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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11화 (11/365)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11화>

진심으로 대하자

***

‘이런 사람이 회까닥 한 거면 어지간히 큰 일이 있었겠지?’

그게 아니라면 설명이 안 된다.

연산군의 호탕하게 웃는 모습에 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를 케어해야 할 ‘관심병사’ 정도로 분류했었으니까.

‘친구도 없었을 텐데.’

어제의 연산군은 호방한 스타일이긴 했지만 잔 말이 많은 타입은 아니었던 걸로 기억한다. 근데 오늘은 잔 말이 참 많다.

별 것도 아닌 일에 사족을 달고, 이건 어떠니 저건 어떠니 시시껄렁한 말을 자주 하고 있다.

그가 외롭게 살았던 방증이라고 한다면 억측일까?

‘진심으로 대해야겠다.’

나도 모르게 폭군이라는 편견에 두려움반.

그래도 형제인데 뭐 어때, 편함반.

모순적인 감정으로 대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오늘의 연산군을 보니 굳이 두려워 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그를 엇나가게 않게만 하면 대군으로 평생을 탱자탱자 놀 수 있을 텐데, 굳이 두려워하면서 케어할 필요는 없지 않나.

그건 날 진심으로 대하는 연산군을 기만하는 행동 같다.

왕이라는 지위에 달라붙는 사람들도 죄다 어디 콩고물이나 얻어 먹으려 붙어 먹은 사람이 절반은 될 텐데 나까지 그러면, 내가 연산군이어도 미치지 않으리란 보장을 못 하겠다.

“진성 아우님. 어찌 표정이 그리 심각한가?”

사색이 얼굴로 드러난 모양이었다.

나는 애써 환히 웃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전하는 스트레스······.”

“스, 스트레스?”

말실수를 해버렸다.

스트레스를 대처할 단어를 떠올려봤다.

“전하는 심병을 어떻게 다스리십니까?”

“심병?”

“네. 국정을 살피다 보면 이래저래 마음 쓰는 일도 많을 테고, 또 어제 전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사관들은 이런저런 못 볼 꼴까지 기록하니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실 텐데, 그런 건 어떻게 해결하시나··· 하는, 그런 게 갑자기 궁금해져서요.”

“보통은 사냥을 하는 편이지.”

사람마다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은 다르다.

연산군은 활동적인 방법으로 푸는 것 같다.

차라리 이게 더 낫다.

“또 다른 건요?”

“사냥 말고는··· 음, 술 한 잔과 함께 시를 읊으며 푸는 것 같구나.”

“두 개로요?”

“그래. 한데 어인 일로 그런 질문을 하느냐? 혹, 근심거리라도 있는 게냐?”

걱정 어린 표정의 연산군을 보니 다시 한 번 연산군을 ‘관심병사’ 쯤으로 분류한 게 미안해진다.

“아뇨. 그냥 궁금해서요. 심병은 만병의 근원이라고도 하잖아요.”

“그런 말은 또 처음 듣는구나. 하지만 일리가 있는 말이다. 심병이 도지면 정사는 물론이고 사람 구실을 제대로 못 하지. 폭군으로 기록된 이들이 어찌 폭군으로 기록됐겠느냐. 돌아가는 나라의 형국과, 나라 안팎의 우환이 겹쳐 심병을 앓다가 종국에는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 하고 괴물이 됐을 테지.”

“전하께서도 심병은 잘 다스리세요. 근심거리 있으면 사냥도 자주 나가시구요.”

“하하하! 아우님이 날 걱정해주니 이리 든든할 때가 또 없다. 대간이란 작자들은 사냥좀 줄이라 간언하는데, 어찌 듣고 싶은 말만 딱 할꼬?”

사냥을 왜 줄이라고 하는 거지?

왕이 밖에서 싸돌아다니면 위험해서 그런가?

‘하긴.’

대통령이 부재 시에 국무총리가 권한을 대행 할 수 있는 시대도 아니고, 국왕이 잘못되면 나라가 엎어질 지도 모르니까.

그래도 이렇게 건전한 취미 하나 쯤은 갖고 있는 게 정신 건강에 이롭다.

“그렇사옵니다. 대군께서 옳은 말만 하시니 신이 다 기쁘옵니다.”

이 사람은 풍원위 임숭재다.

인싸 곁에는 인싸들이 한가득인 것처럼, 이 친구도 인싸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말하는 것도 그렇고, 호탕하게 웃는 것도 그렇고,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달까?

사람도 참 좋아보인다.

“근데 전하.”

“음?”

“부탁이 하나 있는데 말씀 드려도 될까요?”

“부탁? 우리 진성 아우님 부탁이라면 응당 들어줘야지. 말해보라.”

“민망한데 저희 집에 책이 많이 없습니다.”

“책?”

“논어나 시경이나 그런, 사서오경 같은 책이랄까요.”

“네가 출합(出閤, 왕자들이 궐을 나가 사는 걸 이르는 말)할 때 준 것이 있을 텐데?”

“그렇긴 한데 그걸론 좀 모자른 것 같아서요.”

“허허. 공부라도 할 참이냐?”

“네. 좀 해야 될 것 같습니다.”

라는 내 말에 연산군은 허허 시종 미소를 잃지 않는데 어째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내가 하는 말마다 맞받아치며 웃어주던 숭재 씨도 표정을 굳힌다.

이거 왜 이래?

