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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8화 (8/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8화>

    모가지가 길어 슬픈 짐승이여

    ***

    아침이 밝자마자 소반을 받았다.

    “이래서 대군으로 살아야 돼.”

    7첩 반상이었다.

    한정식 집에 가면 인당 최소 5만원씩은 주고 먹어야 할 그런 밥상.

    진성대군이 된 뒤로 나는 이걸 만날 먹는다.

    편의점 폐기 음식이나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웠던 이현호의 삶과 비교하면 정말 대단한 사치다.

    그땐 어쩌다 한 번 삼겹살 사다 먹는 것도 벌벌 떨고, 고민 끝에 마트에서 찌질하게 한 두 덩이 사다가 구워먹는 게 외식의 전부였는데 말이다.

    여기선 내가 먹고 싶은 건 다 먹을 수 있다.

    사실 이 7첩 반상도 내 반찬 투정으로 3첩에서 7첩으로 늘어난 것이기도 하다.

    “점심은 백숙 먹어야지.”

    토종닭의 쫄깃한 식감.

    닭다리 푹 찢어서 소금에 콕 찍어 먹으면··· 크! 천하진미가 따로 없지.

    닭을 삶으면서 우러나온 구수한 국물은 또 어떻고?

    녹두 좀 넣고 푹 끓여서 닭죽 해먹으면······.

    “아, 그만 생각해야지. 입에 침 고인다.”

    밥상을 앞에 두고도 입에 침이 고인다.

    나는 서둘러 숟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고봉밥처럼 높다랗게 올라간 밥을 푹- 떠서 입에 집어 넣었다. 다 좋은데 쌀맛이 그닥 좋지 않은 게 흠이다.

    우걱우걱.

    “연산군이랑은 어떻게 친해지지?”

    밥을 먹으면서 전날 고민한 일을 떠올렸다.

    연산군 케어 프로젝트.

    맨 땅에 헤딩 할 순 없었다.

    어제 나를 본 연산군은 내 성격에 의문을 가진 적이 많았다.

    첫만남 때도 그랬지만 술을 먹을 때도, 내가 활을 잡을 때도, 심지어 측간좀 다녀오겠다는 소리를 할 때도, 그때마다 허허 웃으면서,

    “아우님 성격이 정말 많이 변했구만.”

    칭찬인지 독설인지 모를 말들을 늘어놨었다.

    어제 집에 돌아오는 길에 덕산이에게도 물어봤더니 어제의 일은 확실히 이례적이라고 했다.

    연산군이 사냥 같은 건 많이 해도 종친들은 잘 부르지 않는다나?

    이 말과 연산군의 반응으로 유추해본다면 연산군과 난 같은 핏줄이긴 하지만 그다지 친하지 않았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그러니 막무가내로 궐에 찾아가서 연산군을 케어 해 줄 순 없고······.”

    이건 연산군 입장에서도 존나 뜬금 없을 걸?

    당연히 어제의 일로 바뀐 나한테 호감을 좀 가진 것 같으니 물리진 않겠지만 그것과 뜬금 없는 건 별개인 게 사실이다.

    궐에 찾아 갈 명분을 만들어야 했다.

    “이거 명분이 없다 아입니꺼~ 명분이!”

    《범죄와의 전쟁》에서 형배가 한 명대사를 따라한 나는 킥킥 웃었다.

    “그나저나 명분이라······.”

    아무래도 궐에 찾아가서 인사를 드릴 정도면 보통 명분 가지고는 안 될 것 같다.

    뭐, 연산군 몸에 이상이 생겼다거나··· 나라에 우환이 생겼다거나, 정 그것도 아니면 왕도 갖지 못 한 물건들을 바치러 간다던가.

    “물건이라.”

    어제 본 연산군은 좀 호리호리한 체형이긴 해도 활동적인지라 크게 갑자기 훅- 갈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

    나라의 우환도 마찬가지였다. 나라에 우환이 있다면 어제처럼 발발 싸돌아다니면서 사냥 하진 않았겠지.

    내가 연산군을 만나러 입궐할 명분은 물건 밖에 없다.

    “연산군이 갖지 못 한 물건이라··· 뭐가 좋을까.”

    나는 황급히 방안을 훑었다.

    문갑.

    책꽃이.

    책.

    문방구.

    도자기.

    이런 걸 갖다 바치면서 만남을 청할 순 없다.

    “시?”

    음, 그건 좀 아닌 것 같다.

    연산군이 내 시에 호의를 가진 건 사실이지만 시 하나 써서 갖다 바치기엔 내가 너무 초라해지는······.

    “아니지, 따지고 보면 초라해질 것도 없지?”

    생물학적으로 같은 핏줄을 타고 났는데 뭐가 초라해?

    드라마 같은 데서 보면 동생이 형네집 빈손으로 잘도 찾아가더구만.

    “그럼 무슨 시를······.”

    밥 한 술 푹 떠서 입에 넣고 내가 기억하는 시들을 떠올렸다.

    너무 많아서 오히려 고민이 된다.

    “윤동주 서시랑, 김소월 진달래꽃이랑··· 아! 노천명 사슴. 그리고······.”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만큼 기억 속의 시들을 끄집어내던 그때였다.

    “대감마님.”

    늙수그레한 음성.

    이건 질동 할아버지 목소리다.

