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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6화 (6/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6화>

    연산군이 옥루를 흘렸다

    ***

    그럼 이번엔 연시로 가볼까?

    연시라면 내가 또 잘 알지.

    “전하의 안전에서 상스럽지만 연시를 지어 올려도 되겠습니까?”

    “연시? 사내가 다 됐구나. 그래, 들어보자.”

    그렇게 말한 연산군이 지그시 눈을 감는다.

    “그대가 오기로 한 수표교.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지나치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또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그대로 지나친다. 사모하는 그대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황지우 시인의 《너를 기다리는 동안》을 시대에 맞게 약간 수정해서 들려주자 연산군의 얼굴이 순식간에 벌겋게 달아오른다.

    “입에 담기도 망측하나, 사모하는 이를 기다리는 남정네의 고달픈 마음이 단번에 담겨있구나. 또 없느냐?”

    아니, 또?

    이거 나한테 푹 빠지셨구만.

    “하오면 이번엔 이별시를 한 수 지어 올리겠습니다.”

    “이별시. 좋다.”

    도종환 시인에겐 미안하지만 일단 500년 앞선 시댄데 뭐 어때.

    “견우직녀도 이 날만은 만나게 하는 칠석날. 나는 당신을 땅에 묻고 돌아오네. 안개꽃 몇 송이 함께 묻고 돌아오네. 살아 평생 당신께 옷 한 벌 못 해 주고, 당신 죽어 처음으로 베옷 한 벌 해 입혔네.”

    “아······.”

    연산군의 눈시울이 붉어진다.

    폭군이라더니 의외로 감정적인 사람인가 봐?

    아니, 오히려 감정적인 사람이라 폭군이 된 걸지도 모르겠군.

    “저, 전하!”

    “누가 볼까 염려 되옵니다. 옥루(玉淚)를 거두소서.”

    “누가 옥루를 흘렸다고 하는가. 눈에 잠시 먼지가 들어갔을 뿐이다. 사관은 들어라.”

    사관?

    오!

    사관 그거 아닌가, 왕조실록이 엮일 수 있게 매일 기록한 사람들.

    신기함에 고개를 돌리자, 젊은 관리 둘이 보인다.

    이름은 당연히 모른다.

    “하문하소서.”

    “오늘 일은 후세에 본보기가 될 수 없으니 사초에 기록치 말라.”

    “아니 되옵니다.”

    “어허.”

    “아니 되옵니다.”

    “어찌 이리 융통성이 없을꼬.”

    쯧쯧 혀를 차는 연산군을 보란 듯이 사관들이 붓을 놀린다.

    아마, 어찌 융통성이 없을꼬. 라는 부분도 기록에 남기는 것 같았다.

    연산군이 누군줄 알면 절대 못 할 짓인데 기백이 당차다.

    근데 잠깐.

    그럼 이 시도 실록에 남는 건가?

    “아우님도 알다시피 선왕 대부터 유독 사관들이 융통성이 없어졌네. 아우님도 행동거지에 각별히 주의하셔야 할 걸세.”

    “네, 그럴게요.”

    “자, 그럼 술도 좀 올랐겠다. 내기 사냥 어떠한가?”

    “내기 사냥이요?”

    “사냥은 무릇 내기 아니던가?”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거리고 말았다.

    “네. 그러죠, 뭐.”

    “사냥을 준비하라.”

    연산군의 말 한 마디에 주변이 시끌벅쩍해지기 시작했다.

    영화《왕의 남자》처럼 몰이꾼도 오나?

    ‘어쨌든 시간 때우기엔 좋겠다. 하나 배웠어.’

    ***

    해가 뉘엿뉘엿 서산 너머로 넘어갈 때 쯤 집에 돌아왔다.

    시계가 없으니 정확한 시간은 모르겠지만 해가 긴 초여름날의 석양이니 오후 7~8시쯤 되지 않았을까 싶다.

    사냥은 재밌었다.

    좋은 거 하나 배운 것 같다.

    처음에는 아무래도 오락 때문에 동물을 사냥한다는 게 찝찝했지만, 따지고 보면 낚시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뾰족한 바늘에 아가미가 꾀어서 몸부림 치는 물고기나, 뾰족한 화살촉에 미간 혹은 몸통이 적중해서 발버둥 치다 풀썩- 모로 쓰러지는 짐승이나··· 잔인한 건 매한가지 아니겠나.

    뭐, 관점에 따라 다를 수도 있긴 하겠다만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사냥한 짐승들을 들판에 버리는 것도 아니고, 해체 작업을 거쳐서 요리 해먹기도 하니, 낚시꾼들이 잡은 물고기를 매운탕 해먹는 것과 별반 차이가 있을까 싶다.

    내기에서는 졌다.

    연산군.

