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군으로 살어리랏다-18화 (18/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18화>

    진성대군을 벌하소서. 응, 안 돼

    ***

    집주인 임이 조심스레 문갑을 뒤졌다.

    곧이어 그의 손에서 수십장의 종이를 한데 엮어 하나의 책자가 된 책이 달려나왔다.

    그는 곧바로 융에게 책자를 건넸다.

    “이게 전부인가?”

    “예.”

    “많구나.”

    “어쩔 수 없사옵니다.”

    책자를 쓱 훑어본 융.

    “계책은?”

    “윤구(尹遘)를 요직에 앉히는 것으로 시작하심이 어떠신지요?”

    윤구는 융의 어머니인 폐비 윤씨의 오라비였다.

    “6년 전에도 윤구를 서용(敍用, 죄지은 관리를 다시 등용함)하여 말들이 많았고 3년 가자(加資, 품계를 올리는 일)시키는 일로 언관들의 논계(論啟)와 탄핵을 받았는데 가당하겠는가?”

    “그러니 더 요직에 앉히는 것이 좋지 않겠사옵니까?”

    “계속하라.”

    “윤구는 옛 중전 마마의 오라비 되시는 분이옵니다. 전하께서 즉위 초에 어찌 그를 서용하셨사옵니까? 옛 중전 마마의 원한을 갚기 위해서 아니었사옵니까.”

    “그랬지.”

    “만일 지금 그를 요직에 앉힌다면 필시 말들이 많을 것이나 언관들은 자연히 혈육의 정에 이끌려 요직에 앉히는 것이라 생각할 것이옵니다.”

    “하면 그들이 방심한 때에 일을 도모하자?”

    “그렇사옵니다.”

    “괜찮은 계책이로다.”

    “심지를 굳건히 하소서. 전하께선 필시 성군으로 기록되실 것이옵니다.”

    “성군이라··· 정녕 그리 되겠는가?”

    “신은 믿사옵니다. 지금 조정에 있는 자들은 전부 위군자나 다름이 없사옵니다. 숭재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전해 들었사옵니다.”

    “그래? 하면 민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일이 어찌 민망하겠사옵니다. 되려 저들이 민망해 해야 하는 일이옵니다. 전하께선 생각해보시옵소서. 대군께서 하신 말씀들에 어찌 하나의 틀림이 있었겠사옵니까? 대사성 민휘나 다른 작자들이 입하나 뻥긋하지 못 한 것은 실로 본인들도 본인 스스로가 추악하고 소인의 그릇을 가졌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옵나이다.”

    “맞다. 그대의 말이 진정으로 맞아.”

    “군자보구십년불만(君子報仇十年不晩)이라 하였사옵니다. 곧 십년이옵니다.”

    “그대의 말이 맞다. 곧 십년이지.”

    “전하께오서는 와룡(臥龍)이옵니다. 용이 겨울잠을 자고 깬다면 천지가 진동할 것이니 너무 초조해하지도, 너무 드러내지도 마시옵소서. 그리한다면 자연히 흥할 것이옵니다.”

    융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 오늘 너무 화가 주체 할 수 없는 일을 당해 잠시 이성을 잃었다. 그대의 말은 하나 같이 옳으니 꼭 공자의 말을 듣는 것 같다.”

    “공자의 말이라고 하나같이 옳은 것만 있겠사옵니까.”

    “하하. 그래, 그것도 맞는 말이로구나. 공자의 말이 어찌 천지만물의 일에 적용 할 수 있겠느냐.”

    한차례 웃음을 터뜨린 융은 ‘그 날’을 떠올려봤다.

    그 날이 도래한다면 더 이상 대간이란 작자들과 노신들도 그를 함부로 하지 못 할 터였다.

    지금처럼 진성 아우 앞에서 망신을 당할 일도 없었고, 그 누구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었다.

    ‘그리만 된다면··· 정녕 그리 될 수 만 있다면.’

    융은 주먹을 꽉 움켜쥐으며 눈앞의 사내를 따스한 눈으로 응시했다.

    “내 믿을 건 그대 밖에 없다. 그 날이 도래한다면 내 그대를 긴히 쓸 것이다.”

    “부디 전하의 뜻에 맞는 태평성세를 이루소서.”

    “그럴 것이다. 꼭 그리 할 것이야.”

    그전에.

    어마마마의 비명을 피로써 되갚아준 뒤에 말이다.

    ***

    다음 날, 편전.

    융은 골을 지끈 눌렀다.

    「진성대군 이역(李懌)이 어제 저지른 일을 전해 듣고 신들은 황망함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이역은 종친으로서, 또한 나라의 어른으로서 더욱 경계하고 조심하여 임금을 보필함이 마땅할진대 만기(萬機, 임금이 보는 정무)를 가벼이 여기고 놀이를 제안하고 흉작인 때에 고기를 구워먹는 등 빈축을 사는 일을 행했는데도 죄책이 전혀 없이 노신을 겁박하고 위군자로 몰았으니 대명천지에 이처럼 불경한 일이 또 어디에 있다 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임금을 무시하는 마음이 두드러졌기에 가능한 일일뿐더러, 임금의 은혜에 대한 티끌만한 감사함도 없고 군신의 의리를 배반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천지 사이의 일에 어찌 용납 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종사의 큰 뒷일을 생각하시며 대의로써 결단을 내리시어 신들의 울분을 풀어주시옵고, 또한 마땅히 형률에 맞게끔 벌주어 국가의 기강을 바로 세우시옵소서.」

    사간원에서 올라온 상소 때문이었다.

