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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15화 (15/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15화>

    하지말라면 더 하고 싶어지는 매직

    ***

    편전.

    “옥체가 불편하다 들었사옵니다. 괜찮으시옵니까?”

    융은 대사간 민휘(閔暉)의 말에 잠시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가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경들의 염려 덕에 괜찮아졌소.”

    “옥후가 정확히 어떠하였사옵니까?”

    “빈혈기가 돌고 머리가 어지러웠소이다.”

    “지금은 나아지신 듯 하니 천만다행한 일이옵니다.”

    “고맙소.”

    “하오나······.”

    “음?”

    “몸이 불편하기로서니 경연(經筵)에 불참하는 것은 군주의 덕목이 아니옵니다.”

    “몸이 아픈데 어찌 경연에 나아가란 말이오?”

    “수불석권(手不釋卷, 열심히 공부함을 이르는 말)이라 하였사옵니다. 몸이 잠깐 불편하다 하여 어찌 공부를 게을리 할 수 있겠사옵니까? 무릇 군주라 함은 경연을 잠시라도 열지 않은 때가 없어야 하는 법이옵니다. 하루동안에도 조강, 주강, 석강··· 심지어 야대(夜對, 임금이 밤에 신하를 불러하던 일종의 경연)까지 하여 계발하고 채찍찔하여야 하옵니다. 제아무리 생이지지(生而知之, 배우지 않아도 아는 사람)한 성인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경전과 스승의 강론(講論)을 바탕으로 덕성을 쌓고 인을 쌓으며 고금의 치란(治亂)과 득실을 알아 그로써 권면하여 경계로 삼고 그로 하여금 정치를 행해야 하는 것이옵니다. 그런데 지금의 전하께서는 잠깐 몸이 불편하다 하시며······.”

    또다.

    또, 따분한 소리를 늘어놓는다.

    융은 민휘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군주가 어떻고 군자는 어떻고··· 이미 귀에 인이 박히도록 들은 말들이다.

    알면서도 실천을 할 수가 없는 걸 어쩌란 말인가?

    “내 알아서 하겠소이다.”

    따분한 소리가 길어지자 융은 적당히 민휘의 말을 끊었다.

    하지만 따분한 잔소리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하옵고··· 근자에 전하께오서 사냥을 자주 나가신다는 말을 들었사옵니다.”

    “그게 어쨌다는 것이오?”

    “전하께서는 이번 달에만 3일, 5일, 10일, 13일, 17일, 20일, 25일, 27일 사냥을 나가셨사옵니다. 이리 밖에서 사냥을 하시는 날이 많으시니 어찌 몸이 축나지 않을 수 있겠사옵니까? 실로 오늘 경연에 옥체가 좋지 못 하여 납시지 못 한 것은 이러한 까닭 때문일 것이옵니다.”

    빠직-

    융의 이마에 힘줄이 돋아났다.

    “나는 날 때부터 심약하여 운동을 하지 않으면 몸에 곧 살이 붙고 잔병치레를 많이하게 되오. 대간은 정녕 내 골병을 앓았으면 좋겠다는 말이오?”

    “사냥은 본시 가을과 겨울에 해도 늦지 않는 법이옵니다. 한데 전하께서는 부쩍 그 정도가 심해지지 않고 있지 않사옵니까? 게다가······.”

    휘가 잠시 목을 가다듬었다.

    “감히 아뢰건대, 지금의 전하께선 성인의 학문과 성인의 덕을 가지심을 께름칙하게 여기시면서 공부를 게을리 하고 계시옵니다. 심지어는 나라의 정사마저 개념치 않으시고 오직 사냥과 놀이만을 일삼고 계시온데, 전하께오서도 아시다시피 지금 전하의 덕이 요순에 필적한다 할지라도 스스로를 경계하지 않고 돌보지 않으면 끝에 위망의 화가 닥칠지 모르는 법이옵니다. 신은 대간으로서 이런 말을 아뢰지 않을 수 없사오니 부디 통촉하여주시옵소서.”

    “경은 내 언제 국사를 폐기하고 놀이에만 전념했다고 하시오? 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은 국사가 아니더이까.”

    융의 반박을 사뿐히 무시한 민휘.

    “또 지난 날 목멱산에 행차하셨을 땐, 진성대군을 불러 누가 더 사냥감을 많이 잡는지 우위를 겨뤘다고 들었사옵니다.”

    “이젠 하다, 하다 종친과 어울리는 것도 아니 된다 하시오?”

    “내기를 말씀드리는 것이옵니다. 전하께서는 백신(百神)의 주인으로서 이 나라 조선의 지존이시옵니다. 그런 분이 어찌 한가로이 일개 종척과 활쏘는 재능을 겨룬단 말이옵니까? 혹 분위기가 과열돼 옥체에 해가 갈 수도 있을뿐더러, 본시 사냥내기란 승부욕이 발생하기 마련이니 친족 간에 우애가 상할 수도 있는 일이옵니다. 거듭 간하건대 전하께서는 사냥과 놀이는 폐하시고 정사를 돌봄에 힘을 쓰시옵소서.”

    융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질린다.

    진짜 질려서 질식 할 것 같았다.

    “옛날에 양(梁)나라 무제(武帝)가 신하들과 시를 지어 서로의 재능을 뽐낸 것은 예기(藝妓, 가무나 시문)의 하나이니 가한 일이고, 사냥을 하면서 재주를 뽐내는 것은 무예의 일종이니 불가한 일이란 말이오?”

