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군으로 살어리랏다 7화>
연산군 케어 프로젝트!
***
“아, 씨발! 씨이이이이이발!”
오늘 하루도 참 보람차게 보냈다.
이런 여유가 맨날 이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이부자리에 눕는데 머릿속을 번쩍! 하고 지나가는 게 있었다.
왜, 다들 그런 적 있지 않나.
아무 생각없이 잠자리에 눕거나, 운전을 하고 있거나, 수업 시간에 멍을 때리고 있는데 아주 뜬금없이 중요한 일이 갑자기 뇌리를 번뜩! 하고 지나가는 거.
지금 내가 그렇다.
이부자리에 누웠는데 아주 중요한 사실이 갑자기 떠올랐다.
“내가 연산군 동생······.”
오늘 드디어 내 형님이 누군지 덕산이를 통해 유추 할 수 있게 되었다.
연산군.
내가 연산군을 형님이라고 불러야 되는 위치니 당연히 난 아우다. 근데 내 군호가 뭔가?
진성대군이다.
말했다시피 대군과 군의 차이를 모르지 않는다.
대군은 적자.
군은 서자.
난 적자란 말씀.
자, 그럼 한 가지 공식이 성립한다.
적자 + 연산군 동생 + 진성대군 = ?
답?
“씨발, 내가 중종이라니!”
중종.
내가 중종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아니, 말이 돼?
세종대왕, 정조대왕 치세로 안 온 것도 억울해 뒤지시겠는데 하필 중종이라니?
난 재벌집 차남이 아니라 막둥이가 되고 싶었을 뿐이다.
그래서, 권력 다툼 혹은 회사 경영은 형들에게 맡기고 탱자탱자 놀고 싶었을 뿐이란 말이다.
퀴블러로스가 말하는 죽음에 임박한 환자들에 해당하는 심리학적 반응에서의 수용을 거칠 수가 있었던 이유도 그 때문이다.
재벌집 막내아들과 비슷한 위치니까.
근데, 근데 중종이면 이거 족보 꼬이는 일이다.
중종반정!
일단 연산군을 치는 건 둘째치고 왕으로 평생을 살아야 한다.
“씨발, 진짜······.”
이래선 안 된다. 이건 형평성에 어긋나는 일이다.
21세기에서는 주옥 같은 삶을 살았으니 16세기에서나마 평온한 삶을 사나 싶었다. 그런데 16세기에서도 파란만장한 삶을 살게 되면, 이게 형평성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면 뭐야?
엉?!
“하, 진짜······.”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울고 싶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 울고 싶었다.
하필 중종이 되는 진성대군이란 게 말이 되나?
이왕 보내줄 거면 세종대왕이나 정조대왕 치세로 안 온 거?
그래, 백번 양보해서 이해한다 치자.
근데 중종은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아니, 다른 대군이나 군도 많잖은가?
그것도 아니면 차라리 선조가 되게 해주던가.
그럼 미리 임진왜란을 대비해가지고 생색이라도 낼 수 있지.
그게 아니어도 이순신이나 유성룡이나 나 수능 때 빡치게 만들었던 정철 씨나, 또 광해군이나, 그리고 율곡 이이나 퇴계 이황이나, 뭐 그런 사람들을 실물로 볼 수나 있지.
근데 중종이라고?
얼떨결에 추대돼서 왕 된 중종?
중종?!
중조오오옹!
“엿같다, 진짜.”
엿같은 마음에 이부자리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천장에 영화 《간신》에서 보았던 연산군의 잔인한 모습이 스크린처럼 펼쳐지는 것 같다.
이불을 발로 차면서 한참 발악을 하다 보니 내 풀에 내가 지쳐버렸다.
정막이 찾아왔다.
그 정막에 스르르- 잠에 들려고 할 무렵.
뇌리를 번뜩! 하고 스쳐 지나가는 게 있었다.
“잠깐만. 역사를 바꾸면 되는 거잖아?”
그래, 그게 있었다.
역사를 바꾸면 된다. 오늘 사냥에서 본 연산군은 폭군 이미지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미남자였고 호탕한 사람이었다.
말했다시피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싸 스타일이랄까?
그 말은 즉슨 아직 연산군이 회까닥 하기 전이란 뜻일 것이었다.
국사 시간에도 그렇게 배운 기억이 난다.
연산군은 초중반에는 그럭저럭 괜찮은 군주였지만 나중에 회까닥 해버린다고.
아직 회까닥 하기 전이라면 회까닥 할 일을 안 만들면 되지 않을까?
“솔직히 왕 노릇 한다고 개빡치는 일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을 테고.”
나는 벌떡 일어나서 내가 왕이라면 이라는 전제로 상상의 나래를 펼쳐봤다.
짜증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 같았다.
사극을 보면 왕들은 왕이 맞나 하는 의구심을 갖을 때가 많았다.
뭐만 하면 신하들이 통촉하여주시옵소서, 해댔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어 보였다.
역알못이라 잘 모르겠지만 연산군은 그래서 회까닥 하지 않았을까?
사람이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면 우울증이나 공황장애가 오기 마련.
