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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17화 (17/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17화>

    연산군 편 들어주기

    ***

    조심스럽게 말하자 수십쌍의 눈이 일제히 나한테 쏠린다.

    “전하는 아무 잘못 없습니다.”

    “대군마마.”

    “제가 조른 거라서요.”

    “어인 말씀이시옵니까?”

    아까부터 따박따박 연산군 형님을 궁지로 몰아넣던 관복 아저씨가 무서운 눈을 하고 묻는다.

    극존칭을 하고 있지만, 눈빛만은 금방이라도 날 잡아 먹을 것 같은 기세라 살짝 움츠러들었지만 대군인데 설마 진짜 잡아먹기야 하겠어?

    “전하께 사냥을 하고 싶다고 말씀 아뢴 것도 저고, 고기파티··· 아, 아니. 고기가 먹고 싶으니 백정들 시켜서 고기 구워먹자고 조른 것도 접니다.”

    “그 무슨······.”

    “진짜라니까요. 전하께서는 아우가 투정하니 받아준 죄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너무 그러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예의 관복 아저씨가 어이없다는 듯 연산군 형님과 날 번갈아가며 쳐다본다.

    표정이 마치 끼리끼리 잘 노오오온다. 라고 말하는 것 같은 건··· 착각이겠지?

    “이 박사. 이게 참말인가?”

    이번엔 다른 아저씨였다.

    이름은 역시 모르겠지만 매섭기는 앞전의 아저씨와 똑같다.

    아저씨의 질문에 장곤 선생님이 화들짝 놀라신다.

    “그, 그것이······.”

    “자네는 명색이 왕자사부로 기대를 받고 천거가 됐으면서 어찌 대군께 직언하지 않고 함께 사냥 놀이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소, 송구하옵니다, 대사성 영감.”

    “이 일은 절대 좌시 하지 않겠네.”

    “···송구하옵니다.”

    왠지 직장 상사한테(?) 털리는 느낌의 선생님을 보니 내가 다 미안하다.

    막상 사냥터 와서 사냥을 좀 즐기긴 했지만 그래도 사냥 하는 내내 연산군 형님께 사냥은 줄이셔야 한다, 백성들에게 본보기가 되는 군왕이 되셔야 한다, 옳은 말만 하셨던 선생님인데.

    “전하. 속히 환궁하시지요.”

    “알았소이다.”

    방금 전까지 시종일관 미소를 잊지 않았던 형님이 씁쓸히, 그리고 맥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습을 보니 슬그머니 화가 치밀었다.

    “그거, 너무 한 거 아니예요?”

    “···?”

    “사람이 좀 살다가 머리 식힐 겸 사냥도 할 수 있고, 취미활동도 할 수 있지! 형님 전하께서 뭐, 기생들 불러다가 풍악을 울린 것도 아니고 옛날 폭군들처럼 예?! 그, 뭐야. 죄없는 사람 불러다가 어떻게 해버린 것도 아니고, 그냥 사냥좀 한 건데 너무 한 거 아니냐구요.”

    “자네는 필히 이번 일을 해명해야 할 걸세.”

    대사성 아저씨는 내가 아니라 애꿎은 장곤 선생님께 열을 냈다.

    “아니, 화를 내실 거면 나한테 내시던지 비겁하게 왜 다른 사람한테 화를 냅니까?”

    “비겁이라 하셨사옵니까?”

    “그, 그래요, 비겁.”

    “지금 대군마마께서는 사태 파악이 잘 안 되시는 모양이옵니다. 언제 시간이 한 번 나신다면 도성 밖을 한바퀴 돌아보심이 좋을 듯 하옵니다.”

    “백성들이 초근목피로 연명하고 있다는 거요?”

    “잘 알고 계시는군요.”

    “그게 어떻게 전하 한 사람 잘못입니까?”

    찌릿.

    “여기 관복 입은 분들 모두의 잘못이지!”

    “예?”

    “그렇잖습니까. 여기 관복 입은 분들 모두 나랏일 하시는 분들이잖아요. 나라 경제가 어렵고, 국민들이 어려운 데에는 여러분들 책임도 있다는 겁니다. 아실만한 분들이······.”

    “대군마마! 말씀을 가려하시옵소서.”

    “가려하긴 뭘 가려해요?”

    “···”

    “여기서 소고기 한 번도 안 먹어본 사람 손들어봐요.”

    있을 턱이 없었다.

    “그럼 여기서 사냥 한 번도 안 해보고, 경치 좋은 곳에 가서 시 한 번 안 읊어 본 사람들 손 들어보세요.”

    역시 있을 턱이 없다.

    “어째 아무도 없으시네? 기방 한 번도 안 가본 사람들은 있겠죠?”

    “···”

    “이야. 그럼 술 한 번도 안 잡숴보신 분들은?”

    “···”

    “백성들은 초근목피로 연명하는데 정치하시는 분들은 소고기로 배에 기름칠 하고, 백성들은 맨날 허리 굽어라 논밭만 보고 사는데 경치 좋은 곳에 가서 시나 읊으시고··· 백성들은 기방 갈 돈은커녕 쌀 사먹을 돈도 없는데 기방에 가시고······.”

    “대군마마!”

