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군으로 살어리랏다 13화>
왕자사부 이장곤
***
“이보게, 이 박사. 이 박사?”
“아, 예.”
“무슨 생각을 그리 골몰히 해? 윗전에 밉보인 거 없냐니까?”
윗전에 밉보인 거라.
짚히는 게 전혀 없······.
“아!”
“왜? 뭔가 있나?”
“지난 번에 상소를 올린 게 하나 있사온데······.”
“상소? 아이고 이 사람아. 주상께서 가뜩이나 언관들한테 시달려서 상소라면 진절머리가 나신지 오래 일 텐데, 무슨 경을 치려고 상소를 올렸나 그래? 근데 내용은?”
“사냥을 자중하시라는······.”
“···”
“나리?”
“···아직 젊어서 그런지 기백은 당차군. 그 기백은 높이 사겠네.”
그렇게 말한 선배 관리가 장곤의 어깨에 손을 올리곤 두어번 두들겼다.
“힘내게. 그래도 진성대군은 다른 왕자군들처럼 예의가 아주 없는 천둥벌거숭이는 아니라 하니 크게 어려움은 없을 걸세. 그럼 난 이만······.”
“아, 아니. 직강 나리! 직강 나리!”
장곤의 외침에도 선배 관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삐 걸음을 놀렸다.
마치 엮이기도 싫다는 듯.
홀로 남은 장곤.
“저걸 위로라고, 씨.”
막막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위에서 까라는데 까지 않을 도리는 없었다.
다음 날.
장곤은 불길한 마음과 막막한 심정을 한가득 안고 진성대군의 궁방으로 등청(?)을 했다.
그리고 그 불길한 마음과 막막한 심정은 정확히 반시진 뒤 현실이 되었다.
***
아침에 일어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조깅이었다.
공부도 체력이 우선시되어야 하는 일이거든.
옷차림을 가볍게 하고 동네 한바퀴를 돌았다.
확실히 16세기는 미세먼지도 없고 매연도 없어서 공기가 맑은 느낌이다. 숨을 쉴 때마다 꼭 탄산음료를 들이킨 것처럼 청량감이 느껴진달까?
“헥! 헥!”
나는 고개를 돌렸다.
덕산이가 더위 먹고 헐떡거리는 개처럼 숨을 고르고 있었다.
“얼마나 뛰었다고 벌써 숨이 차?”
“바, 반시진을 뛰, 뛰었는뎁쇼. 헥헥!”
“벌써 그렇게 됐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뜀박질을 했더니 한시간이나 됐다니······.
아, 반시진은 한시간이다. 한시진은 두시간이고.
이건 한 달 전 쯤에 깨달은 사실이다.
어쨌거나.
‘이 몸뚱아리 주인이 체력은 좋았나?’
그렇게 뛰었는데 어째 힘든 감이 없다.
아니면 젊어서 그럴지도?
아닌 게 아니라 이 몸뚱아리가 이래뵈도 열다섯이거든.
이 시대는 거의 만으로 나이를 계산하는 것 같으니 한국식으로 하면 끽해야 열여섯?
중3 나이다.
“얼른 일어나. 오늘 선생님 오시기로 한 날이잖아. 몰라?”
연산군은 확실히 화끈했다.
공부좀 해도 되겠냐고 했더니 해도 된다고 한 건 물론이고 선생까지 직접 보내주기로 한 것이다.
이게 나름 파격적이었는지 경복궁을 나오면서 꼰대들이 연산군한테 뭐라고 한 것 같긴 했는데 어차피 나랑은 상관 없는 일이고, 난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된다.
“아, 덕산아.”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아직도 숨을 헐떡거리고 있는 덕산이를 돌아봤다.
“예?”
“너 언문은 알고 있고, 한자도 좀 아냐?”
“한자라굽쇼? 당연히 모릅죠.”
그게 당연히 모를 일인가.
“오늘 선생님 오는데 같이 공부 안 할래?”
“예!?”
덕산이가 두 눈을 화등잔만하게 치켜 뜬다.
이 녀석은 아마 21세기에서 방청객으로 방송 탔으면 꽤 이슈 됐을 놈이다.
리액션이 장난이 아니라니까.
“하기 싫음 말고.”
“대, 대감마님.”
“왜 정색 빨아, 무섭게.”
“어, 어디가서 저한테 하신 말씀 하시면 안 됩니다요.”
“뭐, 공부 같이 하자고 한 거?”
“예. 세상천지에 종놈이랑 같이 공부하는 대군마마가 어디 계시겠습니까요.”
“너 반석평 모르냐?”
“바, 반석··· 예?”
뭐, 모를 수도 있지.
반석평은 초딩때 위인전 읽으면서 본 이름이다.
솔직히 말해서 별로 유명하지 않은 인물인지, 위인전에도 짧게 나와서 그냥 노비 출신으로 장관 해먹었다는 것만 기억하고 있다.
“아니다.”
잠시 뒤.
집에 도착하자 집 밖을 누군가 서성이고 있었다.