연산군도 마찬가지였겠지, 공황장애로 인한 무의식 속의 방어심리가 폭정으로 변질 된 걸지도 몰랐다.
또, 외로웠을 거다.
지금 나만 해도 그렇다.
무슨 말이냐고?
이 진성대군이란 놈은 친구가 하나도 없다. 있다면 덕산이 정도?
덕산이는 이 몸뚱아리의 주인이 깨복장이일 때 궐에서 함께 자랐다고 들었다. 근데 그런 덕산이도 엄밀히 말하면 친구는 아니었다.
막 진성대군이 됐을 때보다는 조금 덜해졌지만 여전히 내 눈치를 살피고 날 두려워하는 기색이 있다.
하물며 연산군은 왕이다. 무서워하는 사람들은 둘째치고, 친해지려는 사람도 뭐 하나 콩고물 안 떨어지나 붙어 먹던 사람들이었으니 인간의 본성에 대해 어떤 혐오가 쌓인 게 아닐까?
그래서 회까닥 해버린 뒤로 여자를 가까이한 건지 모른다.
“제법 그럴싸한 이론인 걸?”
내가 생각했지만 그럴싸하다.
자, 그럼 중종반정이 안 일어나게 연산군이 계속 사람 새끼로 있을 수 있게 하려면 내가 할 일은 뭐냐.
“연산군이 스트레스 안 받게 해주는 거랑 외롭지 않게 같이 놀아주는 거?”
그래, 이거다.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라고 했다. 내 이론이 맞다면 이 스트레스로 말미암아, 그리고 외로움으로 말미암아 연산군은 정신줄을 놔버리고 폭군이 된다.
그럼 기껏 대군으로 탱자탱자 잘 먹고 잘 살아보세 마음 먹었던 난 중종이 돼서 왕노릇을 해야 된다.
막중한 책임감과 함께.
그걸 막기 위해선 연산군이 스트레스 안 받게 도와주고, 외롭지 않게 같이 놀아주는 방법 밖엔 없다.
이름하여 연산군 케어 프로젝트!
프로그램을 어떻게 짤 지는 차차 생각을 좀 해봐야겠다.
일단은 잠 좀 자고.
“크르러러렁!”
***
다그닥 다그닥.
임금의 행차는 간소했다.
왕을 시위하는 군사들과 문무관 십수명이 보조할 따름이었다.
앞서 말을 몰고 나가던 이융(李㦕)이 별안간 피식 웃으며 말머리를 멈춰세웠다.
그러자 행렬이 우두커니 멈춰선다.
“풍원위(豊原尉).”
융이 고개를 돌리며 말머리를 나란히 하던 사내를 불렀다.
“예, 전하.”
“진성이 많이 바뀐 듯 하다. 너는 어떠 하였느냐?”
“신도 그리 느꼈나이다.”
사내, 임숭재의 답변에 융은 고개를 짤막하게 끄덕거리며 말허리를 가볍게 걷어찼다.
행렬이 다시금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이전의 진성은 낯가림이 심한데다 날 두려워하는 기색이었는데 오늘은 달랐다.”
“예. 다른 건 둘째치더라도 전하께서 내리신 어사주를 많이 잡수셨다면서 만인이 보는 앞에서 반려하지를 않나··· 전하의 활이 더 좋아보인다며 바꾸자는 말을 하시질 않나··· 확실히 평소와는 다르셨사옵니다.”
융은 턱을 어루만졌다.
“내 마지막으로 진성이를 부른 게 언제였었지?”
“넉 달 전 아차산에 행차하셨을 때셨사옵니다.”
“아, 그랬지.”
융은 사냥을 자주 나갔었다.
그로인해 대간들이 탄핵하는 일들이 많았지만, 답답한 구중궁궐 속에서 유일한 취미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종친들을 불러 함께 사냥을 하면서 친목을 도모한 적은 별로 없었다.
진성도 마찬가지였다.
열 살 넘는 터울의 진성은 융 자신을 늘 어려워했고, 융도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진성을 어떻게 대해야 할 지를 잘 몰라 어색했었다.
오늘 진성을 부른 건 우연이었다.
사냥에 따라나선 진성의 장인이자 융 본인에겐 처남되는 신수근(愼守勤)이 사위의 얼굴을 못 본 지도 퍽 오래 되었으니 부르면 좋겠다고 하여 불렀던 것이다.
그러다 수근은 일이 생겨 돌아갔고 진성에게 보냈던 패초를 거두어들이려는 찰나에 진성이 도착하게 된 것이다.
이복동생이라지만 같은 핏줄의 동생을 실로 오랜만에 봤는데 신하들이 다 보는 앞에서 박대 할 순 없었다.
그래서 더 허물 없이 대했는데······.
“외람되오나 신이 대군마마께 오늘의 무례를 말씀 아뢰올까요?”
피식.
풍원위의 말에 융은 작게 웃었다.
진성은 본인의 성격이 마음에 들지 않아 성격을 바꿨다고 한다.
그게 참말이든 거짓이든.
“둬라.”
“하오나······.”
“바꾼 성격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 성격인가? 나는 그리 생각한다.”
예전과 달리 살가워진 진성이 차라리 더 낫다고 생각하는 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