시 생각하던 선생님.

    “글쎄요. 하지만 농부 또한 귀인이 될 수 있다는 말처럼, 노비인들 깊이가 있고 기품이 있으며, 또한 배울 것이 있다면 어찌 귀인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어디가서 그런 말씀은 되도록 삼가시는 게 좋을 듯 합니다.”

    “어디가선 얘기 안 하죠. 선생님한테만 해 본 거예요.”

    피식 웃은 장곤 선생님이 수업을 이어나갔다.

    ***

    “우와.”

    모 CF에 나오는 배우처럼 두 팔을 활짝 벌린 나는 중2병 돋는 감성과 함께 시원한 바람을 만끽했다.

    “좋으시옵니까?”

    그런 나를 보고 장곤 선생님이 흐뭇하게 미소짓는다.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인데요? 이런 데는 어떻게 아셨어요?”

    “날이 더울 때 종종 찾곤 하옵니다.”

    서울에서 24년을 살았지만 인왕산에 이런 곳이 있는 줄은 몰랐다. 뭐, 피서란 개념도 없이 살아왔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말이겠다만, 서울에 이런 곳이 있는 줄 알았으면 한 번 쯤 찾아와보는 건데.

    아닌 게 아니라 이 인왕산 계곡은 정말 절경이란 말로도 부족할 만큼 경치가 빼어났다.

    깎아자른 듯한 암석들이 빼곡하게 들어서있고 협곡처럼 아찔한 암석 아래 계곡물이 졸졸졸 흐른다. 배후로는 높게 솟아오른 인왕산이 막힌 가슴을 뻥 뚫어주는 것처럼 서있었다.

    “이런 데 또 있으면 데려가주세요.”

    “하하하. 알겠사옵니다. 공부만 열심히 하신다면 명승지가 대수겠사옵니까?”

    기대된다.

    난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첨벙첨벙 발을 놀려봤다.

    아직 한여름은 아니지만, 뙤약볕이 내리쬐는 초여름 날씨.

    발이 찌르르 전율이 일 만큼 계곡물이 차다.

    지그시 눈을 감았다.

    졸졸졸 흘러가는 계곡물 소리와 짹짹거리는 산새들의 화음을 듣고 있노라면, 꼭 ASMR을 듣는 것 같았다.

    잠이 솔솔온다.

    하지만 아직 잘 때가 아니거니와 무엇보다,

    “대감마님! 수박 드십시오!”

    자고로 로마에 가면 로마 음식을 먹어야 하고, 계곡에 가면 계곡 음식을 먹어야 한다.

    계곡 음식중 으뜸은 단연 수박이다.

    시원한 계곡물에 몇 시간이고 담가둔 수박을 팍! 쪼개서 한 입 베어물면, 천국이 따로 없다.

    “선생님 수박 드세요.”

    나는 한쪽에서 우두커니 경치를 감상하던 선생님을 불렀다.

    장곤 선생님이 느릿느릿 뒷짐지고 걸어오시자 편 돗자리에 자리를 권했다.

    명승지에서 먹는 수박이라니··· 감회가 새롭다.

    이현호로 살 땐 피서는커녕 에어컨도 없이 여름 보냈는데 말이다.

    ‘아, 에어컨 없는 건 여기도 매한가지구나.’

    그래도 어째 그다지 덥지는 않다.

    한여름에 달궈지는 아스팔트나, 빌딩 실외기에서 빵빵 터져나오는 가스, 자동차 열기 같은 게 없는 세상이라서 그런가?

    아삭!

    덥든, 안 덥든.

    수박 한 입 크게 베어물었다.

    아삭! 소리와 함께 과즙이 흘러내린다.

    달디 달다.

    “덕산아 넌 안 먹냐?”

    정신 없이 수박을 먹다 보니 희한하게 덕산이가 마른 침만 삼키고, 정작 수박은 손에도 안 대는 모습이 보였다.

    “에? 아, 아닙니다요.”

    라고 말하지만 시선은 수박에 고정돼 있다.

    “왜, 너도 수박 들고 다닌다고 고생 했잖아, 들어.”

    손수 조각난 수박을 건넸다.

    “하, 하지만 이 비싼 걸 어찌······.”

    “비싸? 얼만데?”

    “요새는 쌀 댓말은 줘야 할 겁니다요.”

    “댓말? 다섯말?”

    “예.”

    그게 이 시대 기준으로 정확히 얼마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덕산이 표정을 보면 하여간 수박 하나 값이 엄청 비싸긴 한 모양이다.

    “에이, 암만 비싸도 사람이 먹는 거 가지고 야박하게 굴면 안 되지. 얼른 먹어, 얼른.”

    “그, 그래도 될깝쇼?”

    말은 비싸다고 거절했던 덕산이지만 내심 수박 맛을 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먹으라니 눈이 반짝거린다.

    “그래도 돼, 인마. 먹어.”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덕산이 수박 하나를 조심스레 집어들었다.

    그런데······.

    “과육을 먹어야지, 왜 껍질을 먹으려고 하냐?”

