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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12화 (12/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12화>

    그 남자의 이중성, 혹은 본모습

    ***

    “괜찮겠사옵니까?”

    임숭재의 말에 융은 고개를 돌렸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숭재의 얼굴이 확대돼서 보인다.

    “무엇이?”

    “대군마마 말이옵니다.”

    “진성이가 왜?”

    짐짓 모르는 척 하는 융에 숭재는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학문을 갈고 닦는다.

    그래서 그 학문을 바탕으로 벼슬에 오르고 이름을 떨친다.

    훈구든 사림이든··· 심지어는 글 모르는 무지렁이 백성들도 바라마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왕자대군이나 왕자군들이 학문을 닦겠다는 말은 그 의미가 다를 수 밖에 없다.

    왕자대군과 왕자군들은 신분이 족쇄다. 함부로 설쳐도 안 되고, 함부로 입을 뻥끗 해서도 안 된다.

    이건 임금과 아무리 핏줄을 함께 나눈 형제라 해도, 그래서 사적으로 우애가 두텁다 하더라도 해서는 안 되는 짓이다.

    어쨌건 왕위를 위협할 수 있는 자들이니까.

    그래서 역사적으로 대부분의 왕자대군과 왕자군들은 스스로를 낮추어서 지냈다.

    백치 행세를 해서 위기를 모면하는 왕자들도 있었고, 왕에게 설설 기며 목숨을 보장 받는 왕자들도 얼마든 있어왔다.

    그건 진성대군도 다르지 않았었다.

    숭재가 아는 진성대군은, 고금의 역사에 무수한 족적을 남겼으나 또렷한 공적을 남기진 못 한 채 사라져 간 여러 왕자들처럼 군주를 두려워하는 일개 왕자였다.

    그래서 스스로를 낮추고 지냈고, 외척 신수근의 딸에게도 흔쾌히 장가 들었던 것이 아닌가.

    혹시 금상에게 밉보일까 싶어서 말이다.

    가끔 임금이 부르면 그는 넙죽 부복해서 설설 기었고, 임금이 하는 말마다 윤당한 일이라 외쳐대며 비위를 맞췄었다.

    그마저도 임금이 부를 때였지, 안 부를 때면 쥐죽은 듯 지냈던 게 바로 진성대군이었다.

    그런데!

    그런 진성대군이 성격을 바꿔보겠답시고 설치더니 이제는 학문을 닦겠단다.

    진성대군의 바뀐 성격은 나무랄 데가 없었다.

    어딘가 호탕하고 호방하며 일면에선 소탈하기 까지 하니, 어찌보면 대군으로서의 위엄이 전연 없다고 볼 수도 있지만, 또 달리보면 뭇사람들을 아우를 수 있는 성격으로 탈바꿈 했다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과 대군의 신분으로 학문을 닦는다는 말은 별개일 수 밖에 없었다.

    내색을 안 해서 그러지, 숭재는 깜짝 놀랐었다.

    만인이 다 보는 앞에서 공부를 하겠다니······.

    금상의 기분이 썩 안 좋았거나 심병을 앓아 예민해진 때였다면 어떤 불호령이 떨어질 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한데 더 충격적인 건 금상이었다.

    공부하겠다는 진성대군의 말을 가납하는 건 물론 열심히 하라 격려까지 하지 않았던가?

    ‘전하께서는 도대체 무슨 생각이신지······.’

    자신감일까?

    네가 암만 학문을 갈고 닦는다 할지라도 나를 위협 할 순 없다는 그런 자신감 말이다.

    그도 아니라면 진성대군을 과하게 믿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너는 어떠하냐?”

    사색을 이어나가던 때.

    금상이 하문했다.

    “어인 말씀이시온지······.”

    “나는 바뀐 진성이 퍽 마음에 든다. 예전 같았다면 공부를 하겠다느니··· 편육 대신 백숙을 먹겠다느니 하는 말은 감히 하지도 않았겠지.”

    “···”

    “바뀐 진성이 어떠하느냐는 말이다.”

    “신이 어찌 종친을 사사로이 판단 할 수 있겠사옵니까. 전하의 뜻에 따를 뿐이옵나이다.”

    피식.

    소리 내어 웃은 융에 숭재는 움찔 몸을 떨었다.

    한동안 말이 없던 융은 나인이 마실 차를 내어오자, 차를 음미하면서 입을 열었다.

    “네 걱정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기특하지 않은가?”

    “···”

    “윗사람에게 진언하는 것은 설령 그것이 옳은 일이라 해도 어려운 일이다. 하물며 대군의 입장에서 공부를 하겠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진성 아우도 모르진 않을 터. 그런데도 구김살 없이 굴면서 공부를 청하지 않았느냐. 흉계를 마음먹고 있었다면 이리 당당히 굴진 않았겠지.”

    영 찝찝한 마음을 떨치지 못 한 숭재였지만 임금이 믿는다는데 도리가 없었다.

    “소신의 생각이 짧았사옵니다. 송구하옵니다.”

    “그나저나······.”

