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군으로 살어리랏다-10화 (10/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10화>

    호감 얻기 성공

    ***

    “시?”

    융은 진성이 건넨 종잇장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언문으로 쓰여졌지만 분명 시였다.

    “어제 보니 전하께서 시를 사랑하시는 것이 한 눈에 보였습니다.”

    맞다.

    융은 예술을 사랑했다. 뭔가 공허한 마음을 채워주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새가 될 수 없지만 시를 쓰는 순간은 새가 되어 날아다닌다.

    전장의 장수가 될 수 없지만 시를 읽는 순간은 장수가 되어 전장을 누빈다.

    서인(庶人, 서민)이 될 수 없지만 시를 읽고 쓰는 순간은 서인으로 평범히 살아간다.

    “그랬더냐.”

    “네. 그래서 뭔가 어제 사냥도 그렇고 전하께 하도 받은 게 많아서 뭘로 보답을 해드리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시가 좋겠다 싶어서 머리 빠개져라 시상을 떠올리면서 좀 써봤습니··· 아니, 써봤사옵니다.

    머리가 빠개진다.

    생전 듣도 보도 못 한 표현이었다.

    하지만 무슨 의미인지는 알 것 같았다. 간밤에 머리를 쥐어 싸맸을 아우님을 생각하니 절로 너털웃음이 터져나왔다.

    “하하하. 아우님이 성격만 바뀐 게 아니라 입도 바뀌셨구만. 어디 보자······.”

    융은 새삼 시에 눈길을 돌렸다.

    서시라는 제목이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가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아··· 이것이 진성의 성품이로구나.’

    진성은 아우지만 잘 알지 못 했다.

    아니, 사실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서시라는 시에는 진성 아우의 성품이 고스란히 드러나있었다.

    무릇 시란 화자(話者)의 성향과 가치관이 단적으로 드러나기 마련이었다. 더불어서 드러나는 것이 화자가 추구하는 그 ‘어떤’ 것이었다.

    진성 아우는 작은 일에도 자책하는 아이 같았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한다니······.’

    틀에 얽매인 시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 말이 융의 가슴을 찌르르- 전율시키는 것 같았다.

    제아무리 예쁜 꽃도 봄이 지나고 나면 시든다.

    그건 사람이라 할지라도 다르지 않다.

    순간, 순간을 사랑하겠다는 마음이 돋보이는 구절이었다.

    ‘다만······.’

    눈에 거슬리는 게 하나 있었다.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융은 환히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어때요?”

    “좋구나. 다만 궁금한 게 있구나.”

    “네, 물어보세요.”

    “여기서 나온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는 것은 우리 진성 아우님에게 무슨 의미인고?”

    “예? 당연히 전하를 잘 보필한다는 뜻이죠.”

    천진난만한 표정.

    그렇기에 융은 더 궁금해졌다.

    “날 보필한다?”

    저 때묻지 않은 아이가, 심성이 여린 저 아이가 어찌 자신을 보필한단 뜻일까.

    궁금증은 오래지 않아 풀렸다.

    “네. 가족이 뭐겠습니까. 힘들 때 같이 울어주고, 슬플 때 위로해주고, 기쁠 땐 같이 기뻐하고, 그런 게 가족이죠. 근데 전하를 보면 어딘가 외로우신 것 같습니다.”

    왠지 허를 찔리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오히려 뭔가 위로 받는 느낌이었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 한 나의 마음.

    어쩌면 털어놓고 싶었던 나의 마음.

    그걸 다른 사람도 아닌 ‘가족’이 먼저 알아줌이, 그래서 그 자체가 위로받는 느낌이었다.

    “가족이라··· 그래. 우린 가족이지. 동복이 아니라는 것이 무에 흠이겠는고?”

    “그럼요.”

    마음 한구석이 푸근하다.

    예전의 진성이 이랬다면 훨씬 더 잘 대해줄 수 있었을 텐데.

    살갑게 말이다.

    냉랭하게 대했던 과거가 떠올라 한없이 진성에게 미안해졌다.

    융은 그 미안함을 억누르고 다른 시도 펼쳤다.

    이번엔 진달래꽃이라는 제목의 시였다.

    “아, 그건 연시에요.”

    “연시. 아우님은 연시를 좋아하는 모양이로다.”

    “좋아한다기 보단 그런 감성이 솟구친달까요?”

    “하하하. 하긴. 네 나이 때가 으레 그렇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오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밞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융은 흡족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기생인가.’

    배경 설명이 없어서 정확하진 않았지만 왠지 융은 기생이 떠올랐다.

    부임지에 있는 수령들은 정을 통하는 애인을 한 둘 씩 두기 마련이었다.

