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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19화 (19/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19화>

    야외수업을 하다

    ***

    거사를 치룬 융은 가만히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볼에 부드러운 촉감이 느껴졌다.

    융은 녹수의 손을 조심스럽게 마주잡았다. 행여 조금만 힘 주면 깨질 듯, 아주 조심스럽게.

    “융아··· 네 손에 떨림이 있구나.”

    “상심이 크옵니다.”

    왕의 존대.

    하극상에 다름 없어서 다른 사람들이었다면 대뜸 부복부터 하고 죽여주시옵소서를 외쳐댔겠지만 녹수는 당연하다는 듯 말을 이어 나갔다.

    “어찌?”

    “내가 왕인데도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사옵니다. 심지어 어머니마저 지키지 못 하지 않았사옵니까?”

    토닥토닥.

    “괜찮다, 괜찮아. 네가 별난 것이 아니다. 그들이 별난 것이다. 어찌 사람이 하기 싫은 일을 하고 살 수 있단 말이냐?”

    “오늘은 대간들이 아우를 탄핵했사옵니다.”

    “진성대군을?”

    “예. 왕을 바른 길로 인도하지 못 했다··· 흉작인 때에 고기를 구워먹고 빈축을 사고 있다··· 어마마마의 성명을 빌려 가까스로 진화하긴 했사오나 미칠 것 같사옵니다. 여기가, 여기가 너무 답답하고 터질 것 같아서 미칠 것 같사옵니다.”

    융은 제 가슴을 거세게 내려쳤다.

    녹수의 손이 융의 머리로 올라왔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녹수의 손짓에 융은 흡사 애정을 갈구하는 아이처럼 녹수의 품안에 더 깊숙이 파고 들었다.

    “우리 융이··· 고생이 많구나. 참으로 고생이 많아.”

    “조만간 모두 죽일 것이옵니다.”

    흠칫.

    “그래. 네가 왕인데 거리낄 것이 무에 있겠느냐? 네가 하는 일은 설령 하늘에 칼을 뽑아도 옳은 일이다.”

    융은 말없이 녹수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젖을 조물딱거렸다.

    그런 융의 눈치를 살피던 녹수가, 융의 얼굴을 매만지며 말했다.

    “한데 요샌 진성대군과 잘 어울리는 모양이구나?”

    “···예. 진성 아우는 꼭 어머니와 같사옵니다. 소자의 마음을 잘 헤아려주고, 이해해주고··· 소자를 위해주고······.”

    “진성이가 밉지는 않더냐?”

    “어렸을 때 이야기지요. 지금은 다 크지 않았사옵니까.”

    녹수는 복잡미묘한 표정과 함께 융의 얼굴을 다시 어루만졌다.

    “우리 융이는 마음이 참으로 넓구나.”

    “하지만 저들은 용서치 못 하옵니다.”

    “저들?”

    융에게서 대답이 없었다.

    녹수는 슬쩍 고개를 내려 융을 살폈다.

    그는 낮게 웃고 있었다.

    “제가 칼을 잡는 날. 저들이 어찌 나올지 궁금하지 않사옵니까?”

    꿀꺽.

    “살려달라 애걸복걸을 하겠지요. 지금처럼 공자니 맹자니 떠들어 대던 것들도 그 세치 혀를 한 놈, 한 놈 뽑아버리면 더 이상 잔소리도 못 할 것이옵니다. 아마, 제 살 길을 보전하기 바쁘겠지요. 내가 제놈들을 버러지라 욕해도 윤당하다 외쳐댈 것이고, 내가 제놈들의 처자를 겁탈해도 온당하다 외쳐댈 것이옵니다. 내, 꼭 그리 만들 겝니다. 조금만 기다려보세요.”

    “그··· 그래. 기대하고 있으마.”

    융이 다시 녹수의 품안에 파고 들었다.

    ***

    훼방꾼들로 고기 파티가 흐지부지 파하고 난 절실히 느꼈다.

    진짜 빡세게 공부해야겠다.

    그래서 논리로 콧대를 눌러줘야겠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우울해 보이던 연산군 형님 때문만은 아니었다.

    탄핵.

    글쎄, 나를 대상으로 한 탄핵이 제기됐단다.

    참, 치졸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지만 더 화가 나는 건 내가 저 탄핵소에 어떻게 변명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변명할 여지가 없는 건 아니다.

    변명할 지식이 부족했다.

    저들은 이런 지식, 저런 지식을 갖다가 날 탄핵 시키는데 난 이 시대의 논리엔 빈약 할 수 밖에 없었다.

    나로서는 절치부심하는 계기가 될 수 밖에.

    덕산이한테 듣기로는 조정 대신이란 사람들은 물론이고 어지간한 선비들도 짧게는 십수년에서 많게는 수십년을 공부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괜스레 주눅이 들었는데 소학으로 진도가 나가면서 깨달았다.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말이다.

    천자문을 외울 때도 느꼈었다.

    이전의 삶보다 집중을 잘 하게 되는 것 같고, 암기 능력도 훨씬 좋아진 것 같다고.

    천자문 때만 해도 약간 긴가민가 싶었는데 소학으로 진도가 나가니 확실해졌다.

    원래 이 몸뚱아리 주인의 머리가 좋았던 것이든.

    어떤 어드밴티지가 주어진 것이든.

    공부하기 딱 좋은 머리를 갖게 됐다고.