    “예기와 무예가 어찌 같을 수 있겠사옵니까. 더욱이 무제가 겨룬 것은 시문이지, 활쏘기 같은 게 아니었사옵니다. 전하께서 내일 경연에도 불참하신다 하시면 신은 물러가지 않겠사옵니다.”

    정말이지,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못 참을 것 같았다.

    하지만 휘는 중신이자 대간이다.

    융은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알겠소이다. 내 닷새 뒤에는 꼭 나가겠소이다.”

    “경연은 매일 열리옵니다. 어찌 닷새 뒤를 말씀하시옵니까?”

    “아니, 몸이 불편한 걸 어쩌란 말이오!”

    “닷새는 불가하옵니다. 모름지기 군왕이라 함은 말의 무게를······.”

    또 시작하려 한다.

    “아··· 알겠소이다. 내일부터 경연에 나아갈 터이니 이만 나가보시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민휘와 중신들이 흡족한 표정으로 편전을 빠져나갔다.

    홀로 편전에 남은 융.

    “냉수 한그릇만 떠오거라.”

    “예.”

    잠시 뒤.

    상선이 냉수를 갖고 들어왔다.

    융은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오늘도 진성 아우는 입궐하지 않았느냐?”

    “그러하옵니다.”

    “열심히 공부를 하는 모양이로다.”

    “왕자사부로 천거된 장곤도 재능이 특출난 자이니 대군께오서도 열심히 강학(講學, 학문을 갈고 닦음)하시는 듯 하옵니다.”

    열심히 공부한다니 흐뭇했지만 뭔가 입맛이 쓰다.

    상선은 그런 융의 눈치를 살피며 머뭇거리다 임금이 또 가슴 답답함을 토로하자,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외람되오나 신이 듣기로 오늘 대군께오서 풍원위 대감과 사냥을 나가신다 들었사옵니다.”

    “사, 사냥을?”

    “그러하옵니다.”

    “어디에서 한다더냐?”

    “그건 듣지 못 하였사옵니다.”

    융은 잠시 고민했다.

    방금 잔소리를 듣고 또 사냥이라니··· 어떤 잔소리를 들을지 모르겠지만 이대로는 답답해서 안 될 것 같았다.

    “풍원위의 저택에 사람을 보내라. 나도 곧 갈 것이다.”

    “괜찮으시겠사옵니까?”

    “지금은 마음이 답답하고 울적하여 정사가 손에 잡히지 않는다.”

    “하면 준비하라 이르겠나이다.”

    그제야 융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

    “여!”

    풍원위의 저택을 찾은 나는 집 앞에 숭재 씨가 마중 나와있자, 손을 번쩍 들어 반겼다.

    내가 이 세상에 온 지도 어언 3개월이 지났지만 친구라고 부를 사람은 솔직히 한 사람도 없다.

    덕산이?

    아쉽지만 그 녀석은 늘 내 눈치만 본다.

    그런 내게 그나마 친구라고 할 사람이 있다면 연산군을 통해 알게 된 숭재 씨 뿐이다.

    나보다 열 살은 더 많은 형님이라 조심스럽긴 하지만 마음만 잘 맞으면 그게 친구지, 뭐.

    “대군마마. 오셨사옵니까?”

    “오랜만이네요. 그리고 말씀 편하게 하셔도 된다니까요?”

    “소인이 어찌 대군마마께··· 하하. 전 오히려 이게 편하옵니다.”

    “음. 그러시면 할 수 없구요. 아, 여긴 제 사부님이십니다.”

    숭재 씨가 쭈뼛쭈뼛 서있는 장곤 선생님을 위아래로 훑는다.

    그런 숭재 씨의 행동을 보고 있노라면 희한하게 보호 받는 느낌이다.

    눈빛에 적의는 없지만 마치 “내 동생 잘 못 가르치기만 해 봐.”라고 말하는 것 같달까.

    “전하께서 말씀하신 왕자사부가 바로 이분이군요.”

    “말씀 편히 하시옵소서. 소인 이장곤이라 하옵니다, 대감.”

    “어전에서 대사성께서 친히 천거하신 분이란 얘기는 들었소이다. 그래, 반갑소.”

    장곤 선생님이 꾸벅 고개를 조아린다.

    그런 두 사람을 보며 난 흐뭇하게 미소지었다.

    내가 이 조선에 와서 기댈 수 있는 사람은 솔직히 이 두 사람 밖에 없다.

    질동이 할아버지는 여전히 쩔쩔매고 있고, 그건 이 시대의 생활상에 대해 조언 및 지적을 해주는 덕산이도 마찬가지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숭재 씨는 내게 뭔가 듬직한 형 같은 느낌이고, 장곤 선생님은 잘 만난 담임 선생님 같은 느낌이다.

    그런 두 사람이 친해진다면 나로서도 흡족할 것 같다.

    “그럼 출발할까요?”

    “좋죠. 출발!”

    오늘 사냥에선 사슴이나 멧돼지 같은 대물은 아니어도, 토끼나마 잡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각오를 다지면 출발하려는 그때.

    저 멀리 먼지 바람이 일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몇 기인지는 알 수 없지만 기마가 일으킨 먼지바람 같았다.

    “날 빼고 가면 섭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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