    ‘또 민휘의 짓이로구나.’

    불보듯 훤했다.

    필시 어제 있었던 일에 앙심을 품었을 것이다.

    백성들에게 염간(廉簡, 청렴하고 간솔함)이라 칭송을 받는다지만 그건 백성들에게나 해당 되는 말이었다.

    융은 꽉 막힌 대사간 휘가 무척이나 싫었다.

    늘 듣기 싫은 말만 한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

    “전하. 대간들의 판단이 이러하옵니다. 진성대군은 여지껏 큰 소요를 일으킨 적이 없었사오나, 어제의 일을 보소서. 마치 세종대왕 시절의 양녕처럼 마음 내키는 대로 활보하지 않겠사옵니까. 이는 전하의 혈육이란 점을 믿고 방만히 구는 것과 진배 없사옵니다. 부디 벌주어 그릇된 행동을 바로잡으소서.”

    “대간이란 작자들이 어지간히 할 일이 없는 것 같소.”

    “전하!”

    “진성은 아직 어리오. 더욱이 잘못이라고는 과인을 따라 사냥에 참가한 죄 밖에 없는데 그걸 벌주라니? 종친을 이리 박대하는 경우가 어딨겠소? 윤허 할 수 없소이다.”

    “하오나 어제의 일을 보시옵소서. 진성은 군신의 의리를 무너뜨리고 강상마저 무너뜨린 참람한 짓을 범했사옵니다. 어찌 불허하실 수 있단 말이옵니까? 부디 통촉하여주시옵소서.”

    “통촉하여주시옵소서.”

    “진성이 죄 지은 것은 어제 한 번이지 않소이까. 경연에서 무릇 군왕이라 함은 관용을 베풀고 실수를 용서 할 수 있는 관대함을 발휘해야 한다던 경들이 어찌 지금은 단 한 번의 실수에 이리 우르르 몰려와서 성토를 한단 말이오?”

    “대군이 아직 어린 나이이기에 더욱 보듬으려는 것이옵니다. 만일 전일처럼 방만한 일을 벌주지 않고 넘어간다면, 진성대군은 스스로 ‘내가 어찌 한들 전하께서는 날 벌주지 않는다’ 생각하고 더욱 방종을 일삼을 것이옵니다. 옛날 양녕대군이 그러지 않았사옵니까?”

    “양녕대군의 일과 진성대군의 일은 다르오. 더욱이 어제는 내 경황이 없어 미처 말하지 못 하였지마는, 경들이 과인을 겁박한 건 사실이 아니오?”

    “저, 전하! 듣기 망측하옵니다.”

    “듣기 싫은 소리는 자주 하시는 분이, 제 듣기 싫은 소리는 망측하다 귀를 막아 버리시오?”

    “하오나······.”

    “어제의 일이 무례가 아니었다는 걸 변명하려는 참이오? 군사들이 다 보는 앞에서··· 심지어 천한 백정들이 다 보는 앞에서 군왕을 윽박지르고 환행하라 겁박하는 신하들이 대명천지 어디에 있소? 진성이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에 그런 신하들에 발끈하여 나선 것 아니겠소.”

    “어제는 신들도 경황이 없고 황망한 마음에 한걸음에 달려가 아뢴 것이오나 지금 논하고 있는 것은······.”

    “듣기 싫소.”

    “전하!”

    끈질기다.

    이래서 민휘가 더 싫었다. 사람이 포기 할 줄 도 알고, 제잘못도 인정할 줄 알아야 하는데 그런 게 전혀 없다.

    저치가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으면 본인 말이 무조건 맞고, 자신의 말은 무조건 틀리다로 귀결된다.

    융은 비장의 수를 꺼내들었다.

    “달리 본다면 진성 아우는 나를 길러주신 어마마마(계모 정현왕후)께서 아끼시는 아드님이 아니시오. 효를 그렇게 강조하시는 분들이 진성 아우를 벌해 어마마마께 상심을 안기라는 것이외까?”

    “···”

    “내 생모께 효하듯 원자 시절부터 날 가슴으로 품어주시고 길러주신 어마마마를 받들고 있는데, 경들이 정 그리한다면 내 진성 아우를 벌하겠소이다. 그래. 북방으로 유배 보내는 것보단 사궁에 유폐시켜서 아예 옴짝달싹 못 하게 가두는 편이 좋겠군. 그리하면 되겠소?”

    편전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일부 담이 약한 신하들은 마른 침까지 꼴깍 거릴 정도였다.

    유폐.

    편전에 모인 중신들의 머릿속에는 이 단어가 떠돌아다녔다.

    주상의 어미가 사가에 유폐돼 있다가 사사됐었다.

    그걸 알고서 주상이 윽박지른 것이든, 무심결에 나온 말이든, 중신들로서는 한 발 물러서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신들의 생각이 짧아 대비전의 상심을 미처 헤아리지 못 했사옵니다.”

    “물러들 가시오.”

    중신들이 우르르 빠져나가자 융은 신경질적으로 용상의 팔걸이를 내려쳤다.

    쾅!

    ‘지금도 그때의 망령만 떠오르면 벌벌 떠는 종자들이 재상이랍시고 거들먹거리는구나. 한심하다, 한심해.’

    융은 빈 편전을 한동안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어디로 뫼시오리까?”

    “숙용(淑容, 후궁의 작호)의 거소로 가야겠다.”

    이처럼 마음이 심란하고 복잡한 날.

    그의 마음을 어루만져줄 수 있는 건 숙용 장 씨 밖에 없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