    아닌 게 아니라 진짜 공부할 맛이 났다.

    내가 전생에 이런 머리였다면 Y대가 아니라 하버드도 노려봄직 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였다. 예전에는 성공하기 위한 수단으로 공부를 했던 것이라면, 여기선 희한하게 공부가 재밌었다.

    왜, 우울한 사람이나 쳇바퀴 도는 사람들에게 의사들이 운동을 권하잖은가.

    하나, 하나 성취감을 느끼게 되면 저도 모르게 열정적인 사람이 되어간다면서.

    지금 내가 그랬다.

    성취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A챕터를 장곤 선생님이 들려주면 처음에는 막막하다.

    근데 한 번 말씀해주시고 나면 귀에 속속 박힌다.

    처음에는 잘 보이지 않았던 구절들이, 어떤 의미인지 점점 알게 되면서 성취감을 느끼게 된달까?

    뭔가 RPG 게임을 하는 기분이다.

    변변한 스킬도 없이 Lv.1에 불과하던 내가 어느 새, Lv.5가 돼서 스킬을 배우고, 그 스킬을 토대로 몬스터를 잡고, 또 몬스터를 잡아 레벨 업을 하고, 스킬을 배우고··· 그래서 종국에는 만렙을 찍을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갖게 하는 RPG 게임 말이다.

    게다가 이 시대 공부는 딱딱할 거라는 막연한 편견이 있었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그런 면에서 장곤 선생님은 탁월한 선생님이셨다.

    예컨대 소학에서 어떤 구절 하나가 나와도 고사(古事)에 빗대서 말씀을 해주시거나, 본인이 겪은 경험을 토대로 말씀해주시기 때문에 이해도도 이해도지만, 흥미를 잃지 않고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또, 철학적이란 것도 흥미를 유발 시켰는지도 모른다.

    내가 철학적인 것에 관심이 있었는지도 몰랐는데, 이게 퍽 재밌다.

    인간 본성을 관찰자 혹은 창조주가 돼서 관조하는 느낌이랄까?

    뭐, 어쨌든.

    보름만에 소학을 떼고 대학을 배우기 시작하던 어느 날이었다.

    “오늘은 밖에서 수업을 하겠사옵니다.”

    으레 집에서 수업을 할 줄 알고, 지필묵이며 책이며 가지런히 정돈해놨던 나는 장곤 선생님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밖에서요?”

    “집에서만 공부하면 노잼이지 않겠사옵니까?”

    선생님의 대답에 나는 히죽 웃었다.

    어느 새, 현대말이 입에 벤 듯 시기적절하게 내 말을 따라하곤 하신다.

    현대말을 뱉고나면 본인도 아차 싶으셨는지,

    “아, 이런 또······.”

    자책 아닌 자책을 하시지만 뱉은 말을 주워담을 순 없는 노릇.

    “흠흠. 집에서만 하는 공부만이 공부의 다가 아니옵니다. 오늘은 밭엘 좀 가보시지요.”

    “밭이요? 논밭 할 때 그 밭?”

    “예.”

    뭐, 나쁘진 않다.

    날씨도 쾌청하고.

    “준비하고 나올게요.”

    잠시 후.

    옷을 갈아입고 나온 나는 선생님과 함께 도성을 나섰다.

    동대문을 빠져나와 일식경 정도를 달려 도착한 곳은 진펄리라는 곳이었다.

    덕산이의 부연 설명에 의하면 여기가 흔히 말하는 진창이란 단어처럼 땅이 질척거리고 질펀해서 진펄리란다. 뭐, 확실한 진 모르겠지만.

    굳이 다른 데로 안 가고 여기로 온 건 다름이 아니었다.

    “덕산아. 내 땅은 어딨냐?”

    난 그래도 일국의 왕자였다. 그것도 보통 왕자가 아니라 왕의 동생이었다.

    막대한 재산이 있다는 건 세 살배기 코흘리개도 유추 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아무튼, 야외 수업을 하자는 말에 나는 일전에 얼핏 들은 기억이 있는 내 땅을 겸사겸사 찾아와봤다.

    어차피 밖에서 할 야외수업, 내 땅도 둘러보고 좋잖아?

    “저기서부터 저어어기까지가 대감마님 땅입지요.”

    대수롭지 않게 손을 들고 검지 손가락을 서쪽으로 가리키던 덕산이, 어느 새 동쪽으로 검지를 쭈욱~ 움직인다.

    입이 쩍 벌어졌다.

    수천년 전 돌아가신 노자께서 놀랄 노자다.

    ‘내 땅······.’

    내 집 마련보다 더 힘들다는 서울에 내 땅 마련.

    시간의 간극을 한참 뛰어 넘어서긴 했지만, 서울에 내 땅이 있다는 점이 중요했다.

    못 해도 수천평은 되어보이는 저 땅이 내 땅이라니······.

    ‘집에 돌아가는대로 재산 점검 좀 해봐야겠다.’

    처음에는 경황이 없어서 못 했고, 그 다음에는 연산군 형님을 어떻게 케어할지 고민한다고 확인하지 못 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장곤 선생님과 함께 공부 삼매경에 빠졌었으니 그럴 겨를이 없었다.

    근데 막상 내 재산 목록 중 하나인 ‘부동산’을 보니 감회가 남다르기도 하고, 뭔가 기분 좋은 가슴 벅참이 있다.

    이 감동을 집에서 확인한다면 또 다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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