    “네, 할아버지.”

    방문을 열자 질동 할아버지가 보인다.

    질동 할아버지는 황망한 듯 고개를 조아렸다.

    “안방마님께서 출타를 하고 오신답니다요.”

    “그래요? 어디요?”

    “중전마마께서 불러 계신지라 찬을 조금 싸서 입궐을 하신다고 합니다요.”

    “엥? 중전마마께서요?”

    “예.”

    “그럼 나도 같이 따라 간다고 좀 전해줄래요?”

    “대, 대감께서도 말입니까요?”

    “안 돼요? 나도 전하 뵐 일 있는데.”

    “그건 아니지만서두··· 아, 알겠습니다요.”

    “네! 옷 갈아입고 금방 나갈거니까 좀만 기다려달라고 해줘요!”

    어리둥절해 하는 질동 할아버지를 뒤로 한 나는 밥상을 물리고 옷부터 갈아 입었다.

    “아, 문방구.”

    이걸 챙겨가야 시를 지어 올릴 수 있다.

    ***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오자 장옷을 가볍게 둘러쓴 내 아내 되시는 분이 보인다.

    사실 아내라지만 그다지 친하진 않다.

    알다시피 여기 온 뒤로 내가 좀 경황이 없었나?

    목 매달면 다시 돌아갈까 싶어 극단적인 선택까지 진지하게 고민했을 만큼 주변을 둘러볼 정신이 없었다.

    아내라고 해도 3개월을 통 틀어서 딱 여섯 번 봤다.

    “여! 부인!”

    사실 내가 무슨 친화력 개오지는 인싸도 아니고 딱 여섯 번 본 아내와는 친할래야 친할 수가 없었다. 그 여섯 번 중에 세 번도 사실 스쳐지나가는 게 전부라고 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어색하게 대하면 더 어색해질 뿐이다.

    명색이 부인이라는데··· 이혼을 할 거면 몰라도 본의 아니게 평생을 같이 살 부인과 평생을 어색하게 지낼 순 없지 않겠나.

    거기다 몇 번 마주친 부인 성격은 소심의 극치다.

    지금도 보시라.

    “···예.”

    수줍게 답하고 말 뿐이다.

    근데 나까지 소심하게 굴면, 이 조합은 대통령도 구제 못 하는 조합이 될지 모른다.

    “부인은 오늘도 예쁘네요?”

    이건 립서비스가 아니다.

    굳이 단점을 꼽자면 키 큰 여자를 좋아하는 나라서, 키가 좀 작은 게 흠이긴 하지만 예쁘긴 무지 예쁘다.

    내가 철없이 살던 때가 좀 있었다.

    뭐, 지금도 철이 없는 것 같긴 하지만 어쨌든.

    정확히 20~22살 때 까지 없는 형편에도 민택이 자식 때문에 한참 유흥에 빠져 지냈었다.

    주말마다 클럽을 갔고 감주를 갔으며 헌팅 술집을 찾았다.

    이유?

    당연히 물 빼러 갔지.

    그 기간 동안 골백번 조인했고 골백번 홈런을 쳤었다. 근데 이런 말 하긴 좀 없어 보이지만, 부인 와꾸가 전 여자친구를 통틀어, 원나잇 상대들을 통틀어 상위 2%의 와꾸였다.

    굳이 1%가 아니라 2%인 건 키 때문이다.

    저 키도 현대에서 태어났다면 힐로 보완이 됐을 텐데 하는 아쉬움은 잠시 접어두자.

    ‘그땐 참 재밌었지.’

    나도 모르게 회상에 젖고 말았다.

    그땐 참, 어떻게 밤새도록 술마시고 거사까지 치렀는지 모르겠다. 그러고도 다음 날은 멀쩡히 과제하고 알바까지 뛰고.

    이현호가 체력 하난 참 대단했어?

    회상을 끝마치고 발그레 홍조 띤 부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어깨에 손을 올렸다.

    뭐, 이미 내 부인인데 어떻게 해보려는 게 아니라 어깨에 손 올리기는 제삼자에게 우리의 친화도를 나타내는 척도 아니겠나.

    움찔.

    “근데 이건 뭡니까? 질동 할아버지 말로는 찬을 좀 쌌다던데, 이게 그 찬?”

    “중전 마마께오서 지짐과 장국을 드시고 싶다 하셔서······.”

    아, 어쩐지 오늘 내 아침 밥상에 전이 올라왔더라니.

    “아··· 근데 부인은 중전님과 친해요?”

    “중전··· 님이요?”

    아차!

    말실수 했다.

    “중전마마요, 중전마마.”

    “그야··· 같은 집안 사람이고, 마마께오서도 절 아껴주시니 감사한 마음에······.”

    같은 집안 사람?

    뜻밖인 걸.

    명문가란 소린 들었는데 왕비도 배출한 집안의 따님이었구나.

    “뭐, 갑시다.”

    “어딜······.”

    “어디긴 궁이지. 나도 전하께 볼 일이 좀 있거든요. 겸사겸사 같이 가면 되겠네.”

    앞장서서 휘적휘적 걷던 나는 뒤에서 인기척이 들려오지 않자 고개를 돌렸다.

    “안 가요?”

    내 말에 얼빠진 부인이 쪼르르 달려온다.

    “아,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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