    수령들에게는 아무렇지 않게 스쳐지나가는 인연일지 몰라도, 그 인연이 기생들에게는 제법 뜻깊은 인연으로 남기 마련이었다.

    이제 부임을 마치고 돌아가는, 함께 가고 싶지만 기생 신분으로 따라 갈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함과 동시에 이별을 체념하는 기생의 모습이 그려진다.

    동시에 마침내 부임지를 떠나는 수령이 잘 되길 바라는 기생의 모습이 그려졌다.

    “너의 시는 때론 천박한 구석이 있고, 너무 적나라한지라 그것이 민망할 때가 있지만 가슴을 아리게 만드는 것이 있다. 참으로 좋은 재주다.”

    “감사합니다.”

    꾸벅 고개를 조아리는 진성에 융은 다시 한 번 미소지었다.

    꼬르륵-.

    진성 아우의 배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아침을 아니 들었느냐?”

    “아, 궐에 간다고 먹다 말았거든요.”

    “이런··· 그럼 낮 것도 아니 들었겠구나.”

    “낮 것···이요?”

    “그래. 편육은 어떠하냐?”

    “아, 점심요. 근데 저 편육은 못 먹는데요.”

    융의 얼굴에 당혹함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는 거절을 당해본 일이 많지 않았다.

    “대, 대군마마.”

    황망한 마음이었는지 상선이 화들짝 놀라 대군을 타일렀다.

    당혹스러운 건 융도 마찬가지였지만 오히려 신선했다.

    저번에도 느꼈지만 진성 아우는 사람을 늘 신선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았다.

    거절이라······.

    “됐다. 상선은 너무 개념치 말라. 한데 어찌 편육은 못 드느냐?”

    “제가 입이 짧은데 노린내가 좀만 나도 못 먹거든요. 편육은 잘못 삶으면 이 노린내랑 비릿한 냄새가 나서······.”

    과연 진성 아우다운 답변인 것 같아 저도 모르게 허허 웃음이 났다.

    “하면 뭐가 좋을꼬. 뭐가 좋겠느냐?”

    “백숙 먹고 싶은데 백숙 괜찮을까요?”

    “백숙?”

    “네. 가마솥에 푹 고아서 소금에 똑! 찍어 먹으면··· 꿀꺽.”

    “하하하! 아우님이 어지간히 백숙을 먹고 싶었던 모양이다. 상선은 수라간 숙수들에게 낮 것으로 백숙을 대령하라 이르라. 낮 것은 경회루에서 들겠다.”

    “그리 하겠나이다.”

    “아, 상선.”

    “하문하소서.”

    “풍원위도 부르라.”

    “알겠사옵니다.”

    총총걸음으로 물러나는 상선을 신기한 듯 바라보는 진성 아우에 융은 푸근히 미소지었다.

    오늘은 왠지 즐겁다.

    내일도 왠지 즐거울 것 같았다.

    ***

    ‘이 녀석 볼맨데?’

    난 연산군을 보면 볼수록 왜 폭군이라 불렸는지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참 재밌고 화끈한 사람인데······.

    “하하하하! 내 진성 아우가 이리 재밌는 줄은 미처 몰랐다. 내 자주 궐에 불러야겠구나.”

    내 아재 개그에 빵빵 터지는 연산군을 보니 측은지심이 인다.

    왠지 전생의 나와 오버랩되는 것 같았다.

    전생의 난 힘들게 살았던 건 사실이지만 외로운 삶을 살진 않았었다

    고아는 어딘가 음침하고 외롭다는 느낌은 미디어가 만든 편견에 불과했다.

    난 어딜가든 친구가 많은 편이었다.

    초등학교 때는 고아라고 왕따를 당한 적이 한 번 있긴 했지만 그건 내가 고아라 그렇다기 보다는, 나 스스로 고아라는 열등감에 나를 친구들 사이에서 고립시켰기 때문에 빚어진 일이었다.

    그런 내가 바뀐 건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어린 나이였지만 신학기를 앞두고 이대로는 안 될 거라 여겼고 성격을 좀 바꿨었다.

    친구가 점점 많아졌다.

    친구들을 살뜰히 살피는 학생 회장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분위기 메이커 정도는 되었다.

    대학에서도 외롭지는 않았다.

    그냥 고단한 삶이 힘들었을 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구석엔 공허한, 그 어떤 것이 남아 있었다. 나이가 들수록 그 공허함은 커졌다. 어쩌면 그래서 유흥에 빠졌는지도 모르겠지만 난 그 공허함을 연산군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뭐, 내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난 그렇게 느꼈다.

    ‘이런 사람이 회까닥 한 거면 어지간히 큰 일이 있었겠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