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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9화 (9/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9화>

    다시 연산군을 만나다

    ***

    “내외가 함께하는 모습을 보니 참으로 흐뭇합니다.”

    이 아줌마가 중전?

    미인상은 아니다. 뭔가 후덕한 게 인심은 푸근해보이지만.

    아, 내가 연산군 안 보러 가고 내 아내 되시는 분과 함께 중궁전을 온 건 연산군이 경연 중이기 때문이었다.

    경연청 관리는 고리타분했다.

    잠깐이면 된다니까, 그것도 안 된다면서 이따 오라고 날 돌려보냈다.

    이름은 잘 외워뒀다.

    분명히 김언평(金彦平)이라고 했다.

    나중에 트집 잡을 일 생기면 무조건 잡을 거다.

    “한데 대군은 어인 일로 궐을 다 찾았습니까?”

    “저요?”

    좀 되바라지게 물었나.

    저요?

    라는 말에 중전이 당혹스러워하는 표정이다.

    “주상 전하를 좀 뵈러 왔습니다.”

    “전하를요? 청탁이 있어서 오셨군요.”

    청탁?

    부탁 말이지?

    “아뇨. 따로 부탁할 건 없고 이것좀 바치러요.”

    조선시대 도포들은 다 불편한 데 이거 하나 만큼은 좋았다.

    어지간한 짐들은 가방이 필요가 없었다.

    통이 널널한 소매에 다 들어가거든.

    소매에서 빼낸 건 내가 쓴 시들이었다.

    “대군께서 시도 쓰셨습니까?”

    “네.”

    “한 번 읽어봐도 되겠습니까?”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읽어 보라는 뜻의 제스쳐였는데, 아차 싶었다.

    여긴 조선이다. 이런 제스쳐가 흔치 않은 조선.

    무슨 의미인지 후덕한 인상의 중전께서 고개를 갸웃거리고 계신다.

    “읽어도 되요.”

    “고맙습니다. 잘 읽어보겠습니다.”

    드라마 《대장금》처럼 가채를 쓴 궁녀가 내 시를 중전에게 갖다 바쳤다. 나한테도 시를 보여줘서 고맙다고 한 중전은, 내 시를 갖다 바친 궁녀에게도 일일이 고맙다고 말하며 내 시를 펼쳤다.

    중전의 입장에서 당연하다시피 시중 드는 사람들한테도 일일이 감사함을 표현하는 걸 보니 본성은 착한 것 같았다.

    “언문?”

    나는 당연하다시피 고개를 끄덕거렸다.

    한자를 모르니 한글로라도 써야지.

    아, 여기 언문은 대학에서 배웠다.

    전공선택 과목 중에서 《우리 국어의 변천과 쓰임》이라는 과목이 있었거든. 당시에는 따분하고 지루하기만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잘 배워둔 것 같기도?

    그래도 까먹거나, 잘 모르는 부분은 덕산이한테 배웠다.

    난 노비라서 덕산이가 글을 모를 줄 알았는데 언문은 또 알고 있지 뭔가.

    아무튼.

    “네. 안 되나요?”

    “아, 안 될 까닭이 있겠습니까?”

    중전 마마는 내가 쓴··· 아니지, 쓰기는 윤동주가 썼지만 써먹기는 내가 써먹은 《서시》를 흐뭇한 표정으로 읽어나갔다.

    “궁금한 게 있는데 이 시에서 말하는,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는 무슨 의미입니까?”

    지금껏 흐뭇하게만 읽으시던 중전께서 뭔가 심각한 표정이시다.

    하긴 읽기에 따라서는 뭔가 구리게 느껴질 만한 부분이다.

    “당연히 전하를 보필하는 걸 말하죠.”

    얼굴색 하나 안 바꾸고 말하니 금세 수긍을 하신다.

    “아··· 그렇군요.”

    중전께서 다음 시를 펼쳐들었다.

    다음 시는 노천명의 《사슴》이다. 노천명의 개인적인 친일 문제와는 별개로 시 만큼은 대단하다는 평을 받는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이 노천명의 사슴에는 시대를 아우르는 뭔가 가슴 찡- 한 그런 게 있거든.

    뭐랄까.

    386세대든 삼포세대든··· 더 나아가 4564세대든.

    어떤 세대든 세대적 과제가 존재했다.

    4564세대는 역사적 부침과 어려운 경제적 상황에 대한 과제가 있었고, 386세대는 서슬퍼런 군사독재 시절, 어두운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도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완전한 민주주의를 위한다는 사회적 과제가 있었다.

    삼포세대는 윗세대들이 이룩한 것들을 누리며 살았지만,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너무 높은 부동산의 벽, 취직의 벽, 여러 사회적인 벽에 부딪혀 그걸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해야 하는 과제가 주어졌다.

    어느 세대가 더 힘들고, 어떤 세대가 더 쉽게 시대를 보냈는지를 논하는 게 아니다.

    그저, 이 노천명의 사슴은 세대간의 갈등을 넘어서, 어떤 세대에게라도 가슴 찡한 느낌을 준다는 뜻이다.

    모가지가 길어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 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본다

    나는 괜히 중전 눈치를 살폈다.

    솔직히 눈치 볼 것도 없는데 연산군 마누라라고 하니 편견 같은 게 생긴 것 같다. 뭐, 연산군이 폭군이라고 그 마누라 되시는 분도 똑같다는 법은 없지만······.