    “아직 안 끝났습니다. 여러분들이 드시는 술은 다 곡주(穀酒)겠죠? 근데 그 비싼 곡물로 술까지 빚어드세요? 백성들은 당장 입에 넣을 곡식 한 줌도 없는데? 청빈하게 사시는 분들이 전하께 소고기 먹지 마라, 사냥 나가지 마라 하면 모르겠는데, 전하보다 더하신 분들이 하지 말라하니 이런 모순이 어딨습니까! 예?! 사람이 양심이 있으면 부끄러운 줄 아셔야지.”

    라고 나도 모르게 화가 나서 질러놓긴 했는데······.

    눈빛들이 하나같이 날 잡아먹을 것 같은 눈빛들이다.

    “대군마······.”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으로 날 쳐다보던 대사성 아저씨가 막 입을 열려하던 그때.

    “됐소. 모두 과인이 부덕한 소치요. 경들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소. 하물며 일가를 이뤘다곤 하나 이제 지학의 나이에 불과한 어린 진성에겐 무슨 잘못이 있겠소? 이만 하고 돌아들 갑시다.”

    “하지만 전하.”

    “됐다.”

    “신들이 뫼시겠나이다.”

    씁쓸히 웃는 연산군.

    그를 대사성 아저씨를 필두로한 관복 아저씨들이 겹겹이 에워쌌다.

    그런 내 눈에 보이는 건 축 쳐진 연산군 형님의 등이었다.

    ***

    강녕전.

    융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주체 할 수가 없었다.

    손에 잡히는 건 뭐든 내던졌다.

    명나라 사신이 일전에 선물한 화병(花甁)이 가장 먼저 손에 잡혔다.

    파삭!

    “내가 임금인데··· 내가 이 나라 조선의 지존인데도 내 마음 내키는 대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없다!”

    한참을 날뛰었지만 화는 좀체 가라앉지 않았다.

    그는 어둠에 물든 듯 시립해 있던 상선에게 눈을 돌렸다.

    발광하는 군주를 안타까운 눈초리로 바라보던 상선이 읍(揖)을 했다.

    “상선은 내가 미치광이 같은가?”

    “어, 어찌··· 듣기 민망하옵니다.”

    쾅! 쾅!

    융은 애꿎은 탁자를 거세게 내려쳤다.

    “내 미치지 않고서는 숨을 못 쉴 것 같아 이런다. 정말 미치겠다! 미치겠어!”

    “전하······.”

    “안 되겠다. 내 전(前) 상호군 임(任)을 좀 만나고 와야겠다.”

    “밤이 늦었사옵니다. 서신을 보내시는 것이 어떠시온지······.”

    “믿을 수 있는 이가 하나도 없다. 서신을 보내다가 배달이 잘못되면 어쩌란 말인가?”

    “···”

    “뭣 하는가! 준비하란 말이다!”

    “···분부 받들겠사옵니다.”

    잠시 후.

    융은 금군과 숙직 서는 관리들의 눈을 피해 담장을 넘었다.

    머잖아 그가 도착한 곳은 남촌의 한 기와집이었다.

    “전하!”

    기와집의 주인은 융을 단번에 알아봤다.

    그가 대뜸 부복부터 하자, 터벅터벅 마당을 가로지른 융은 주인의 허락도 구하지 않은 채 대청마루를 올랐다. 그러다 뒤에서 인기척이 들려오지 않자, 고개를 돌렸다.

    “긴히 논의할 것이 있으니 속히 올라오라.”

    “아, 예··· 춘동아.”

    집주인은 나직히 행랑의 노비 하나를 불렀다.

    “예, 주인 나리.”

    “혹 집을 감시하는 자가 없는지, 그리고 방금 오신 손을 따라온 사람이 없는지 살피거라.”

    “알겠습니다요.”

    노비에게 그렇게 말한 집주인은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사랑채로 올랐다.

    방으로 들어가자 좌정한 임금이 보였다.

    임금은 무척 골이 난 모습이었다.

    “연통을 주셨다면 신이 입궐 하였을 텐데 어찌 귀한 걸음을 하시었사옵니까.”

    “경이 입궐 했다면 사관들도 동석했을 게 아닌가. 게다가 경의 입궐 소식을 듣자마자 숙직 서던 삼사 관원들이 모두 들떼처럼 들고 일어나 강녕전에 진을 쳤을 걸세. 젠장할.”

    “저, 전하!”

    집주인이 화들짝 놀라 부복했다.

    임금이 말한 ‘젠장할’이란 표현 때문이었다.

    그가 아는 임금은 다소 과격하고 다혈질적인 면이 강하지만 그걸 숨길 줄 아는 노련한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중신들에게 크게 책 잡히지 않을 수 있던 것이었고.

    이렇게 분노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자신이 신뢰를 받고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욕이란 건 입에 담아 본 적이 없으셨던 임금이다

    한데 젠장할이라니······.

    듣는 자신이 다 민망할 지경이었다.

    “아. 내 진성 아우와 함께 있다보니 입에 밴 모양이다. 개의치 말라.”

    집주인 임(任)은 또 한차례 놀랐다.

    임금의 입가에 찰나지만 미소가 맺힌 걸 똑똑히 봤기 때문이었다.

    ‘근자에 전하께서 미소 지으신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하구나.’

    사실 웃으실 일이 많지도 않으셨다.

    그래도 웃음을 되찾으셨다니 그건 다행한 일이었다.

    “한데 어인 일로······.”

    “그 일은 잘 되어가는가?”

    “그러하옵니다.”

    “명단은?”

    집주인 임이 조심스레 문갑을 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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