집으로 들어갈 것처럼 보이다가도, 다시 발길을 돌리는 모양새가 망설이고 있는 느낌을 준다.
똑똑.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는 정체불명의 남자 어깨를 두어번 두들겼다. 그러자 남자가 화들짝 놀라면서 고개를 돌린다.
“···?”
“누구세요.”
“예? 아, 저는··· 그러니까, 에······.”
“아, 혹시 전하께서 보내주신 선생님?”
***
씻는다고, 학생 신분으로 선생님을 기다리게 만들었다.
사랑방으로 들어간 나는 멋쩍게 웃었다.
첫만남부터 찍힌 건 아니겠지?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 아니옵니다, 대군마마.”
어째 바짝 얼어붙어 있다.
“이름이 뭐라고 하셨죠?”
“소인 성균관 박사 이장곤이라 하옵니다. 만나뵙게 되어 영광이옵니다.”
넙쭉 고개를 조아리는 장곤 씨에 나는 손을 내밀려다가도 마주 고개를 조아렸다.
악수는 이 시대 예법이 아닌 걸 머리는 아는데 자꾸 몸이 먼저 반응한다.
저번에 임숭재 씨를 처음 만났을 때도 손을 내밀었었다.
내 손만 멀뚱멀뚱 바라보던 숭재 씨에 어찌나 무안하던지··· 이번에는 그런 우를 범하진 말아야지.
“근데 왜 안 앉고 계셨어요? 앉으세요. 아니, 거기 말고 상석을 앉으셔야죠.”
나는 엉거주춤 자리에 앉는 선생님을 일으켜세웠다.
그리고 상석을 가리켰다.
“하, 하오나······.”
“이게 예법에 맞는 거 아닌가요? 두사부일체라는 말도 있잖아요.”
“두, 두사부일체 말입니까?”
“아, 군사부일체요.”
“마, 맞긴 하오나······.”
“자자, 앉으세요.”
쭈뼛거리는 선생님께 자리를 권하고 나도 앉았다.
그리고 나는 적당히 타이밍을 쟀다.
무슨 타이밍?
절 타이밍.
아닌 게 아니라, 선생님이 온다는 소식에 두려움반 설렘반이었다.
호랑이 선생님이 오시면 어떡하지··· 인터넷 상에서 우스개 소리로 흔히 쓰던 10선비 선생님이 오시면 어떡하지··· 그럼 이거 완전 나가린데······.
그래서 일단 덕산이에게 물어봤다.
보통 선생님과 첫 만남 땐 어떻게 해야 되냐고.
21세기에서야 “안녕하세요?” 인사하고 말지만 여기선 또 다를 게 아니던가.
과연 내 예측은 엇나가지 않았다.
“절부터 올리셔야 될 겁니다요.”
라는 덕산이의 말.
그런 덕산이의 말을 듣고 보니 확실히 조선에 온 게 실감이 났다. 아무리 신분제 사회라지만, 대군인 나도 스승에겐 깍듯이 예를 갖춰야 한단 뜻 아니겠는가.
뭐, 어쨌든.
적당한 타이밍을 본 나는,
“절부터 받으세요, 선생님.”
“예? 어, 어인 말······.”
당혹해하는 선생님을 뒤로하고 절을 올렸다.
절을 한 번만 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고, 내 마음이 표현이 안 될 것 같아 한 번 더 절을 올렸다.
“대군마마.”
“네.”
“혹 소인이 마음에 안 드시는지요?”
“아뇨, 그럴 리가요.”
일단 젊어 보여서 좋다.
“한데 어찌 절을 두 번 하시는지······.”
“두 번 하면 안 된다는 법도 없잖아요?”
“후······.”
크게 한숨을 내쉬는 선생님에 좀 불안하다.
두 번 올리면 안 되는 거였나?
그러거나 말거나.
선생님이 말없이 책을 펴신다.
“방금 전 그 일은 잊겠습니다. 사서삼경은 어디까지 깨우치셨는지요?”
뭘 잊겠다는 건지······.
수업 끝나는 대로 덕산이한테 물어봐야겠다.
“사서삼경이요?”
“예. 어디까지 깨우치셨는지에 따라 어찌 수업을 할지 정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저기, 선생님.”
“예?”
“이런 말씀 드리기 민망한데 혹시 그런 말씀 아시나요?”
“어떤···?”
“무식은 죄가 아니다. 무식보단 무지가 죄다.”
“좋은 말이군요.”
“그럼 그런 말도 아실까요.”
“말씀하십쇼.”
“배우려는 건 창피한 게 아니다. 배우려는 의지가 없는 게 창피한 거다.”
선생님이 고개를 주억거린다.
“역시 좋은 말입니다. 한데 무슨 영문으로 이런 말씀들을?”
긁적긁적.
“제가 천자문부터 다시 배워야 될 것 같아서요.”
“···”
“서, 선생님?”
“···”
“저기, 선생님?”
“···”
“서어어어언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