    융이 자못 거만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남녀궁인 모두가 고개를 조아렸다.

    “진성 아우에게 무엄하다 말을 자른 내관이 누구였던가?”

    말이 안 통하네 어쩌네 하는 진성 아우의 말에 무엄하다 호통친 내관이 하나 있었다.

    그땐 진성 아우가 있어 못 들은 척 넘어갔지만, 당시 융의 기분은 썩 좋지 못 했었다.

    “소, 송구하옵니다, 전하.”

    누군가 부복했다.

    설충이라는 내관이었다.

    융의 입술이 비틀렸다.

    “내 오늘은 가족 간에 친목을 도모하게 되어 한량없이 기쁜 마음이었거늘, 네놈이 그런 나의 마음을 채 헤아리고 있었다면 이런 실수는 하지 않았겠지.”

    “주, 죽여주시옵소서!”

    “어디 대군의 입을 가로 막는단 말이냐?”

    “하, 하오나······.”

    설충의 제지는 내관으로서 아주 적절한 일이었다.

    하지만.

    “저놈에게 태(笞) 60대를 가하고 절도로 유배하여 잘못을 뉘우치게 하라.”

    곧이어 설충이란 내관이 끌려나갔다.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그런 분위기에도 아랑곳 않고 융은 마침 생각난 게 있다는 듯 손가락을 튕겼다.

    “아.”

    “···더 분부 내리실 것이 있으시옵니까?”

    “아까 진성에게 과자를 가져다 주던 아이 말이다.”

    “화, 화금이라는 아이옵니다.”

    “화금이?”

    “그러하옵니다.”

    “어여쁜 이름이구나. 화금이라. 화금이······.”

    화금의 이름을 음미하듯 되뇌는 융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고 있었다.

    ***

    10년이 조금 못 된 지난 을묘년(乙卯年, 1495)에 생원시 장원을 하고 불과 1년 전 쯤 알성시에 급제한 성균관 박사 이장곤(李長坤)은 촉망 받는 신진 관리였다.

    촉망 받는 관리라는 말은 출세길이 보장 되어있다는 말과 진배 없다.

    실제로 동료들은 조만간 그가 홍문관으로 옮겨갈 거라 수군거리고 있었고, 장곤도 앞에서는 아직 부족하다 말했지만 내심은 그런 부러움과 시기 섞인 시선들을 은근히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예? 그게 어인 말씀이십니까?”

    장곤은 두 귀를 의심했다.

    “어전에서 왕자사부(王子師傅)로 자네가 천거되었네.”

    “그게 무슨······.”

    장곤은 진실로 어안이 벙벙했다.

    왕자사부라니?

    그는 성균관 박사에 불과했다.

    대체로 종학관(宗學官)을 겸임하는 건 전적(典籍) 이상의 관리들이다.

    이건 법문에도 명시되어 있는 일이었다.

    “말그대로일세. 종학관을 겸하게 되셨어.”

    “하지만 제가 어찌 왕자사부를 맡는단 말입니까?”

    선배 관리는 쯧쯧 혀를 차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난들 알겠나?”

    “하면 어떤 분을 맡게 되는지는 아십니까?”

    “진성대군이시네.”

    “진성대군이요?”

    “그래. 앞으로는 성균관 대신 어의동 궁방으로 등청하면 되시네.”

    “매일 말입니까?”

    “매일. 종학(宗學)처럼. 뭐, 그래도 대군께서 학문에 얼마나 큰 뜻을 품으셨겠는가? 설렁설렁하시면 될 걸세.”

    “하지만 성균관 일은 어쩌고, 매일 궁방으로 등청을······.”

    예의 선배 관리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검지를 하늘로 쿡쿡 찔러보였다.

    “윗전에서 내려온 분부일세. 거역할 참인가?”

    “그건 아니지만······.”

    “이제와서 하는 말이네만 혹시 자네 윗전에 밉보인 거라도 있나?”

    왕자사부란 게 사실 모 아니면 도 였다.

    잘만 하면 출세길이 보장 될 수 있었지만 자칫 잘못했다가는 여러 구설수에 오를 가능성이 높은 자리였다.

    ‘영 안 내키는구나.’

    뭔가 콕 집어서 말하긴 애매하지만 찝찝한 기분이었다.

    ‘게다가 전하께선 대군마마와 왕래도 거의 없는 편 아니신가.’

    둘은 형제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왕래가 없는 편이었다.

    대군이 잘못되면 그 사부도 덩달아 혐의를 받을 수 있는데, 심지어 대군마마는 전하와 우애가 두텁지도 못 하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소리다.

    그런 분을 종학에서 가르친다면야 기분이 이렇게 찝찝하지도 않겠지만 사궁으로 가서 강론을 하라니······.

    최악의 경우 역적질에 관련한 혐의가 씌워져도 할 말이 궁색해 질 수 밖에 없었다.

    ‘좌천인가.’

    돌아가는 추이.

    그리고 정황을 보면 그게 맞을지도 몰랐다.

    일단 학식 자체는 조정대신들에게 인정을 받았다는 뜻이니 나쁠 건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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