    이 녀석 장곤 선생님과 내가 먹다 버린 껍질을 주웠다.

    “···”

    “이거 먹어, 이거.”

    “···”

    “눈치 보지 말고 먹으라니까?”

    “아, 알겠습니다요.”

    덕산이 수박을 조심스럽게 베어물었다.

    띠용!

    그런 덕산의 눈이 함박만하게 커진다. 그러고는 허겁지겁 수박을 해치웠다.

    “대군께서는 참으로 인정이 많은 분이십니다.”

    “뭐가요?”

    “덕산이 말대로 노복에게 수박을 주는 상전은 없을 것이옵니다.”

    “먹는 걸로 차별하면 얼마나 서러운데요.”

    “하하. 틀린 말은 아니군요. 하지만 세종대왕께서도 이 수박을 훔쳐 먹은 이는 크게 벌을 주셨을 정도로 수박은 보통 과일이 아니옵니다.”

    대수롭지 않게, 그저 지나가는 어조로 말하는 장곤 선생님에 나는 귀를 종긋 세웠다.

    아는 이름이 나왔다.

    세종대왕!

    “세종대왕께서 그러셨다구요?”

    “그러셨지요. 옛날에 한문직이라는 숙수가 임금님 수라상에 올라가야 할 서과(西瓜, 수박)를 도적질 한 적이 있었습니다. 진상된 수박이 수십개는 넘으니, 하나 쯤은 없어져도 모를 거라 생각했나 본데, 웬 걸요. 대왕께오서 바로 알아채시고 곤장 백 대를 때리셨지요.”

    호오.

    의외의 옛날 이야기다.

    실화인지, 루머인지는 모르겠지만 세종대왕께서 이런 면도 있으셨나 보다.

    그만큼 수박이 귀중하다는 거겠지만.

    “그러고 보니 이 수박도 전하께오서 하사하신 게 아니옵니까?”

    “네, 맞아요.”

    어제 늦은 밤이었던가?

    장곤 선생님 돌아가시고, 혼자 빡세게 자습하고 있던 때.

    내관들이 찾아왔었다.

    왜 왔나 싶었는데 연산군 형님이 공부 열심히 하라고 수박을 보내셨지 뭔가?

    덕분에 이렇게 계곡에서 신선 놀음을 할 수 있게 됐다.

    “전하께서 대군마마를 애틋하게 여기시나 봅니다.”

    “형제니까 그렇겠죠? 아, 덕산아.”

    “예?”

    “근데 어제 전하께서 수박 몇 개나 주셨냐?”

    “열다섯개 하사하셨고, 오늘 한 개 가져왔으니 열 네 개 남았습죠?”

    “그래? 우리 집에 식구는 몇 명이더라?”

    “행랑 식구들 말입니까요?”

    “응.”

    “애들까지 포함하면 한 마흔 명쯤 됩니다요.”

    어디보자, 마흔명이면······.

    ‘최소한 다섯 덩어리는 잘라야되나.’

    많이 없다니까 그 이상은 무리겠지만, 그 정도는 잘라야 되지 싶었다.

    “그럼 돌아가는대로 한 다섯 개 쪼개서 행랑 식구들하고도 나눠 먹어.”

    “예!?”

    “요새 행랑 식구들 더워서 골골 거리잖아.”

    “아, 아무리 그래도 다, 다섯 개나··· 하, 한 개면 될 겁니다요.”

    “야, 한 개를 누구 코에 붙이냐?”

    “···”

    “어제 보니까 질동 할아버지도 기력이 좀 상하신 것 같으니까 저 뭐야, 행랑 식구들하고 한 다섯 개 해서 나눠 먹어.”

    “아, 알겠습니다요.”

    덕산에게 할 말을 끝낸 나는 다시 선생님을 바라봤다.

    “어디까지 얘기하고 있······.”

    “···”

    “선생님?”

    “에? 아, 예!”

    “넋이 나가 계시네요?”

    “아, 아니옵니다. 하온데 정말로 노복들에게 수박 다섯 덩어리를 주실 심산이신지······.”

    “주지 말란 법도 없잖아요?”

    “그, 그렇긴 하지요. 경국대전은 물론이고 대명률에도 노복들에게 수박 주지 말란 법은 없지요 없긴 한데······.”

    “에이, 나눠 먹으면 좋잖아요. 또 행랑 식구들 따지고 보면 다 나 도와주는 사람들 아녜요.”

    “마음이 넓고 상전으로서 아량을 베푸는 모습은 아름다우나 어디가서 전하께서 하사하신 수박을 노복들에게 먹였다는 소리는 하시면 아니 되옵니다.”

    “네, 그건 저도 알죠.”

    아닌 게 아니라 덕산이를 통해서 알게 됐다.

    뭐만 하면 덕산이는 어디가서 노비한테 XXX했다고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요.

    입에 달고 살았거든.

    그나저나 이 세상은 다 좋은데 안 되는 게 참 많다.

    그거 빼면 참 좋을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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