‘공부한다는 게 그렇게 갑분싸 할 일인가?’

최소한 21세기에선 공부를 시작하겠다는 말을 하면 응원으로 돌아왔었는데······.

“어찌 공부를 다 하려고 하는고?”

역시 내 말을 끝까지 들어주는 건 자상한(?) 연산군 밖에 없다.

“전하와 대화를 하다보면 제가 모자르다는 걸 많이 느낍니다. 뭐랄까··· 말이 안 통해버린다고나 할까요?”

“무, 무엄하십니다, 대군마마.”

내관의 제지에 연산군이 슬쩍 거수한다.

“너는 앞으로 그 입을 조심하는 것이 좋겠다. 어찌 대군의 입을 가로막는단 말이냐?”

“화, 황송하옵니다, 전하.”

“아우님은 계속하시게.”

“제가 느끼는 전하는 공부를 아주 많이 하신 것 같습니다. 뭐라고 해야 될까요. 학식이 남다르다고 할까요?”

연산군이 흐뭇하게 웃는다.

“말하는 것마다 기품이 있고 고상한 말들만 하시는데 안타깝게도 저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를 때가 많았습니다.”

“허어. 내 아우님의 입장을 헤아리지 못 했구나.”

“해서, 전하께서 어떤 말을 하셔도 잘 알아 들으려면 공부를 해야겠다고 느꼈습니다. 근데 집에 있는 책으론 좀 부족할 것 같아서 이렇게 염치불구하고 부탁을 드린 거예요.”

이건 팩트다.

사실 연산군 뿐만이 아니다. 심지어 덕산이가 하는 말도 이해 못 할 때가 많았다. 그럴 때 보면 전생에선 나름 서울권 대학에 다닌 난데, 창피하기 그지 없었다.

얼버무리는 것도 한 두 번이지.

오늘 연산군과 점심을 들면서 다짐을 했다.

공부를 좀 해야겠다고.

그래야 이 시대에도 완전히 적응 할 수 있을 테고 굳이 연산군 뿐만이 아니라 사대부라 부르는 선비들이 하는 말도 잘 알아 먹을 수 있지 않겠나.

서로 똑같은 한국말··· 아, 조선말을 한다고 완전한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는 건 아니니까.

이들의 수준에 맞게끔 내 지식을 향상 시킬 필요가 있어보였다.

내가 연산군한테 이런 부탁을 하는 건, 내가 본 연산군은 빈 말이 아니라 공부 깨나 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국사 교과서에서나 보던 논어나 시경이나 이런 성인들 말을 잘 인용했고, 또 고사에 빗대어 표현하는 게 무척 고상해 보였다.

원래 공부는 잘 하는 놈한테 비법을 전수 받아야 한다.

하다못해 교재라던지, 인강이라던지.

“좋다. 아우님의 청인데 내 어찌 마다하랴? 마침 네 나이가 이제 지학이니 다시 종학(宗學)에 들어 학문을 갈고 닦는 것도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겠도다.”

갑분싸 한 분위기에 연산군이 거절하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이었다.

근데 종학?

앞뒤 문맥을 헤아려보면 뭔가 학교 같은데 설마 진짜 학교?

학교면 이거 나가린데.

“저기··· 전하의 말씀도 아주 일리가 있지만 저는 집에서 혼자 공부하고 싶습니다.”

“종학에 나오지 않고 혼자서 말이냐?”

“네.”

“본시 공부란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거늘 어찌?”

“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제가 아직 철이 없어서 거기 선생님들께 무례를 범할 것 같거든요.”

그냥 둘러댄 말이었는데 나름 일리가 있는 모양인지 연산군이 가볍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기특하도다. 하지만 아쉽구나. 정녕 종학에는 뜻이 없는 것이냐?”

뭘 자꾸 물어?

내가 전생에서 유치원 제외 15년 넘게 학교에 다녔다.

그것도 노동과 학업을 병행하면서.

근데 이번 생에도 학교에 다니라고?

그건 안 되지.

게다가 학교에 다니는 건 어떻게 보면 비효율적이다.

학생이 나만 있는 것도 아닐 테니 진도가 팍팍 나가지도 못 할 거 아닌가?

“뜻이 없다기 보다는 전하께 심려를 끼쳐드리고 싶진 않아서······.”

라고 적당히 둘러대자 연산군이 흐뭇하게 웃는다.

“알았다. 네 뜻이 확고하니 너도 나름 뜻을 세운 바가 있겠지. 다만 선생 하나는 붙여주마.”

“에? 선생이요?”

“글선생 하나 없이 혼자서 어찌 공부를 할 수 있겠느냐?”

아, 그러고 보니 나 한자도 모른다.

알고 있는 한자래봐야 적게는 수십개에서 많아봐야 수백개에 불과할 텐데 이걸론 기껏해야 교재 제목 정도나 읽을 수 있는 수준.

뭐, 학교에 나가는 것도 아니고 과외 비스무리한 것 같으니 이 정돈 괜찮겠지.

학교 다니는 것보단 이게 더 효율적이기도 하고.

“성은이 망극합니다.”

“아우님께 요긴한 책들도 골라 반사 할 터이니 정심하여 학문을 갈고 닦도록 하라.”

“머리가 부서져라 공부하겠습니다!”

“하하하! 머리가 깨지면 쓰나. 건강이 우선이니 건강 잃지 않도록 쉬엄쉬엄 하거라.”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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