    “보여주신 시들에 나오는 가사(佳詞)가 하나, 하나 아름다운 듯 합니다. 한데 구성이 뭔가 희한한 듯 한데 요즘 민가에서 유행하는 시조입니까?”

    “그럴 리가요.”

    “하면······.”

    “우리 나라의 시조란 게 다 거기서 거기잖아요. 오언절구에 칠언절구··· 고풍시(古風詩), 다들 틀에 박혀 있잖습니까?”

    “틀을 깨셨다는 말씀입니까?”

    “틀을 깼다고 하긴 뭐하고 자유시랄까요.”

    “자유시?”

    “제 마음 내키는 대로 써봤다는 뜻입니다.”

    “틀에 얽매이지 않고 마음 내키는 대로 쓴다··· 하면 언문도 그런 연유에서?”

    “그렇죠.”

    내심 감탄한 듯 중전이 고개를 끄덕거린다.

    “아주 좋은 시조인 듯 합니다. 하지만 이 사슴이란 시는 불민하다고 책 잡힐 수 있으니 전하께는 바치지 않는 게 좋을 듯 합니다.”

    “이게요?”

    사슴이?

    노천명의 그 사슴이?

    이게 어떻게 불온하단 말인가.

    “대군의 저의는 그게 아니겠지만 받아들이는 사람 입장에서는 달리 해석할 여지가 있는 시 같습니다.”

    아무래도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본다’라는 구절 때문인 것 같다.

    새삼 내가 대군이란 점이 확 와닿았다.

    꼭, 이룰 수 없는 꿈, 즉 왕위에 한탄하는 구절 같잖나. 확실히 듣고보니 중전 말씀이 일리가 있다.

    “그렇겠네요. 감사합니다.”

    꾸벅 고개를 조아리자 중전께서 흐뭇히 웃는다.

    그때였다.

    “대군마마. 전하께서 불러계시옵니다.”

    경연청 관리 김언평씨에게 언질을 줬었다. 경연 끝나는 대로 전하한테 말씀좀 드려달라고.

    경연이 그새 끝난 모양이다.

    나는 헐레벌떡 중전에게 시를 받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중전마마. 그럼 저 가보겠습니다.”

    “예? 아, 예.”

    “안녕히계세요.”

    초딩때 이후로 해 본 적 없던 배꼽 인사를 할까 말까 하다가 결국 하고 왔다.

    여긴 예법에 충실한 조선이니까.

    ***

    현호가 나간 중궁전.

    중궁은 얼이 나간 표정으로 아직 활짝 열려있는 문을 바라보았다.

    “어째 희한하구나?”

    “마마께서도 그리 느끼시어요?”

    중궁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람이 뭔가 바뀐 듯 하구나.”

    “노복들도 그거 때문에 말들이 많었어요.”

    “그래? 촐랑거리는 것이 꼭 철없는 민가의 아이들 같기도 하고··· 살갑게 구는 것은 또 노회한 듯 하니 내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언제부터 저랬느냐?”

    “석 달 쯤 됐습니다.”

    “석 달 씩이나?”

    “네.”

    “내게 언질을 하지 않고?”

    “어찌 마마께 심려를 끼쳐 드릴 수 있겠어요. 게다가 바뀌었다곤 해도 사람은 그대로인 걸요.”

    “하긴··· 대군의 나이 때가 그런 때긴 하지.”

    “게다가 전 바뀐 게 더 좋은 걸요?”

    “여울이 넌 그러하냐?”

    여울의 볼가가 발그레졌다.

    “···네.”

    “허허. 어찌?”

    “거리감이 안 느껴져서······.”

    중전은 후덕한 인상처럼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네가 그렇다면 다행한 일이다.”

    뭔가 민망했지만 여울은 정말로 바뀐 대군이 더 좋은 것 같았다.

    한 편 그 시각.

    ***

    “전하, 진성대군 드셨사옵니다.”

    “들라하라.”

    “드시랍니다.”

    나도 들었거든요?

    귀 먹은 것도 아니라 일일이 전해 줄 필요는 없는데 말이다.

    아, 이게 궁중의 법도라는 것인가?

    그렇다면 괜히 마음이 무거워지는 걸.

    드르륵-

    손하나 까딱 안 해도 됐다. 내시가 눈짓하자 궁녀가 반사적으로 문을 열었다. 이 궁녀들 뭐하는 사람들인지 드라마《대장금》에서 봤다.

    지밀나인이라고 불렀던 것 같은데··· 맞나?

    “진성 아우 오셨는가.”

    안으로 들어가자 환하게 웃으며 날 반겨주는 연산군과 별 거 없어 보이는 왕의 침실이 눈에 들어온다.

    드라마나 영화 같은 데서 보면 왕은 입식 생활 하는 것처럼 보이던데 드라마는 드라마다.

    “앉으시게.”

    자리를 권하는 연산군.

    뒤에 있는 병풍은 뭐지?

    저게 말로만 듣던 일월오봉도인가?

    “어인 일로 아우님께서 친히 궐까지 행차하셨는가?”

    연산군의 말에 나는 병풍에 대한 생각은 고이 접어두었다.

    지금은 저 병풍 때문에 온 게 아니잖나.

    “이거를 좀 드리려고······.”

    앞전처럼 시를 소매에서 꺼내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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