    이 자식, 사냥을 겁나 잘 한다. 말도 잘 타는데 활솜씨는 명궁이 따로 없다. 아주 쏘는 족족 명중이라니까?

    “그에 반해 난······.”

    개털이다.

    애당초 말을 타본 건 제주도에 친구들끼리 여행가서 승마체험을 해본 게 전부고, 활은 쥐어본 적도 없었다.

    그런 내가 무슨 사냥이겠나?

    토끼라도 한 마리 잡았으면 모르겠지만 너무 빠르다.

    국사 교과서 같은 데 보면 XX왕은 사냥을 장려했다는 부분이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왜 그런지 알겠다. 이건 진짜 운동이 아니라 일종의 무술이다.

    왜, 옛날 사람들이 사냥으로 무예를 닦았는지 알 것 같달까.

    그래도 재미는 있었다.

    비록 한 마리도 잡진 못 했지만서도 활쏘는 게 손에 익고 말타는 게 익으면 차차 나아지겠지.

    오락거리가 전무한 시대에서 꽤 괜찮은 오락거릴 알게 돼서 다행이다.

    “대감. 이건 어디에 두면 되겠사옵니까?”

    묵직한 저음의 목소리.

    금군 아저씨다.

    직책은 들었는데 까먹었다. 금군이란 것만 안다.

    그 금군 아저씨가, 수레에 실린 짐승 사체를 가리키며 묻는다.

    짐승 사체는 딴 건 아니고, 연산군이 선물해준 거다.

    한 마리도 잡지 못 해서 시무룩해진 날 보고 “아우님, 너무 아쉬워하지말게.” 라면서 자기가 잡은 멧돼지 한 마리와 사슴 한 마리를 선물··· 아니, 하사라고 해야되겠구나.

    하사해줬다.

    폭군이란 평과 다르게 배려심도 있는지, 금군들을 내 편에 딸려보내서 배송(?)도 시켜줬다.

    “이거, 일단 마당에 내려놓으세요.”

    “예.”

    금군들이 낑낑거리며 멧돼지와 사슴 사체를 마당 뜰에 내려놓았다.

    소란을 듣고서 내 집에 속한 노복들이 하나, 둘 기어 나온다.

    “대감마님, 이건 어떻게 할깝쇼?”

    “침이나 닦고 말해라.”

    “그게 아니오라······.”

    부정하는 덕산에 피식 웃은 나는 새삼 내 노복이라는 사람들을 눈에 담았다.

    진성대군 이 자식은 자기 노복들 밥도 안 챙겨준 모양이다.

    모두 다 피골이 상접해 있다.

    “고기파티다. 이건 행랑 식구들하고 먹어라.”

    “그, 그래도 되겠습니까요? 나랏님이 내리신 건데······.”

    나랏님이 내렸다는 소리에 노복들이 웅성거린다.

    그게 그렇게 대단한 건가?

    “먹으라고 주신 거잖아.”

    “그건 그렇습죠. 대감께선 안 드십니까요?”

    덕산의 말에 난 물끄러미 눈을 부릅뜬 멧돼지를 바라봤다.

    옛날에 한 번 먹어본 기억이 있다.

    ‘노린내 엄청 났지.’

    뭐, 멧돼지 고기도 멧돼지 고기 나름이라서 숙성을 잘 하고, 요리를 잘 하면 맛있다는데 일생에 딱 한 번 먹어본 멧돼지고기는 정말 맛탱이가 없었다.

    그건 전국이 모두 청정지역에 해당하는 이 시대에도 마찬가지일 터.

    “난 생각없다.”

    “그래도 어찌 저희끼리만······.”

    “아! 질동 할아버지.”

    나는 질동 할아버지를 불렀다.

    나한테 딸린(?) 노비들 중에서 제일 나이가 많은 할아버지시기도 하다.

    심지어 이 할아버지는 본인 나이도 모르신다.

    그저 생김새로,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정황상 환갑이 좀 지났다는 것으로 나이를 유추할 뿐이다.

    근데, 21세기에서나 환갑 갓 지난 사람을 아저씨라 부르지, 여기선 천수를 다 누린 할아버지라 부른다지 뭔가?

    거기다 노비들 중에서 저렇게 오래 산 사람은 특히나 드물어서, 더더욱 대접을 해야 한다 하고.

    꼭 그게 아니어도 나보다 배는 더 나이가 많은 할아버지한테 까지 말을 놓긴 께름칙해서 흔히 질동 할아버지라 부르고 있었다.

    “예? 예, 대감마님.”

    “내 아내 되시는 분은 안채에 있습니까?”

    “예. 계신 걸로 압니다요.”

    “이거 요리하고 나면 갑련이 아줌마한테 말해서 안채에도 좀 갖다주실래요?”

    “여,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알겠습니다요.”

    굽신거리는 질동 할아버지를 보면 영 마음이 무거워서 황급히 내 방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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